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시라쿠스에는 유명한 동상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앞은 머리숱이 무성하고, 뒤는 대머리고, 발에는 날개가 있어서! 보는 이마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그러나 “동상 밑에 적힌 글을 보면, 큰 도전과 감동을” 받습니다. “앞의 머리가 무성함은 나를 보고 쉽게 붙잡게 하기 위함이고, 뒤가 대머리임은 내가 지나가면 다시 못 잡게 하기 위함이고, 날개는 최대한 빨리 달아나기 위함이다! 내 이름은 기회이다!”
우리는 “각자 내 삶을 더 발전시킬 기회를 붙잡으려고” 노력합니다. 실례로 “승진을 위해 노력하고, 일확천금을 노리며 복권을 사기도”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보다 세상이 주는 기회를 더 찾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의 기회는 잠깐 왔다 사라지기에! 하나님 주시는 기회와 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지난주 예고처럼! 내가 나를 바꾸려면 꼭 필요한 예배에 관해 나누려” 합니다.
여러분은 “모든 예배가 하나님께서 내 삶과 미래를 바꾸도록 주신 기회임을” 아세요? 그러나 “많은 신앙인조차 예배가 하나님 주시는 소중한 기회임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많은 신앙인이 형식적인 예배자로, 교회 마당만 밟고” 살아갑니다. 혹자는 “어쩔 수 없이! 안 오면 불편해서! 습관적으로 예배에” 참석합니다. 혹자는 “예배가 너무 많고, 쉽게 접할 수 있기에! 예배의 소중함을 전혀 모르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형식적 예배가 습관화되면, 무능력한 예배가 생활화되고, 마침내!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으로 굳어지고” 맙니다. 본문은 “선민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려고 성전에 오르며 부르는 찬양”입니다. 학자들은 “선민이 성전으로 가는 중! 위험한 유대 광야를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 이 찬양을 불렀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영혼이 이 찬양을 부르며 성전에 올랐다!” 말합니다. 공통점은 “둘 다 삶의 아픔과 고통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주께 예배드려야 할 이유와 너무도” 유사합니다.
예배는 “세상에 파송되었던 주의 자녀가 다시 주께 돌아와서 주님을 만나는 기회! 세상에서 당한 아픔과 고통에서 위로받고, 치유 받는 기회”입니다. 세상을 “바꾸려면! 우리 각자가 바른 예배자, 교회가 바른 예배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에 “왜 예배가 주께서 주신 기회인지! 바른 예배 자세에 관해” 살펴봅시다.
-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기에 귀한 영적 기회가 됩니다.
본문은 “다른 시편과 달리! 1절부터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물으며 시작”됩니다. 이에 “2절은,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답합니다. 또한 “이어지는 3~8절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주의 백성을 돕는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지키는 분! 삶의 그늘이 되는 분, 해와 달로부터 보호하는 분, 환난을 면케 하는 분, 영원히 함께하는 분!” 특히 “하나님의 지키심! 이 단어가 무려 6번이나 반복”됩니다.
실례로! “졸거나 주무시지 않고, 모든 환난에서 우리를 지키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저자는 “자신의 인생을 철저하게 지켜주신 하나님 은혜를 체험했기에! 이처럼 자신 있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기회! 예배는 절대로 일방적이지 않고, 하나님과 성도의 깊은 교류가 있는 쌍방적 소통의 기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찬양과 기도, 봉헌을 드리고, 하나님은 말씀과 은혜를 채워” 주십니다.
결국 “우리는 짧은 예배시간이지만! 반드시 하나님 주시는 말씀과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예배 중! “힘들고 어려운 삶에 대한 분명한 대답과 메시지,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무지할 때! 예배를 통해 그 해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내가 잘 몰라도! 하나님께서 연약한 나를 이 자리까지 부르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 자리만 차지하지 말고! 주님 주시는 메시지를 받아야!” 합니다.
단지 “귀로 들리는 말씀이 아니라, 주께서 내게 직접 주시는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예배 중 “지금 이 말씀을 듣게 하심은 내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 내가 꼭 듣고 받아야 할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예배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말씀을 듣지만! 주님 주시는 메시지를 듣는 영혼과 그렇지 않은 영혼이 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 요셉은 “17세에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애굽에는 요셉 외에도! 말하는 짐승! 감정을 가진 짐승! 처참한 노예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독! 요셉만 애굽의 총리로” 세워집니다. 이유는 “요셉이 한결같이! 주께서 주시는 메시지를 풍성하게 받고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주께서 예배를 통해 주시는 메시지를 받으면 우리 삶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메시지는 “지금 내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해석해 주고, 새로운 결단과 방향을” 열어줍니다.
메시지는 “힘들고 어려운 내 삶에 꼭 필요한 용기와 격려, 소망을” 줍니다. 메시지는 “나태하고 낙담한 내게 ‘일어나라! 힘내라! 하나님이 죽었냐?’ 책망하고 꾸중하며, 넘어진 나를 일으켜” 세웁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우리가 바뀌고! 소생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들고 바쁠수록! 하나님 주신 기회! 예배를 가장 소중히 여기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예배의 자리를 신실하게 지켜야!” 합니다.
특히 “한주의 첫날! 주일 예배를 통해 하나님 주시는 메시지를 받아야!” 합니다. 만일 “출타 중이면! 가까운 곳에서 예배드리고! 귀가 후에는 한소망 교회에서 선포된 말씀을 다시 들으며, 영적 동역의 길에 동참해야!” 합니다. 아니! “우리는 주일 말씀을 예배드릴 때는 물론 주중에도 다시 반복하여 들어야!” 합니다. 이유는 “예배 중 듣는 말씀과 악한 세상을 살아가다가 듣는 말씀이 전혀 다르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선민이 “선민답게 살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이 바로 반복”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선포된 말씀을 반복하여 들어야! 그 말씀이 내 삶에 새겨지고, 어렵고 힘들 때마다 생각나게 되고, 들은 메시지대로 실천하여 내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결국 “인력이 아닌 예배를 통해 선포된 메시지가 내 삶과 교회를 바꿀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주도 “예배를 통해 선포된 메시지를 붙들고 나를 바꾸며 승리하기” 원합니다.
- 예배는 간절함으로 드려야 하나님 주신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본문을 보면, “유독 하나님의 지킴과 도움, 보호하심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마다 많은 방해와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례로 “유대 광야의 척박함과 바벨론의 압제는 큰 위험과 고난”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와 유대인은 예배를 위해 성전에 오를 때마다 더” 간절해졌습니다. 갈급함으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 해와 달로부터 지켜주신 하나님을 소망”했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도 선민의 간절함을 아시고! 돕겠다! 지키겠다!” 답하셨습니다. 문제는 “이처럼 주님의 지키심과 도우심을 모두가 누리지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오직 “매 순간! 주의 도우심과 지키심을 간절하게 원하는 영혼이 받을 수 있는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간절함으로 주를 찾는 영혼을 만나” 주십니다. 오늘 “우리의 가장 큰 영적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영적 간절함이 점점 식어감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편리하게 해 주는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특별히 요청할 것이 많지 않고! 마침내 예배가 점점 냉랭해져” 갑니다. 결국 “예배를 통한 은혜 없이도! 큰 아쉬움 없이 나는 잘살고 있다!” 착각합니다. 두렵게도 “이것이 얼마나 큰 문제이고! 얼마나 큰 영적 질병인지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 삶이 바뀌려면! 무엇보다 예배에 대한 간절함과 사모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여기서 “간절함은 하나님 없으면 안 된다는 고백! 세상 그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이 내 삶에 꼭 필요하다는 고백”입니다. 결국 “연약한 우리 삶에 영적 간절함과 갈급함이 없으면 주님 주시는 은혜와 기회는 쉽게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신학교 때! “한 목사님께서 채플 시간에 하신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이 분이 “북한 지하교회를 방문하여! 말씀을 전하는데! 모두가 너무도 간절히” 들었습니다. 문제는 “설교가 끝났는데, 귀가는 고사하고, 이구동성으로! 그 설교 한 번만 더 해 달라!” 간청했습니다. 이에 “목사님께서 같은 설교를 다시 했지만, 모두가 미동도 하지 않고” 경청했습니다. 그렇게 “두 번째 설교가 끝났는데, 또 설교해 달라! 요청해서 세 번째 설교까지 마쳤고! 네 번째 요청을 마다하고 예배를” 마쳤습니다.
이처럼 “같은 설교를 반복하여 요청함은 지하교회에 목회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하교회 성도들의 간절함과 갈급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고” 합니다. 그들은 “목회자가 없어서! 라디오에서 설교를 녹음하고, 이를 노트에 일일이 기록하여, 주일에 읽는 것이 설교지만! 예배마다 너무 간절하고” 뜨겁습니다.
그들의 “소원은 자기 성경을 가지는 것이고, 성경을 가지면 헤어지도록 읽고 또” 읽습니다. 생각할수록! “오늘 이곳에서 신앙생활 하는 우리와 너무도” 다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은혜에 대한 뜨거운 눈물, 첫사랑을 잃어버리고도 전혀 불편해하지!” 않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신 십자가! 하나님 사랑을 들어도! 더는 가슴이 뛰지!” 않습니다. 훗날 “지하교회 성도들이나 우리가 함께 하나님 심판대에 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는 편한 미국에서 신앙생활 했다고, 우리의 영적 나태함을” 덮어주실까요? 쉽지 않아도! “예배에 대한 자세와 태도를 바꾸어야! 내가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의 예배 온도는” 어떠세요? 만일 “내 예배에 간절함이 없으면! 내 신앙은 이미 느슨해졌고!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죽어있는 “예배자가 어떻게 주님을 만나고! 어떻게 은혜를 누리며,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겠어요?
우리가 “정말 세상과 나를 바꾸고 세상의 표적 되는 교회를 가꾸려면! 가장 먼저 예배에 대한 사모함! 갈급함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힘들어도! “모든 예배를 마음과 뜻, 힘과 정성을 다해서 드려야!” 합니다. 이제라도! “하나님 주신 기회! 예배를 소중히 여겨서 간절함으로 드리고! 나를 바꾸어 갈 수 있기” 원합니다. 나아가서 “간절한 예배를 통해! 우리 가정과 자녀들! 교회와 직장이 하나님의 표적이 되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