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베는 “맨발의 영웅, 세계 신기록으로 올림픽 마라톤 2연패를 이루었지만, 개인적인 삶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아베베는 “에티오피아 군인으로 한국전에 참전하여 생사의 고비를 넘겨야!” 했습니다. 1969년 “올림픽 2연패 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세계적 마라토너가 혼자 힘으로 설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베베는 양궁으로 종목을 전환해서 1970년 노르웨이 장애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러나 “아베베는 휠체어를 탄 채, 또 다른 교통사고로 41세에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비록 “한 시대를 풍미한 육상 영웅이었지만, 아베베의 인생은 하루하루가 참으로 고되고 힘들었던 불투명함의 연속”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도 내일을 알 수 없기에, 불투명한 하루하루를 평안히 보낼 수 있다는 것이, 어쩌면 가장 큰 은혜와 기적일 것”입니다. 최근 “우리는 어둡고 힘든 삶의 터널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투명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불투명한 일상을 살아가면서, 과연 어떤 자세와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에 있습니다. 사람은 “불투명한 일상에서 좌절하고 낙담할 수도 있고, 반대로 아베베처럼 삶의 불투명함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왕상 18:3절은 “오바댜를 왕궁 맡은 자, 곧 궁내 대신,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로” 소개합니다.
하지만 “신실했던 오바댜가 살아가는 현실은 아합과 이세벨의 폭정이” 극심했습니다. 게다가 “3년 넘게 가뭄이 계속되었고, 선지자 100명의 생계를 책임지는 부담도” 컸습니다. 또한 “바알 숭배로 인한 영적 타락이 커서 엘리야마저 힘들고 고될 정도로 상황이” 열악했습니다. 얼핏 보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하루하루가 너무도 불투명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바댜는 이처럼 불투명한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잘 이겨” 나갔습니다.
오바댜의 “삶은 오늘 우리 이민자의 삶과 너무도” 유사합니다. 누구도 “지금의 불투명함이 언제 끝날지,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일상의 불투명함을 알고, 이를 한탄하고 호소할 수 있지만, 한탄과 호소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오히려 “불투명한 일상을 인정하고, 이를 극복할 지혜를 말씀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불투명한 일상을 살아가지만, 어떻게 이를 극복하고 주님을 따라갈지!” 살펴봅시다.
1. 하루하루가 불투명하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함으로 하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오바댜는 “영적으로 가장 어두울 때! 아합과 이세벨 모르게 선지자 100명을 숨겨서” 보호했습니다. 만일 “이세벨이 궁내 대신 오바댜가 자신이 박해하는 선지자 100명을 책임지고 있음을 알았다면” 어땠을까요? 아합도 “오바댜가 행하는 일을 몰랐기에, 오바댜와 물과 짐승의 먹이를 찾아 나섰을 것”입니다. 당시 “오바댜의 삶은 항상 불안한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었고, 하루하루 불투명함이 극심했지만, 믿는 자의 자리를 잘” 지켰습니다.
그래서 “오바댜는 선한 일을 행하는 중 엘리야를 만났지만, 불투명한 현실로 인해 그 두려움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투명한 현실에서 두려워하는 오바댜를 눈동자처럼 지켜주셔서 두려움을 이기고, 담대함으로 살아가도록 모든 일상을 책임져”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오바댜처럼, 불투명한 일상과 미래로 인한 두려움과 답답함이 참으로” 큽니다. 이민자로 “매일 장담할 수 없는 미래, 건강에 대한 염려도 참으로” 큽니다.
게다가 “계속 가중되는 경제적 어려움, 상황적 불안감과 어두움, 이와 비례하여 더 깊어지는 영적 낙담, 시험과 실족으로 인한 심적 상처, 두려움과 답답함이 날마다 더 커져” 갑니다. 그런데 “부자와 권력자, 세계적 석학도 이처럼 삶의 두려움 중에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성경에 등장하는 영적 거장들도 두려움 속에서 불투명한 일상을” 살았습니다. 야곱은 “형의 복을 가로챌 때, 축복권을 얻고 형을 피해 도망갈 때 심히” 두려웠습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귀향하며 에서가 300명을 데리고 온다는 말을 듣고 두려웠고, 세겜에서 이방 민족에게 언제 어떻게 공격당할지 몰라서 두려웠고, 요셉에 이어 베냐민을 잃을 것 같아서 심히” 두려웠습니다. 게다가 “애굽으로 이주할 때도 두려웠고, 이처럼 야곱도 불투명한 현실을 살아가며 두려움과 불안감이 참으로” 컸습니다. 이처럼 “연약한 인간은 천국에 가기까지, 불투명한 일상에서 매번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 41:10절은, 불투명한 현실에서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다행히! “하나님께서 내 두려움과 아픔을 모두 아신다!”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불투명한 일상을 아시고 이해하고 책임지겠다!” 약속합니다. 마 6:27절은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말씀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말씀을 듣고, 계속 불안하게 살지, 담대하게 살지, 그 선택은 내게”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일상이 불투명하여 두려울수록, 하나님께 내 모든 것을 다 맡겨야!” 합니다. 오바댜가 “선지자 100명을 책임질 때, 하나님께 온전히 맡겼기에 두려움과 중압감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오바댜가 하나님께 다 맡겼기에, 선지자 100명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반만 맡기면 두려움의 반만 사라지고, 다 맡기면 두려움을 전부 이겨 낼 수” 있습니다. 금문교는 “227m 높이의 탑에서 총 1280m를 늘어뜨린 두 줄의 케이블에 다리가 매달려” 있습니다. 처음 “금문교를 건축할 때, 1년 동안 무려 23명이 공사 중 다리에서 떨어져” 사망했습니다. 이유는 “빠른 물살과 짙은 안개가 공사를 너무도 어렵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건설회사는 고민 끝에, 다리 아래에 거대한 그물망을” 깔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후 떨어져 죽는 사람이 없었고, 공사 진척도가 20%나” 빨라졌습니다. 이유는 “인부들이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내가 넘어지며 떨어지고, 아파하고 힘들어할 때, 삶의 그물망이 되셔서, 내 인생을 지탱해주심을” 아세요?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하나님께 내 모든 것을 맡기며 살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맡김은 “선할지 악할지 그 결과를 전혀 몰라도, 불투명한 일상에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나를 불러도, 내가 이를 거부하며” 삽니다. 게다가 “우리는 불투명한 일상을 맡기지 못하고, 혼자 해결도 못 하면서 전전긍긍하며 살아갈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불투명한 “현실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지금, 연약한 인간은 어렵고 힘든 일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이를 맡아서 책임져 주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주도 “불투명한 일상 중에도 하나님께 다 맡김으로 두려움을 이겨 내기!” 원합니다.
2. 하루하루가 불투명해도, 눈앞만 보지 말고 멀리 보고 하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오바댜는 “선지자 100명을 50명씩 굴에 숨겨서, 떡과 물로 그들을” 섬겼습니다. 오바댜는 “궁내 대신이었기에 아합과 이세벨이 신앙을 얼마나 억압했는지,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당시 “아합과 이세벨이 오바댜의 정체, 그가 행한 일을 알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로 인해 “오바댜의 일상은 몰래 100명을 섬기며 매번 감시를 피해야 했고, 사람도 가려서 만나야 했고, 말조심해야 했고, 자신이 누릴 많은 특권을 포기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처럼 “오바댜가 불투명한 일상에서 담대함으로 하나님을 따랐던 이유는, 이것이 끝이 아니라 더 나은 내일이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눈앞의 “고난과 아픔보다, 다가올 미래가 더 나아지고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불투명한 현실을 이겨 냈던 것”입니다. 우리가 “불투명한 일상에서 눈앞만 보는 삶과 멀리 보는 삶이 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 눈앞만 보면! “내 뜻대로 안 되면 일희일비하고, 짜증 내고 불평하며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멀리 보고, 더 나은 것을 볼 수 있다면, 아직 기회와 시간이 있기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기에, 불투명한 현실에서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매번 하나님의 일하심보다 눈앞만 보고, 지금 내 생각과 판단이 항상 옳다는 편견과 아집, 자기 의로움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멀리 보고, 좀 더 깊게 보고, 좀 더 높게 볼 수만 있다면, 불투명한 현실에 절대로 붙잡혀 살아갈 수” 없습니다.
아이가 “학교 선생님이 주신 편지를 가지고” 귀가했습니다. 아이가 “글을 몰라서 엄마에게 편지를 읽어달라고 했고, 엄마는 큰 소리로 편지를” 읽었습니다. “이 아이는 천재입니다. 우리 학교는 이 아이를 가르치기에 너무 부족하니 아이를 가정에서 양육해 주세요!” 엄마는 “아이를 가정에서 믿음으로 양육해서, 훗날 아이는 세계적인 발명가가” 되었습니다. 훗날 “발명가가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 중,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받은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이 아이는 저능아입니다. 학교는 더는 아이를 받아줄 수 없어서 퇴학에 처합니다.” 아들은 “편지를 들고 하염없이 울며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에디슨은 저능아였지만, 그 어머니는 그를 시대의 천재로 키웠다!”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낸시 에디슨은 눈앞의 부족한 에디슨보다, 에디슨의 창대한 미래를 보았던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불투명한 일상에서 눈앞보다 멀리 보며 살아가려면, 하나님이 나를 책임지고 보호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의 책임지심을 불신하면, 절대로 먼 미래를 바라볼 수” 없습니다. 오바댜가 “하나님의 책임지심을 불신했다면 어떻게 선지자 100명을” 살렸겠어요? 연약해도 “우리가 하나님의 책임지심을 확신하면, 불투명한 일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그 어떤 문제에도 흔들리지 않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을 “핍박했던 바울이 회심했지만, 모두가 거부하여 고향 다소에서 10년 넘게 칩거해야!” 했습니다.
젊은 시절 “열정과 믿음, 율법 지식과 능력이 탁월했지만, 10년을 흘려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바울을 찾아와서 안디옥 교회에서 함께 동역하자고 청해서, 마침내 바울이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바나바와 동역하며, 예루살렘 교회도 듣지 못하였던 그리스도인이란 호칭까지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세상 사람과 달리, 눈앞에 보인 바울이 아니라, 바울이 훗날 맺어갈 열매와 상급, 먼 미래를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비록 “지금은 10년 이상을 칩거 중이었지만,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바울과의 동역을 책임져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책임지심을 믿고 바울의 미래를 보았던 바나바의 지혜로, 역사가 바뀌었던 것”입니다. 부족해도 “우리가 하나님의 책임지심을 확신하면, 눈앞의 문제로 흔들리지 않고 더 멀리 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눅 18:8절에서 인자가 올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의 공생애는 물론 오늘까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고 연약함을 경고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눈앞만 보고 살아가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책임지심을 확신하고 먼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가는지, 자문해야!” 합니다. 다행히 “아직 안 늦었기에, 불투명한 일상에서 우리 믿음을 더 깊이 살펴야!” 합니다. 한주도 “우리가 하나님의 책임지심을 확신하며, 눈앞보다 더 멀리, 온전함을 바라보며 신실하게 주님을 따라 살아가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