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 삶을 망가뜨리는 네 가지 병폐가 있는데, 무목적 무감동 무책임 무관심이 그것들”입니다. 혹자는 “무관심이 현대 사회를 황폐하게 만드는 최고의 악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닌 무관심이고, 아름다움의 반대말도 추함이 아닌 무관심”입니다. 특히 “C.S. 루이스는 현대인이 가진 무관심을 이렇게” 책망합니다. “현대인은 존재에 관해 깊이 질문하기보다 무관심하고, 오직 어떻게 성공해야 할지만 고민하고 있다.”
실제로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성공할지, 부자로 편하고 떵떵거리며 살아갈지에 관심이 더” 큽니다. 불행히도 “기독교인조차 영적인 무관심에 깊이 빠져서, 하나님 주신 시간과 능력, 고귀한 인생을 바르게 쓰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이 빠르게 변해갈수록, 더더욱 영적인 본질, 인생의 본질인 하나님과 복음에 언제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이 땅과 내세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은 “당시 히브리서 수신자가 영적인 본질을 붙잡으려 하지 않고, 헛되게 살아간다.” 책망합니다. 특히 “본문 3절은,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말씀합니다. 여기서 “등한이 여기다. 아멜라산테스는 ‘소홀히 하다. 무관심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다른 무엇보다 영적 무관심 속에서 일관되게 살아가는 모습을 책망하는 단어”입니다.
당시 “많은 성도가 죄와 사망을 이기게 하는 십자가 복음에 무관심했고, 불순종과 범죄에 빠져” 살았습니다. 문제는 “본문이 기록될 때는 물론 오늘도, 여전히 복음과 은혜가 풍성하게 공급되지만, 이에 너무도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전히 “팬더믹이 힘든데, 지금 우리 삶은 어디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세상을 향한 관심은 날로 깊어지고, 반면에 하나님 주시는 은혜와 복음에 관한 무관심이 점점 커진다면, 회복과 치유는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보다 나부터 먼저 복음에 관한 무관심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시 하나님 주신 첫사랑과 은혜를 찾아야, 마귀가 주도하는 영적 무관심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악한 세상에서 영적 무관심을 이기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1. 우리가 영적 무관심에 빠지지 않으려면 말씀을 떠내려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절은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말씀합니다. 당시 “히브리서 수신자는 이미 들은 복음에 유념해서, 복음을 흘려 떠내려가지 않게 살아가야!” 했습니다. 여기서 “흘려 떠내려간다. 파라뤼오멘은 ‘미끄러져 달아난다. 떠내려가 버린다.’란 뜻”입니다. 특히 “파라뤼오멘은 음식을 흘릴 때, 반지가 손가락에서 빠질 때, 핵심에서 벗어날 때, 주로 제자리를 벗어날 때 많이 쓰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복음을 떠내려 보냈기에 영적 무관심이 깊어지고, 영적 무관심이 깊을수록 복음과 진리를 더 많이 떠내려 보내는 악순환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현대는 “말씀의 홍수 시대이기에, 과거보다 말씀을 더 깊고 쉽게 알아갈 수” 있습니다. 영적 “관심만 있으면, 다양한 신학과 설교, 성경공부와 찬양, 간증을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영적 “관심만 있으면, 과거 그 어떤 시대보다 영적으로 더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떠내려 보내고 있고, 심지어 무엇을 떠내려 보내는 것인지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눅 12:48절은 “많이 받고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달라고 할 것이다.” 말씀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많은 것을 받았기에, 이를 떠내려 보낸다면 그 책망은 점점 커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주시는 은혜와 사랑, 기회와 능력을 떠내려 보내지 않고, 얼마나 단단히 붙잡고” 살아가세요?
세계적인 “투자 전문가 워런 버핏은 2000년부터 매년 자신과 점심 먹는 것을 경매로 팔고” 있습니다. 낙찰자는 “맨해튼 식당에서 버핏과 대화하며, 투자에 관한 생생한 조언을 들을 수” 있습니다. 버핏과 “점심은 첫해에 25,000불이었는데, 2019년에는 400만 불까지 치솟았고, 지금까지 경매 총액이 무려 3,420만 불에” 달합니다.
버핏은 “이 모든 수익금을 샌프란시스코의 빈민 단체, 글라이드 재단에 기부하고” 있습니다. 상상해 보면 “버핏과 점심을 먹는 낙찰자가 버핏의 말을 어떤 태도로” 들을까요? 실제로 “한 마디도 떠내려 보내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집중하고 적어가면서” 들을까요? 이처럼 “인간은 이 땅의 번영을 위해 사람의 말에도 그렇게 집중하면서, 우리 기독교인조차 창조주 하나님 말씀, 영생과 천국을 주시는 복음을 떠내려 보낸다면, 얼마나” 어리석을까요?
복음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하나님 선물이기에, 이를 절대로 떠내려 보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해진 예배 시간도 집중보다는 졸고 딴짓하며 흘려보낼 때가” 많습니다. 경험상 “예배 때 졸고 딴짓한 분이 ‘은혜 많이 받았다!’ 인사할 때가 더욱” 많았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떠내려 보내지 않으려면, 복음을 들을 때 유념해야!” 합니다. 본문 1절에서 “유념하다 원어는 ‘주의를 쏟다, 주목하다.’ 말씀을 듣는 바른 태도를” 강조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복음에 유념하여 주목하는데, 어떻게 생명의 복음을 떠내려 보낼 수” 있겠어요? 그러나 “오늘 우리는 복음에 유념하기보다 떠내려 보내는 것이 더 많아서, 영적 무관심이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 무관심을 이기려면, 주시는 말씀, 들리는 메시지에 귀 기울여 주목하고, 항상 아멘으로 받아야!” 합니다. 소돔이 “멸망할 때, 롯은 사위 두 명에게 하나님의 경고를 알렸지만, 창 19:14절은 그 반응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바울이 “벨릭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행전 24:25절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도, 어쩌면 롯의 두 사위와 벨릭스처럼, 하나님의 경고에 너무도 무관심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주님의 재림과 심판이 점점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 설 때는 물론 항상 말씀에 주목하여서, 주시는 은혜를 절대로 떠내려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은혜를 떠내려 보냄은 생사를 결정짓는 중요한 원인이 되기에, 이전보다 더 굳게 말씀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한주도 “하나님 주시는 메시지를 항상 유념하여 듣고 붙잡아서, 영적 무관심을 이겨 내는 승리가 있기” 원합니다.
2. 우리가 영적 무관심을 극복하려면 반드시 상급이 있음을 기억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2절은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말씀합니다. 여기서 “보응, 원어는 ‘정당한 보수, 보상, 상급’이란 의미”입니다. 특히 “이 단어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이끄는 강력한 동기부여를” 뜻합니다. 이는 “하나님 주신 큰 구원을 가볍게 여기면, 상급은 고사하고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경고합니다. 반면에 “하나님 주시는 큰 구원을 유념하여 붙잡으면, 이에 상응하는 엄청난 상급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상급은 “내 삶에 자신감과 당당함을 주기에, 인간은 누구나 상급을” 좋아합니다. 저는 “작년 가을 야유회에서,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가 보물찾기에 그렇게 열심을 가지는 것을 보고, 역시 인간이 상급을 좋아함을” 절감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상급을 좋아하는데, 문제는 하늘의 상급보다 세속적 상급을 더 좋아함에” 있습니다. 실제로 “현대인은 세상에서 상급을 받고, 인정받기 위해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노력하고 절제하며” 살아갑니다.
더욱 “나아지려고 자격증도 필요하고, 꾸미고 가꾸고, 심지어 성형수술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하늘의 상급을 받기 위한 노력에는 인색함을 넘어 너무도 무관심”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 주시는 상급을 더더욱 사모해야!” 합니다. 칭기즈칸이 “세계를 정복할 때,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를 타르 탄으로” 불렀습니다. 칭기즈칸은 “황제가 된 후, 타르 탄에게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상급을 주었다고” 합니다.
“① 언제든지 허락 없이 황제 칭기즈칸의 집에 들어올 수 있다. ② 전쟁이 끝나면 노획물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먼저 가질 수 있다. ③ 평생 세금이 면제된다. ④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어도 9번까지 용서받을 수 있다. ⑤ 몽골 제국 안에서 가지고 싶은 땅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⑥ 이러한 특별한 권리를 앞으로 4대까지 이어갈 수 있다.” 여기서 “타르 탄이 받은 상급의 공통점은, 사람이 이 땅의 삶이 다하면 모두 내려놓아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주시는 상급은 이 땅과 내세까지 영원히” 이어집니다. 하나님 “주시는 상급은, 십자가 복음을 믿으면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훗날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왕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는 상급의 가치와 능력을 잘 모르기에, 영적 무관심과 죄에 빠져 허덕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은, 우리가 하나님 주실 상급을 확신하고, 이를 받으려는 소망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영적 무관심을 이겨 내고, 하늘의 상급을 받으려면, 하나님 주시는 복음에 항상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2절은 “순종하지 않은 자들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다.” 말씀합니다. 본문은 “인간이 불순종하면 이에 상응하는 보응이 있지만, 반대로 말씀을 깊이 유념하여 순종하면 그 상급이 더욱 커진다.” 도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대로 순종할 때, 실제 삶에서 받고 누리는 하늘의 상급이 더욱 가치 있고 커질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며, 항상 순종을 강조하고, 심지어 우리가 순종할 때까지 계속 반복하여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며 순종하였을 때, 창 22:18절은 그 결과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자손과 땅의 복, 복의 근원이 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을 유념하여 순종했을 때,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더 큰 복까지” 허락하셨습니다. 순종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유념하는 만큼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우리가 일부러 순종을 거부할 때도” 많습니다.
특히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말씀에 유념하여 순종해야 함을 알지만, 현실은 힘들고 어렵다고, 내 뜻과 다르다고, 이런저런 이유로 불순종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울수록, 성령께서 내게 주시는 말씀을 먼저 유념하여 순종한다면, 우리가 받는 상급이 달라질 것”입니다. 순종은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필수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주도 “주신 말씀을 깊이 유념하여 순종해서, 더 큰 상급을 얻어가는 승리가 있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