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보트 여행을 떠났는데, 처음에는 날씨가 좋았지만, 바다로 멀리 나가자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쳤습니다. 아들이 “배가 전복되지 않을지 두려워하자,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신 있게” 말합니다. “이 정도는 끄떡없단다. 배가 흔들릴 때, 선원들이 닻을 내리면, 닻이 배의 중심을 잡아주어서 풍랑에 절대로 뒤집히지 않는단다!” 우리 “인생도 생각지 않은 풍랑과 어려움이 다가오지만, 문제는 우리가 어디에 닻을 내리는가에” 있습니다.
죄인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믿음의 닻을 내리고 살아가면, 생각지 않게 다가오는 고난에 쉽게 넘어지지!” 않습니다. 중용은 “희로애락, 우리 인생에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이 끊임없이 교차하며 다가옴을” 교훈합니다. 문제는 “살면서, 우리가 생각지 않은 고난이 다가올 때, 어디에, 누구에게 닻을 내리는가로 그 인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우상숭배가 극심했던 국가를 하나님께 믿음의 닻을 내리게 한 성군”이었습니다.
그래도 “히스기야 치세 때, 앗수르의 침공과 영적 부흥이 함께 있어서, 희로애락의 반복이” 컸습니다. 특히 “본문에서 히스기야는 갑자기 찾아온 죽을병 때문에 매우 놀라고 당황하였을 것”입니다. 이에 “본문 1절은, 히스기야가 죽을병이 걸렸고, 당대 저명한 선지자 이사야도 집을 정리하라! 죽고 살지 못한다! 단정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갑자기 찾아온 고난이었지만, 믿음의 닻을 하나님께 내려서, 죽을병을 선고받은 바로 그 날, 하나님의 은혜로” 완쾌되었습니다. 최근 “우리는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 당황과 답답함, 안정을 잃고 불안감에 빠져” 살아갑니다. 처음 “겪는 일이라 그럴 수 있지만, 힘들수록 더 굳건해야 할 믿음의 닻이 점점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믿음의 닻이 흔들리면, 우리 인생은 정함이 없고, 바람에 밀려 요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믿음의 닻을 굳게 내리면, 생각지 않게 어떤 환난이 다가와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모든 아픔과 고난, 눈물과 한숨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따를 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갑자기 찾아오는 고난에 당황하지 말고, 믿음의 닻을 주님께 더 신실하게 내려야!” 합니다. 히스기야를 통해 “살면서 생각지 않은 어려움이 찾아올 때, 이를 어떻게 극복할지!” 살펴봅시다.
1. 생각지 않은 어려움을 당할 때, 기도하며 하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죽음을 선고받고, 낮을 벽으로 향한 채, 선한 것이 있다면 기억해 달라! 심히 통곡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왕이었던 “히스기야는 유명 의사를 부를 수 있었고, 좋은 약을 찾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갑자기 다가온 죽음 선고를 듣고, 즉시 하나님께 간절히 살려달라!” 매달렸습니다. 본문 2~3절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전심으로, 통곡했다! 세 단어는 히스기야의 간절한 기도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묵상할수록 “당시 히스기야의 기도는 어정쩡하지 않았고, 생명 걸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기도의 능력을 점점 잃어가면서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모두가 “기도라는 말에 참으로 익숙하지만, 실제로 기도하지 않기에, 기도의 능력을 전혀 모르고 살아가는 영혼이 참으로” 많습니다. 영적 호흡인 “기도가 시간이 갈수록 더 짧아지고, 어쩌면, 나도 모르게, 지금 내 영적 호흡이 멈춰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과거 한국교회는 기도에 생명을 걸고, 세계 어디에도 없는 새벽기도, 심야기도, 통성 기도 전통을 만들어 기도에 힘과 정성을” 다했습니다. 삶의 “안팎이 힘들고 어려울 때 간절히 기도했고, 기쁘고 즐거워도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기도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기에, 항상 그리고 반드시 기도하라!” 명령합니다. 기도는 “나와 하나님과 관계를 더 깊게 만들고, 답답함과 영적 위축됨을 능히 이겨내도록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환난 중에 내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닻이고, 힘든 중에 나를 지탱해 주는 지팡이며, 주님만 바라보게 하는 나침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인간은 기도해야 주님을 따를 수 있고,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막 1:35절은,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셨다.” 말씀합니다. 기도하다! “프로슈코마이는 미완료형으로 주님의 기도가 계속 이어졌음을” 강조합니다.
주님께서 “이처럼 매일 새벽마다 기도하며 하나님을 따랐다면, 연약한 우리는 더 기도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주님은 그렇게 기도하셨지만, 제자들이 기도했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처럼 “주님과 사도들이 내린 기도의 닻이 달랐기에, 삶의 위기를 극복하는 태도도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기도를 너무 어려워하지만, 비록 투박하고 어눌해도, 기도는 내가 필요한 도움을 하나님께 편안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살면서 “너무 아프고 힘들 때,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너무 힘들어요.’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 아뢰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가 자녀의 아픔을 자기 일처럼 아파하는데, 하물며 갑자기 당하는 환난으로 아파하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왜” 외면하겠어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힘들고 어려울 때, 히스기야처럼 간절히 기도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주의 백성이 아파하고, 눈물 흘릴 때, 절대로 외면하지 않고, 반드시 응답하며” 돕습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울수록, 울지 말고, 아파하지 말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따라가기” 원합니다. 갑자기 “당하는 고난과 두려움이 기도를 통과하면, 하나님 주시는 용기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 100만 명에게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 누군지!” 물었습니다. 1위는 “위대한 수상 윈스턴 처칠이었는데, 처칠은 어려서 성적과 품행이 좋지 않아서, 모두가 포기했던 문제아였지만, 자라면서 많이” 달라졌습니다.
영국인이 “윈스턴 처칠을 가장 존경한 이유는,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처칠은 “하루하루 급변하는 전쟁 중에도, 국가의 흥망성쇠가 경각에 달렸어도, 한결같이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처칠은 “의회와 일상생활에서도, 늘 기도하며 하나님을 따랐던 영적 거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하는 사람에게 엄청난 능력을 주시고, 희망 없는 문제아를 희망을 주는 위대한 지도자로” 세워주셨습니다.
답답하고 “사방이 막혔다면, 사람 찾지 말고 하나님께 내 아픔과 서러움을 다 말씀드려야!” 합니다. 기도가 “내 부족한 과거를 은혜로 덮어주고, 지금 당하는 고난을 이겨내게 하고, 보이지 않는 미래를 열어주는 은혜로 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갑자기 당하는 어려움과 환난이 클수록 더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살려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며 주님을 따라가서, 생각지 않은 어려움과 환난을 능히 이겨내기” 원합니다.
2. 생각지 않은 어려움을 당할 때, 포기하지 말고 확신으로 하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본문 1절에서 “이사야는,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말합니다. 여기서 “정리하라, 죽고 살지 못하리라, 유사한 의미의 단어를 반복하여, 히스기야의 임박한 죽음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시 “히스기야 치세 29년 중에서 14년이 지났고, 아직 차기 왕인 므낫세가 태어나지도 않은 상황이었고, 게다가 나이도 40세 전후”였습니다. 생각할수록 “너무도 황당하고 억울하게 찾아온 죽음의 질병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두렵고 힘들었지만, 간절한 기도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막다른 골목에 서면 포기하고 좌절할 수 있지만, 포기는 거기서 끝남을” 뜻합니다. 반면에 “생각지 않은 환난과 고난에도 포기하지 않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 신실하고 응답받는 믿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갑자기 다가온 생사의 도전에도 포기하지 않고 눈물로 도움을 청한 히스기야의 믿음에, 바로 그날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포기가 너무 쉽고, 포기가 너무 빠르고, 매사에 너무 자주 포기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내가 흘리는 눈물과 아픔에 분명히 도우셔도 내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이유는 “쉽게 포기했기에, 하나님께서 은혜와 말씀을 주며 내 마음 문을 두드려도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포기는 “동적인 삶이 정적인 삶으로 바뀌고, 전진이 멈추는 것으로 바뀌는 시작”입니다. 포기는 “남이 아닌 내가 내 복을 막고 거부하고 외면하는 불 신앙”입니다. 삭개오는 “누가만 언급하는데, 과연 삭개오가 주님을 만난 후 그 고백과 믿음을” 지켰을까요? 우리는 “누가복음이 삭개오가 주님을 만났을 때가 아니라 훗날 쓰였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만일 “삭개오가 고백한 믿음을 버리고 중도 포기했다면, 누가가 이를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세리장이었던 삭개오가 나는 죄인이야! 자포자기해서 주님에 관해 무관심했다면” 어땠을까요? 주님을 “만나려 할 때, 사람이 많아서 포기했다면,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서 주님을 만날 계획을 포기했다면” 어땠을까요? 이처럼 “삭개오는 수많은 포기의 기회를 이겨냈기에, 그 인생이 바꾸어 갈 수” 있었습니다. 특히 “포기의 성격이 중요한데, 죄와 악은 빨리 포기하는 것이 지혜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생각지 않은 환난에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영혼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렵고 힘들수록, 답답하고 위축될수록, 더더욱 믿음의 길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포기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다 막아버리지만, 포기를 극복하고 믿음의 닻을 하나님께 내리면, 하나님께서 날마다 위로부터 넉넉한 은혜를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지금도 “로마의 카타콤에는 수백만에 달하는 유골이 있는데, 이는 모두 순교자들이라고” 합니다.
고대교회 당시 “두 개의 도시가 있었는데, 하나는 겉으로 화려했지만, 영적으로 피폐한 제국의 수도 로마였고, 다른 하나는 땅속 깊이 어둡고 음침했지만, 믿음과 사랑이 넘치는 카타콤이” 있었습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카타콤의 길이는 무려 560Km로, 수많은 사람이 환난과 박해에도 포기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음을 잘 보여” 줍니다. 이들은 “엄청난 환난에도 포기보다, 어둡고 음침한 카타콤에 들어가서 믿음의 닻을 하나님께 내리고” 살았습니다.
이들은 “세상 무엇보다 하나님이 최우선이었기에, 그 어떤 핍박과 박해에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순절 “특새 중인데, 어떤 분이 ‘지금까지 못했기에 내년부터 하겠다!’ 말씀해서, 제가” 반대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참석했다면 좋았겠지만, 지금부터라도 참석하여, 과거의 포기를 극복해야 새로운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이 과거의 상처로 믿음을 포기하는데, 이는 가장 안타까운 일이고, 모든 책임을 스스로 감당해야!” 합니다.
악한 “마귀는 끊임없이 내게 포기를 강요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야 함을” 말씀합니다. 문제는 “포기할 것인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라갈 것인가? 이 선택은 철저하게 내 몫”입니다. 스콧 피츠제랄드는 “한 차례 실패를 최후의 실패로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말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팬더믹으로 인한 일시적 고난, 삶에서 겪는 일시적 실패를 전부로 알고 포기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사순절인데 “포기보다 믿음의 닻을 주님께 내리고 따라가며, 삶의 고난을 넉넉히 이겨내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