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서 사역 중, 영국을 방문하여 모 대학에서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리빙스턴은 사자의 공격으로 한쪽 팔을 쓸 수 없었고, 27차례나 걸렸던 말라리아로 육체 곳곳에 상처와 아픔이” 역력했습니다.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검붉었고, 얼굴에 패인 주름도 참으로” 깊었습니다. 리빙스턴은 “말씀 중 청중에게 ‘외로움과 고통, 박해와 고난에도 나를 지탱해준 힘이 무엇인지 아세요?’ 묻고, 잠시 후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것은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말씀하신 그 약속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인간에게 약속을 통해 은혜를 주시고, 약속의 성취로 그 은혜가” 완성됩니다. 문제는 “하나님 약속은 항상 성취되지만, 우리의 불신 때문에 하나님 약속에서 벗어나고 중간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17세의 요셉에게 같은 꿈을 두 번 꾸게” 하셨습니다. 형들의 “곡식단이 요셉에게 엎드리고, 해와 달 그리고 11개 별이 엎드리는 꿈을 연이어 꾸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꿈 이야기를 한 결과 본문 18절 말씀처럼, 발에 차꼬가 채워지고, 몸은 쇠사슬로 묶이는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13년을 고생한 끝에 애굽 총리가 되었고, 7년 풍년과 2년 흉년을 겪으며 39세 때, 어릴 적 꾸었던 꿈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요셉을 향한 하나님 약속의 성취와 함께,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보여준 요셉의 태도에 관해” 도전합니다. 요셉이 “신실하게 하나님 약속을 믿고 주님을 따랐기에, 꿈이 이루어졌고 가족 모두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요셉이 “약속의 성취를 믿고 주님을 따랐기에, 선민이 애굽에서 하늘의 별처럼 많아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매번 나에게 주시는 말씀과 은혜도 역시, 모두 나를 향한 하나님 약속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 약속은 하나님의 때/방법/사람을 통하여 성취될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는 영혼과 그렇지 않은 영혼이 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약속은 어렵게 보이고 더뎌 보여도 반드시 성취”됩니다. 문제는 “나부터 내게 주신 하나님 약속을 바로 깨닫고 그 성취를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기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따르며 살아갈지!” 살펴봅시다.

1. 약속은 이루어지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요셉이 “애굽 총리가 되기까지 13년이 걸렸는데, 그동안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채색 옷 대신 “발에 차꼬가 채워지고 몸에 쇠사슬이 매여”졌습니다. 보디발 “아내의 미혹으로 억울하게 투옥되기도 했고,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몽해 주었지만, 자신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시 “요셉은 많이 외로웠을 것이고, 많이 울었을 것이고, 많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좌절과 낙담이 너무 커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요셉은 ‘그렇기 때문에’ 보다 ‘그런데도’ 주님을 따랐기에 살 수” 있었습니다. 누구도 “그 인생이 자기 예상과 계획대로 되지 않고, 예상치 못한 어려움과 환난이 항상” 찾아옵니다. 실제로 “오늘 우리의 삶은 예상한 고난보다 예상치 못한 고난 때문에 더 힘들고” 어렵습니다. 이처럼 “내 인생도 ‘그렇기 때문에’ 보다 ‘그런데도’ 전개될 때가 더 많았지만, 놀랍게도 ‘그런데도’ 신앙이 연약한 내게 주는 교훈과 가르침이 훨씬 더” 컸습니다.

그런데도 “견디었기에, 더 새롭고 깊은 하나님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을 따랐기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믿음을 지켰기에, 하나님께서 영생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삶에 환난과 고난 시험과 상처가 커도, 그런데도 주님을 더 신실하게 따라가야!” 합니다.

만일 “내 삶에 그렇기 때문에만 반복된다면, 내 인생은 무미건조해지고, 영적 체험도 제한적일 것이고, 하나님의 일하심도 깊이 체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녀 “때문에 아팠지만, 더 기도하며 자녀를 이해하게 되었고, 심지어 다른 가정도 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질병이 “힘들고 아팠지만, 더욱 하나님을 붙들고, 중보기도의 은혜를 누리며, 내가 영적으로 더 자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그런데도’ 주님을 따라가는 신앙을 붙잡고 잃지 말아야!” 합니다. 목회 중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주님의 공생애 사역을 생각하며 큰 위안을” 받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 많은 사람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매번 “주님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무분별한 박해도” 많았습니다. 동행하는 “사도들은 매번 서로 크다고” 다투었습니다. 주님께서 “세리와 죄인을 구원하려고 손을 내미실 때마다, 매번 이를 부정하다!” 정죄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하나님을 따랐기에, 오늘 나에게 구원을 주셨고, 그런데도 하나님을 따랐기에, 내가 지금도 은혜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 역시 그런데도, 묵묵히 하나님을 따랐다면, 죄인인 우리는 더욱 그런데도 주님을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요? 살면서 “힘들어도,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에, 매사에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힘들고 “괴로워도, 비상식적이고 억울해도, 시험이 들어도 주님을 생각하며, 그런데도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포기하는 영혼과 ‘그런데도’ 주님을 따르는 영혼이 받는 상급, 맺는 열매, 하나님의 평가가 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 썬다싱이 “동료와 함께 히말라야 산길을 지나는 중, 혹한에 죽어가는 영혼을 발견”했습니다. 이에 “썬다싱은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동료에게 ‘이 사람을 번갈아 업고 길을 가자!'”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동료는 썬다싱의 제안을 한마디로 거절하고, 혼자 그렇게 하라며 먼저 길을” 떠났습니다.

썬다싱은 “혼자 힘겹게 죽어가는 사람을 업고 길을 가는데, 얼마 후, 먼저 떠난 동료가 죽어 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사연을 보니 “썬다싱은 너무 힘들었지만, ‘그런데도’ 죽어가는 사람을 업어서 체온을 유지하여 살았지만, 동료는 혹한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데도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하고, 하나님을 따라야 할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을 따르는 주의 백성에게 은혜가 있고, 하나님의 주목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힘들지만 “그런데도 주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성경이 약속한 복이 있고, 버거워도 주님을 따라가는 자에게 고난과 질병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현실을 보면, ‘그렇기 때문에’ 보다 ‘그런데도’ 주님을 따라가야 할 중요한 시점을” 살아갑니다. 문제는 “내 선택에 따라 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볼 수 있고, 하나님 약속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한주도 “어렵지만, 그런데도 주님을 따라가서 하나님 약속이 성취되는 은혜가 있기” 원합니다.

2. 약속이 이루어지기에, 배우고 자라가며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본문 19절은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말씀합니다. 만일 “요셉이 17세에 노예로 안 팔렸다면, 과연 그가 애굽 총리가” 되었을까요? 또한 “요셉이 보디발 가정 총무로 일하며, 배우고 자라지 않았다면, 애굽 총리가” 되었을까요? 감옥에서 “배우고 성장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애굽 총리로 제구실할 수” 있었겠어요?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몽하고, 즉시 해결책까지 제시할 정도로 통찰력이” 깊었습니다.

이는 “요셉이 노예로 살았지만, 항상 배우고 자라며 하나님을 따랐음을” 강조합니다. 만일 “요셉이 배우고 자라지 않았다면, 요셉은 성경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누구나 부족하기에, 배우며 자라지 않으면, 실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배움은 “내가 부족함을 인정하고, 더 성장하기를 원하는 사람만 가질 수 있는 삶의 자세”입니다. 실제로 “내 생각만 옳다고 고집부리며 나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배우며 자라갈 수” 있겠어요?

벧후 3:18절은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말씀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 배우고 자라려는 열정이 없고, 배움을 귀찮은 일, 번거롭고 부담스러운 일로 여기는 모순이” 큽니다. 축복을 “사모하면서, 축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심지어 배우기를 거부하는 모순도” 큽니다. 더 “나아지고 성장하기를 원하면서, 배우기보다 내 고집과 고정관념에 붙잡혀 사는 모순도 참으로” 많습니다.

악한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은 끊임없이 배우며 자라야 영적으로 넘어지지 않고, 신실하게 주님의 길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특히 “팬더믹 시대의 변화 속도가 너무 빠른데, 우리는 배우고 성장하려는 열정보다 멈추고 위축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다시 마음을 굳게 먹고, 세상이 빨리 변해갈수록 더 배우려는 의지,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려는 결단을 가지고 영적으로 더 성장해야! 주님을 신실하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출애굽 1세대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한 끝에 사망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한결같이 율법으로, 사건과 사고를 통해, 이적과 표적을 통해, 주의 종의 말씀을 통해 선민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선민은 충분히 배울 내용, 배울 기회가 많았지만, 매번 과거 애굽의 사고에 붙잡혀서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자라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하다가, 그렇게 광야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출애굽 2세대는 광야에서 모세와 율법을 통해 끊임없이 배우고 자라며 가나안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현대사회가 너무 복잡하고, 너무 빨리 변해서 정신없다고 말하면서,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배우기보다 정체되어서 옛날 방식을 고집하며 강요할 때도 적지!” 않습니다. 지금 “팬더믹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역설적으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적응하며 주님을 따라가야 할 적기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배우려 하면, 우리 삶은 더 크게 자라고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박경희 씨는 “1956년 이대에 입학해서, 50년 후, 2005년에 졸업”했습니다. 이유는 “이대 입학 후 결혼하여 학칙에 따라 제적되었지만, 2003년 금혼 학칙이 해제되면서 학업을 재개하여 졸업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박경희 씨가 “책가방을 메고 등교하면, 수위가 전단지 나눠주는 할머니로 오해해서 이를 피해 화장실에 도망간 경우도 참으로” 많았습니다.

박경희 씨는 “80세에도 여전히 배움의 길을 계속 걸어” 갔습니다. 박경희 씨는 “개인적으로 죽기까지 10개의 악기를 배울 계획을 세웠는데, 무려 7개 악기를 배워서 연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연약할수록 “배우며 주님을 따라간다면, 지금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이 있고, 더 많은 것을 보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가끔 “교회 어른과 카톡 하면 받침이 틀릴 때가 많지만, 그래도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시도하는 모습이 너무 귀하게” 여겨집니다.

헤매지만 “화상통화를 새로 배우고 시도하는 모습을 보면, 큰 도전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을 더 깊이 배워가야 하고, 더 자라서 힘 있게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부족하지만 “어떤 방법이든, 말씀을 통해 배우면 자랄 수 있고, 그러면 더 신나게 주님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한주도 “하루에 하나라도, 하나님 메시지와 은혜를 통해서 배우고 자라가는 거룩한 습관을 만들어가며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