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무신론 단체인 영국 인본주의협회가 영국과 유럽 몇 개국 버스에 특이한 광고를” 기재했습니다. “신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제 걱정하지 말고 인생을 즐겨라!” 그러자 “스페인 기독교 단체가 이에 맞대응하는 버스광고를” 실었습니다. “하나님은 존재한다. 예수와 더불어 인생을 즐겨라!” 무신론자는 “‘신은 아마도’ 주저했지만, 기독교 단체는 자신 있게 하나님이 존재함을” 선언했습니다. 최근 “한국교회 성도가 계속 줄어가고” 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현대 기독교인이 예수를 잘 믿지 않는 불 신앙 때문”입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주일 예배와 새벽기도까지, 다양한 성경공부도 잘 참석하고, 헌금 드리고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하면서 ‘나는 예수를 잘 믿어!'” 착각합니다. 그러나 “신실한 신앙은 이런 행위를 넘어 마음의 중심이 변하는 거듭남이 있어야!” 합니다. 삶에서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고백으로 하나님을 따라서 살아갈 때, 불 신앙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홍해 사건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통쾌한 승리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홍해의 통쾌한 승리가 있기 전, 선민은 불평과 불만, 두려움과 과거에 붙잡혀서, 불 신앙이 극에” 달했습니다. 모세가 “걱정하지 말아라! 애굽 사람을 다시 볼 일이 없을 거야! 설득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이처럼 “깊은 불 신앙은 선민과 모세, 하나님까지 모두를 힘들게 하였지만, 선민을 공격하는 바로와 애굽 군대를 기쁘게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렵고 힘들수록, 더 신실하게 하나님을 따라가야 함을 알면서도, 현실은 온전함보다 어정쩡한 불 신앙으로 ‘따라가 주는’ 경향이 더” 큽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능력 있는 신앙,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신앙이 아니라, 내 만족과 의로움을 신앙으로 착각하며 하나님을 따르기에, 변화는 고사하고 고집스러움만 더 커지고” 있습니다.
불 신앙은 “신앙이 아니기에, 능력과 은혜는 물론 변화와 영생도” 없습니다. 아무리 “주여 주여, 외치며 주님을 따라가도, 마 7:2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우리가 “이제부터 팬더믹 이후를 바르게 준비하려면, 무엇보다 신실한 신앙으로 불 신앙을 극복해가야!” 합니다. 홍해에 “있던 선민의 불 신앙을 통해, 어떻게 하면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라갈지!” 살펴봅시다.
1. 주님을 따르려면, 내 뜻대로 하나님을 따라가는 불 신앙을 극복해야 합니다.
본문 10절에서 “선민은 애굽 군대가 자기들 뒤까지 다가온 것을 보고,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부르짖다! “차이쿠는 ‘크게 소리친다. 도움을 청하다.’란 뜻”입니다. 때로 “차이쿠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로 쓰였지만, 본문에서 선민의 부르짖음은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부르짖었지만, “모세를 원망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 죽겠다! 원망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불행히도 “선민에게 400년 애굽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특히 “애굽 군대를 만났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따르기보다,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모세와 하나님을 크게” 원망했습니다. 선민은 “10가지 재앙을 보며 하나님 은혜를 체험했지만, 상황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고스란히 불 신앙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선민은 불 신앙을 극복하지 못했기에, 출애굽 1세대는 모두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신앙생활은 “내 뜻과 생각보다, 성경에서 하나님 뜻과 계획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인생 여정”입니다.
문제는 “내 뜻과 생각은 이 땅과 내 경험에서 비롯되기에, 하늘로부터 비롯된 말씀과 같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지 잘 알지만, 내 뜻을 굽히지 않아서 하나님과 멀어지고, 더 깊은 불 신앙에” 빠집니다.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이 세상의 비판과 조롱을 받는 이유는 말씀보다 내 뜻을 더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내 뜻은 옳거나 틀릴 수 있지만, 말씀은 항상 옳기에,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죄인인 “인간이 자기 뜻대로 하려는 것은 불 신앙이지만, 하나님 뜻대로 따라가는 것만이 신실한 신앙임을” 기억합시다. 오늘날 “기독교는 점점 사람의 욕구에 맞게 변질되어, 쉬운 기독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저 “예수라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천국에 간다고 착각” 합니다. 이미 “천국 가는 표를 얻었기에, 진심으로 하나님을 따르며 헌신하고 희생할 필요 없고, 어떻게 살아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잘못 알고” 있습니다.
마침내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은 많지만, 진심으로 주님을 따르고 십자가 복음을 믿는 제자는 점점 줄어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은 고난을 말씀하는데, 우리는 신앙생활이 편하고 쉬워야 한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절대로 값싸고 가볍지 않기에, 나부터 내 뜻과 세속의 흐름을 이기며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신앙은 “내 뜻이 아닌 하나님 뜻대로 순종해야 열매가 있고, 이 땅의 그 어떤 아픔과 고난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딸을 살리려고, 자기 고집과 상식을 다 내려놓고, 주님 말씀을 받고 따르겠다고” 엎드렸습니다. 주님도 “야이로의 결단을 아셨기에, 중간에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계속 야이로와 동행”하셨습니다. 당시 “야이로는 ‘내가 쓸데없는 짓을 했어, 늦었어!’ 자기 생각보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주님의 말씀을 더 신뢰하고, 주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마침내 “주신 말씀대로 따랐을 때, 야이로의 죽은 딸이” 살아났습니다.
요 14:26절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말씀합니다. 지금도 “성령은 위기에 빠져 아파하고 우는 나에게 말씀을 가르쳐주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신앙은 살면서 내 뜻과 다른 아픔과 고난이 다가올 때, 말씀을 받고” 따라갑니다. 팀 켈러는 “현대인이 재미있고, 실용적이고, 자신에게 맞아서 기독교를 믿는다!” 책망합니다.
팀 켈러는 “우리가 기독교를 믿는 이유는, 기독교 복음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강조합니다. 실제로 “기독교가 진리가 아니면, 실용적일 수 없고, 누구에게도 맞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우리가 제대로 믿어서 불 신앙을 극복하려면, 싸구려 복음, 만들어진 복음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시는 복음을 받고 믿고, 그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올해 “사순절 노트를 제작한 목적은, 매일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받고 적으며 은혜받기 위함에” 있습니다. 말씀은 “보고 듣고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야 불 신앙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뜻을 버리고 말씀을 받으면 참 신앙으로 승리하지만, 내 뜻과 생각을 고집하면, 불 신앙으로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순절인데 “내 생각을 고집하는 불 신앙을 버리고, 말씀을 받고 따르는 참 신앙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
2. 주님을 따르려면, 눈앞만 보고 따라가는 불 신앙을 극복해야 합니다.
선민은 “홍해까지 담대하게 왔지만, 막상 애굽 군대를 보고 모든 것이” 흔들렸습니다. 당시 “애굽에서 400년을 보냈기에, 선민은 애굽 병거의 파괴력과 힘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선민은 애굽 병거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그동안 애굽에서 경험한 10가지 은혜를 다 잊어버리고, 모세와 하나님에게 격렬한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모세가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말해도, 선민은 눈앞에 보이는 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당시 “선민은 눈앞만 보는 불 신앙에 빠지니, 과거에 체험한 이적과 능력이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리석은 “영혼은 눈앞의 일을 전부로 알고 마음과 신앙까지 빼앗겨, 다른 것, 더 나은 것을 보지” 못합니다. 눈앞의 “일에 마음과 신앙마저 잃어서, 쉽게 불평하며 낙담하고, 쉽게 포기하기에 점점 신실한 신앙에서” 멀어집니다. 반면에 “지혜로운 영혼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더 깊은 하나님 뜻을 찾아서” 따라갑니다.
믿음은 “눈앞의 고난보다, 그 뒤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내 믿음의 자리를 지키며, 하나님만 따라가게” 합니다. 이처럼 “죄인인 인간이 눈앞만 보면, 누구나 불 신앙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지금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 들으면, 잠깐은 불안하고 불편하겠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나아가서 금방 지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눈앞만 보는 불 신앙을 이기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따라가는 신실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아람이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마다, 엘리사 때문에 번번이 실패하자, 엘리사를 죽이려고 도단 성을” 에워쌉니다. 이른 아침! “게하시가 도단을 둘러싼 아람의 대군을 보고 놀라서, 엘리사에게 이를” 알립니다. 그때 “엘리사가 왕하 6:16절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그들과 함께한 자보다 많다!” 말합니다. 그리고 “기도하여 게하시의 눈을 열어주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말과 불병거가 엘리사를 보호하고 있음을 직접 보게” 했습니다.
당시 “엘리사와 게하시, 둘 다 하나님을 믿었지만, 게하시는 눈앞만 보는 불 신앙이었고, 엘리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의 인생이 달랐고, 그들이 남긴 삶의 열매가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눈앞의 팬더믹과 고난, 아픔이 전부가 되어서, 하나님도 안 보이고, 말씀도 안 들리고, 그저 불안과 불평에 빠져” 살아갑니다. 그러나 “눈앞의 것은 온전하지 않기에 금방 지나갈 것이고, 상황도 바뀌어 갈 것”입니다.
우리가 “불 신앙을 극복하려면, 눈앞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바라봄은 시각적 개념이 아니라, 영적, 전인격적으로 하나님께 고정된 삶을” 뜻합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수록, 눈앞보다 더욱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나를 바라보며 지켜주시고, 부족한 나를 보호하며 한결같이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찬양 “주만 바라볼지라! 가사를 소개하려” 합니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세상은 “내 아픔을 하찮게 보지만, 하나님은 사랑과 인자로” 바라봅니다. 세상은 “내게 관심 없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의 눈으로 나를” 주목합니다. 세상은 “내 소리를 안 듣지만, 하나님은 나의 작은 신음에도 귀” 기울입니다.
죄인이 “모인 교회 공동체는 서로 사랑의 눈과 따뜻한 마음으로 동역해야 주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앞의 동역자를 보기 전, 그 뒤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랑과 존중의 눈으로 눈앞의 동역자를 바라본다면 불 신앙을 이기고, 참된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순절은 “우리 믿음과 시각이 눈앞과 과거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 주목하고 집중해야 하는 절기”입니다. 매번 “눈앞의 일에 마음을 빼앗겨 오락가락하는 내 신앙과 내 인생의 닻을 하나님께 내리며 고정하는 절기여야!” 합니다. 남은 “사순절 특새는 물론 고난주간 특별집회를 통해, 우리가 더더욱 십자가 복음, 하나님 은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눈앞의 일보다 더 크고 온전한 하나님만 믿고 따라가며 승리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