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미래학자 레너드 스윗은 현대 교회를 4-M으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➀ “Mission Church, 이는 교회 모든 동력과 사역이 복음 전파와 선교에 집중하여 뜨겁고 열정적으로 움직이는 교회”입니다. ➁ “Ministry Church, 목회적 교회는 복음 전파보다 목양과 행정에 더 중점을 둠으로, 지역 사회를 섬기는 일! 뜨거운 선교 열정을 잃어버려서 교회가 정체되어가는 모습”입니다. ➂ “Maintenance Church, 현상 유지 형 교회”입니다.

 

현상 유지형 교회는 “선교도 잃어버리고, 목양마저 잃어버려서 매주 근근이 예배만 드리는 교회”입니다. ➃ “Museum Church! 생명력과 능력을 잃고! 과거에만 붙잡혀 있는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한소망 교회는 네 가지 유형 중 어디에” 속할까요? 성경은 “주님의 교회를 건물과 제도가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라고 정의”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한소망 교회를 구성하는 우리 각자는 네 가지 유형 중 어디에” 속할까요?

 

주님은 “우리에게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선교적 삶을 지상 명령으로” 주셨습니다. 저는 “오늘 한소망 교회와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표적이 되고, 삶이 바뀌려면 나부터 선교적 삶을 살아야 함을 나누려!” 합니다. 초대 교회는 “스데반 사후! 많은 성도가 곳곳에 흩어져 선교적 삶을 살았고, 특히 바나바를 중심으로 안디옥 교회가 가장 크게 부흥”했습니다. 특히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보다 먼저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을 얻을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안디옥 교회가 힘있게 선교적 교회로 헌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안디옥 교회 성도, 바나바와 사울 모두 선교적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살아있는 “교회와 신앙인은 복음을 전하는 선교적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가 선교는 고사하고, 내부 진통으로 내 신앙 추스르기도” 버겁습니다. 마침내 “많은 교회와 신앙인이 선교적 교회가 아닌 현상 유지 교회! 박물관 성도로 전락해 가고” 있습니다.

 

선교는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그래도! 반드시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선교는 “해외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해외 선교가 있고, 주변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가” 있습니다. 동시에 “교회 안에서 넘어지고 상처받은 영혼을 살리는 것도 선교”입니다. 이처럼 “선교는 나와 주변 모두를 살리기에! 주께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역”입니다.

 

소중하기에! “선교는 무작정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사명감을 가지고 감당해야!” 합니다. 게다가 “우리 각자는 내가 알건 모르건! 주변에서 죽어가는 영혼은 물론 교회 내에서 아파하는 영혼을 복음으로 살려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한소망 교회와 우리 각자가 선교적 삶으로 헌신하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1. 선교적 삶으로 헌신하려면 우리 각자에게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당시 “흩어진 성도들이 소아시아 곳곳에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자, 빠른 속도로 수많은 무리가 주님께 돌아왔고, 마침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많은 기독교인, 바나바와 사울이 자신 없게! 우물쭈물 복음을 전했다면! 어처럼 놀라운 결과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상해 보면 “은혜받은 각 영혼이 구원의 확신으로 복음을 전했기에,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며,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 “복음에 대한 박해가 컸고, 기독교인이 곳곳에 흩어져 있어서! 상황이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는 곳마다 회개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고, 성령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하는 자와 복음을 듣는 자 모두 선교적 삶으로 힘있게 바뀌어” 갔습니다. 선교적 삶은 “물건을 파는 세일즈와 달라서 구원의 확신이 꼭 있어야!” 합니다. 언변과 “표현력으로, 영향력이 있다고, 십자가 복음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심 써서 “음식을 대접하고, 선물을 제공하고, 친절하다고 복음이 전달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교적 헌신은 “죄인인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오늘 많은 신앙인조차 구원의 확신에 무관심해서! 내가 구원받았는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잘 모른 채! 교회 마당만 밟고” 살아갑니다. 지난주! “교육부 사역자들과 모임 후! 온두라스 선교팀도 친교 모임에” 동참했습니다.

 

대화 중! “한 분의 고백이, 왜 교회에서 단기선교가 필요한지! 큰 도전과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목사님! 선교팀에서 제가 제일 고령인데!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렇게 건강 주셔서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열심히 사역하고 오도록 기도해 주세요!” 연약해도! “구원의 확신이 있는 분은 절대로 침묵하고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아직 “내가 건강하고, 말씀을 듣고 은혜받는다면! 주께서 여전히 나를 통해서 하시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부족한 나를 통해서 복음을 들어야 할 영혼, 변화되어야 할 영혼! 주께로 돌아와야 할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독교인답게 살려면, 은혜받고 날마다 변화되기 원한다면, 진심으로 주변 사람을 살리고 싶다면, 우리 자녀가 악한 세상에서 신실하게 자라기 원한다면, 누구보다! 바로 나부터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은 “죄인인 내가 회개하고 예수를 인격적으로 믿고, 내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죄인인 “내가 하나님 말씀과 은혜! 그 사랑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음을 직접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많이 들어 익숙하지만, 직접 그 은혜를 체험한 영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초년 “전도사가 부흥회에 참석했는데, 강사 목사님이 특이하게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결혼 전! 다른 사람의 아내를 안아본 적이 있습니다.”

 

모두 “깜짝 놀라며 곳곳에서 웅성거리자, 목사님께서 바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안았던 여인은 바로 제 어머니, 제 아버지의 아내입니다.” 이에 “모두 웃으며 안도했고, 이어지는 설교를 잘 경청”했습니다. 전도사가 “이를 보고, 섬기는 교회에서 부흥사와 똑같은 말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아직 미혼인데, 다른 사람의 아내를 안아본 적이 있습니다.” 모두 “깜짝 놀라서 성경을 떨어뜨리고, 졸다 깨고, 그 반응이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그러자 “전도사가 너무 큰 반응에 놀라서! 다음에 할 말을 잊고” 말았습니다. 전도사는 “울먹이며! 그런데 그 여인이 누군지 생각이 안 나요!” 말했답니다. 신앙은 “직접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능력 있고, 선교적 삶은 직접 체험한 구원의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또한 “구원의 확신은 공동체로 일어나지 않고, 개별적으로 하나님을 직접 체험함으로” 일어납니다. 결국 “신앙인에게 구원의 확신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하나님 은혜”입니다.

 

아직 “내가 바뀌지 않고, 여전히 세상적 삶이 더 편하면! 내게 구원의 확신이 있는지! 자문해!” 보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직접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나부터 나를 바꿔야!” 합니다. 부족해도! “구원의 확신이 있다면, 나와 내 가족, 교회가 바뀔 수 있고, 언제나 한결같이! 내 입술과 삶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가 구원의 확신으로 선교적 삶으로! 나를 바꾸는 승리가 있기” 원합니다.

 

  1. 선교적 삶은 지금 여기에서 내 삶으로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흩어진 유대인이 소아시아 지역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시 “선교적 삶을 산 영혼들은 말로만 주님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입술로만 복음을 전해서!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박해자 “사울이 안디옥에서, 얼마나 행함과 진실함으로 헌신하며 복음을” 전했겠어요? 만일 “사울이 말과 혀로만 사역했다면, 안디옥 교회가 그를 외면했을 것이고, 선교사로도 쓰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바나바와 사울, 많은 성도가 지금 여기서! 선교적 삶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영혼이 주께로 돌아왔고,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선교 이론과 자료가 부족해서 선교사역이 약화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교를 외치면서! 그 삶이 복음과 달라서! 스스로 복음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예수 믿자! 복음이 귀하다고 말해도! 실제 삶이 복음과 너무도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많은 교회가 분쟁하여 우리 자녀들이 상처받고 교회를 떠나고, 시간이 갈수록 교회가 점점 노령화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전도를 주장하며! 분쟁으로 동역자를 쫓아내는 모순도” 많습니다. 혹자는 “교회와 복음을 전혀 모르는 영혼도 진짜 기독교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영혼 3명만 만나면, 진짜 성도! 선교적 삶을 살아가는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진짜 신앙인! 복음대로 살아가는 영혼이 점점 줄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교적 삶은 지금 여기에서! 내게 주어진 삶에서 기독교인답게 살아감에서” 시작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많은 분이 “행전 1:8 절을 해석하며! 예루살렘을 복음화한 후 유대에 선교하고, 유대가 복음화된 후,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선교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네 지명 중간의 접속사 카이는 And 와 동의어”입니다. 이는 “복음이 순차적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네 곳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합니다.

 

지금 “내가 삶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면,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혹시 가까운 곳에 있다면, 가까운 곳에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지금 여기! 그곳은 해외가 될 수 있고, 직장과 가정, 가까운 인간관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굳이 “예수 믿으세요! 말하지 않아도! 내 언행에서 주님이 보이고 나타나는 삶이 선교적 삶”입니다.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하나님 믿는 사람은 다르구나! 저렇게 살아야지! 나타나야!” 합니다.

 

이처럼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이 보이는 것이 오늘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선교적인 삶”입니다. 이를 위해 “성도는 때로 손해 보고, 희생하고, 억울함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으로 사는 선교적 삶은 주께서 채우시는 은혜가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무신론자 “맬컴 마거릿지가 캘커타에서 테레사 수녀와 3일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 후 “놀랍게도 맬컴이 무려 25년간 고집했던 무신론을 버리고, 복음을 영접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는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테레사 수녀가 저렇게까지 전 생애를 걸며 헌신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그 놀라운 힘이 어떻게 생기는지 알기 위해서, 나는 앞으로 하나님을 믿어보려 한다.” 당시 “테레사 수녀가 기독교 신앙과 복음에 관해서 전혀 말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금 여기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는 모습이 25년 무신론자를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부족해도 “바로 나부터! 먼저 지금 여기서! 삶의 선교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선교적 삶을 살기 원한다면, 코람 데오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코람 데오는 “내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겠다는 영적인 결단”입니다. 유혹이 “있어도! 코람 데오! 지금 여기서! 내 앞에 계신 주님을 의식하고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어렵지만 “코람 데오가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반복되면 생활이 되고, 코람 데오 생활이 반복되면, 내 인격과 신앙이 지금 여기에서! 선교적 삶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한주도 “코람 데오 신앙으로 지금 여기서 선교적 삶을 살아감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