지난 “2022년 한국인 12,906명, 미국인 49,449명이 자살로 소중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숫자상 “미국이 더 많지만, 10만 명 당 자살률을 살펴보면, 한국은 25.2명, 미국은 14.9명으로, 한국이 훨씬 더” 높습니다. 현대인은 “저마다 다양한 근심과 상처로 삶의 의욕을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네덜란드에 휴머니버시티란 기관이 설립되어, 다양한 프로그램을 도입해서 상처와 아픔에 빠진 현대인을 치유하는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휴머니버시티 같은 기관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과연 이런 치유 기관이 인간의 상처를 얼마나 치유할 수” 있을까요? 물론 “없는 것보다 낫겠지만, 이런 치유학교의 효능은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말씀으로 창조되었기에 ‘하나님만이 인간의 근심과 상처, 아픔과 눈물을 치유할 수 있다.'” 말씀합니다. 실제로 “세상은 우리 상처에 관해 무관심하고 냉정하지만, 따뜻하신 우리 주님은 절대로 나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게다가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처음 부르실 때처럼 부르셨는데, 이는 당시 베드로가, 자기 이름처럼 반석과 같은 믿음도, 주님을 뵐 면목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주께서 세 번째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묻자, 근심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근심하다. “원어는 ‘슬픔으로 상처 입는다.’라는 뜻으로, 당시 베드로의 상태를 잘 설명해” 줍니다.
당시 “베드로는 호언장담한 후,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기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의 반복되는 질문에 답하기가 많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따뜻하신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책망하고 질책하기보다, 위로하고 격려하며 다시 용기를” 주셨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잘 해 보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보지만, 뜻대로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또한, “생각지 않았던 슬픔과 상처에 빠지면, 내 힘으로 이를 이겨내기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최근 “심방과 상담을 통해, 성도마다 가진 아픔과 눈물을 보면서, Warm-Hearted Jesus란 주제로, 당분간 위로의 메시지를 나누려” 합니다. 저마다 “일일이 표현하지 않지만, 건강 문제와 자녀 문제, 부부관계의 파괴, 물질적인 어려움, 관계의 어려움으로 생겨나는 근심과 걱정은, 세상과 사람이 아니라, 따뜻하신 주님의 위로만이 바른 답을 줄 수” 있습니다. 오늘은 “따뜻하신 주님이 근심에 파묻혀 있던 베드로를 어떻게 치유했는지” 살펴봅시다.
1. 베드로는 근심했지만, 주님은 베드로에게 할 수 있다고 격려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묻고, 귀한 목양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 말씀했는데, 이는 모두 목양을 명하는 단어”입니다. 당시 “주님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조금이라도 회복된 후, 사명을 주셔도 되는데, 왜 굳이 근심과 상처에 빠져 있던 베드로에게 목양의 사명을” 주셨을까요? 당시 “베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 자신에 대한 실망이 가장 깊었을 것”입니다.
마침내 “베드로는 주님을 뵐 면목과 용기도 없어서, 다시 갈릴리 어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여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셔서, ‘너는 할 수 있어, 다시 힘을 내, 네 사명을 회복해.’ 따뜻함으로” 다가가셨습니다. 그렇게 “따뜻하신 주님의 위로와 격려가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 세웠던 것”입니다.
우리 “삶을 되돌아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더는 못 하겠다. 여기가 한계구나, 이제 끝이구나.’ 생각했던 때가 있었고, 어쩌면, 바로 지금 깊은 근심에 빠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무엇인가를 해보았지만 계속 실패하고, 상처받아 넘어지고, 반복되는 악순환으로 의욕마저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과거에 아픔과 좌절이 많았었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너는 할 수 있어!’ 용기와 격려가 주셨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너는 할 수 있어!’ 따뜻한 주님 음성으로 일어섰지만, 다시 삶의 근심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따뜻하신 주님은, 내가 근심하고 아파할 때마다, 언제나 ‘너는 할 수 있어.’ 말씀하시며 새 힘을” 주십니다. 요셉이 “17세에 형에게 팔리고, 보디발 아내의 모함에 빠지고, 술 맡은 관원이 자기를 잊었을 때,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사랑하는 “아버지와 작별의 인사도 못 했기에, 아버지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요?
게다가 “누구도 억울했던 요셉의 울분과 하소연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요셉의 삶이 형통했다고 말씀하는데, 당시 요셉이 눈물 흘리고 아파할 때, ‘괜찮아! 너는 할 수 있어! 아직 안 끝났어!’ 힘을 내!’ 하나님의 위로가 얼마나” 컸을까요? 다행히, “요셉은 따뜻하신 주님의 말씀과 위로로, 다시 힘을 내서” 일어섰습니다. 이를 보면 “주의 백성에게 근심과 상처가 있지만, 그럴 때마다 절대로 혼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잘 몰랐어도, 근심과 슬픔으로 힘들 때, 따뜻하신 주님은 한결같은 은혜와 사랑으로 함께하며 나를 붙잡아” 주셨습니다. 비록 “우리 삶에 항상 슬픔과 상처가 있지만, 주께서 ‘넌 할 수 있어!’ 말씀하면, 우리는 힘을 내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무안하고 염치가 없었지만, 따뜻하신 주님의 말씀에 다시 힘을 내서” 일어났습니다. Resilience는 “‘되돌아온다. 다시 튀어 오른다.’ 그리고 심리학은 이를 회복 탄력성이라고 해석”합니다.
심리학은 “회복 탄력성을 ‘역경을 경험했거나 경험하면서도 이전의 적응수준으로 돌아오고 회복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합니다. 과거 “하버드 교육 대학원은, 수만 명의 어린이 중, 학습 능력이 뛰어나고 행복감이 높은 아이의 공통점은 ‘모두 회복 탄력성이 높았다.’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들은 “항상 ‘실수해도 괜찮아, 다시 하면 돼.’ 이런 태도로 끈기 있게 문제를 해결했고, 좋지 않은 결과에도 낙담과 좌절감에 쉽게 빠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연구팀은, 회복 탄력성은 모두에게 있고, 이는 반복과 연습을 통해 더 커진다!” 말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따뜻한 주님의 격려가 있기에, 더욱 영적 회복 탄력성을 훈련해서 키워가야!” 합니다. 그렇게 “회복 탄력성이 커질수록, 우리는 세상에서 겪는 근심과 좌절에 실족하기보다 이를 디딤돌로 삼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근심과 아픔에 빠지면, ‘너는 할 수 있어!’ 하나님의 음성보다, ‘네가 뭘 해, 창피하지도 않니!’ 마귀의 음성에 속고” 맙니다. 그러나 “마귀는 절대로 나를 책임지지 못하지만, 주님은 내가 다시 거룩한 회복 탄력성으로 일어나게 계속 따뜻함으로” 다가오십니다. 매일 “우리 삶에 자녀와 물질, 건강과 관계 등등, 계속 문제가 일어나지만, 그럴수록 우리가 ‘너는 할 수 있어.’ 따뜻한 주님 음성을 듣고 믿고 붙잡아서, 승리하기” 원합니다.
2. 베드로는 근심했지만, 주님은 베드로를 도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었을 때, 베드로는 주님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불과 “얼마 전,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고, 맹세하며 부인하고, 저주하며 부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할 수 있어, 내 양을 먹이라, 치라!’ 말씀”했습니다. 성경에는 “없지만, 따뜻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할 수 있어.’ 여기에 덧붙여서 ‘네가 내 양을 먹이고 치면 내가 너를 힘껏 도울 거야.’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당시 “베드로는 도저히 목양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베드로의 상태를 외면하고, 무작정 목양 사명을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무기력과 의기소침에 빠진 베드로에게 목양의 사명을 명하셨다면, 이는 그 시작과 과정, 결과까지 돕겠다고, 책임지겠다고 약속하셨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따뜻하신 주님은 베드로만이 아니라, 깊은 근심에 빠진 내게도 항상 ‘너는 할 수 있어! 내가 너를 도울 거야!'” 말씀합니다.
그렇게 “따뜻하신 주님께서 나를 도우셔서, 지금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따뜻하신 “주님은 아픔과 상처로 근심에 빠진 나를 깊이 공감하셔서, 반드시 가장 선한 방법으로” 도우십니다. 비록 “내가 잘 몰라도 막아주시고, 열어주시고, 앞서가시고, 뒤에서 힘껏 나를” 도우십니다. 이유는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십자가 보혈로 나를 살려서 존귀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내가 따뜻한 주님의 도우심을 얼마나 깨닫고 살아가는가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를 도우려고, 요셉과 엘리사벳을 세우셨고, 다메섹에서 시력을 잃어버린 바울을 도우려고, 아나니아를 예비”하셨습니다. 모압 “여인 룻을 도우려고, 나오미와 보아스를 준비하셨고, 위축되어 무기력했던 모세, 말이 어눌했던 모세를 도우려고 아론을 준비”하셨습니다. 이처럼 “따뜻하신 주님은 하나님 백성이 겪는 근심과 상처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지만, 문제는 모두 다 주님의 따뜻하심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례로 “혹자는 근심과 아픔으로 힘들어서, 따뜻하신 주님의 도움을 깨닫지 못하지만, 혹자는 주님의 작은 도움에도 다시 힘을 내서” 일어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도움이 있다는 것보다, 그 도움을 알고 바르게 활용함에 답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나려면, 더는 근심이 가득했던 과거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주님은 이미 용서하셨는데, 베드로가 ‘나는 과거에 주님을 부인했어, 나는 어려워.’ 말했다면” 어떨까요?
이는 “과거의 죄에 관해 뻔뻔해지자는 것이 아니고, ‘과거의 상처에 붙잡혀 살지 말자.’라는 도전”입니다. “만일 그때 그 선택을 안 했다면, 그때 조금만 더 따뜻하게 대했다면, 그때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너무 자주 ‘만약~했다면’ 과거에 대한 안타까움과 후회로, 근심에 빠져” 살아갑니다. 발레리나를 “꿈꾸던 소녀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가서 부모를 잃고, 끔찍하게도, 부모를 죽인 나치 장교 앞에서 발레를 하며 기적처럼” 살아났습니다.
문제는 “비록 살았지만, 소녀는 아우슈비츠 트라우마에 갇히고” 맙니다. “나는 아우슈비츠와 지리적으로 멀어졌지만, 나는 내 안에 마음의 감옥, 두려움의 감옥을 만들었고, 침묵으로 감옥의 자물쇠를 봉했다!” 안타깝지만 “오늘 우리도 남이 아닌, 내가 만든 과거의 감옥, 마음의 감옥, 트라우마의 감옥에 갇혀 살아갈 때가 너무” 많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과거란 시간을 피할 수 없고, 과거를 내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과거로 미래의 발목을 잡을지, 과거를 미래를 위한 연료로 사용할지’ 이는 철저하게 내 선택”입니다. 교회도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과 간증을 간직함은 복된 일이지만, 과거에 붙잡혀 현실성 없는 논란에 휩싸이면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주의 백성이 서로를 돕고 합력할 때, 소망이” 있습니다. 지난주 “연석회의에서, 제가 중직자에게 간곡한 도움을” 청했습니다. “책임감 있는 봉헌 생활, 교회 공 예배 참석, 적극적인 사역 참여!”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근심과 상처로 아파하는 우리를 서로 돕는 도구로 힘있게 사용하시기” 원하십니다. 우리 “삶이 버겁지만, 항상 ‘내가 너를 도울 거야!’ 따뜻한 주님의 음성 붙들고 근심을 이겨내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