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에 “어떤 환자가 실려 왔는데, 팔다리 골절과 동맥 파열로 온몸에 피가 흥건”했습니다. 의사가 “환자의 심각성을 보고, 먼저 압박붕대로 지혈하고, 골절된 팔다리를 위해 정형외과 의사를 급히 불렀지만, 불행히도, 정형외과 의사의 도착 전, 환자는 질식사로 사망”했습니다. 이유는 “응급실에서 환자의 기도가 열려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 기본인데, 의사가 급하다고, 환자의 기도가 막힌 것을 모르고 다른 치료에만 전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 중요한 일과 사소한 일을 자주” 만납니다. 삶에서 “우선순위 설정은 현재와 내 미래를 바꾸는 중요한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실패는 능력과 시간, 여건의 문제보다 우선순위를 놓침에서 비롯되지만, 바르게 우선순위 설정하면 능력과 시간, 기회와 여건과 무관하게 내 삶을 선하게 바꾸어갈 수” 있습니다. 계속되는 “팬더믹은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많이 망가뜨려” 놓았습니다.

지금 “우리 삶이 다시 정상화되려면, 무엇보다 바른 우선순위 설정이 급선무”입니다. 본문은 “산상수훈 중, 삶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말씀합니다. 당시 “주님 말씀을 듣던 선민도 먹고사는 문제, 염려와 고난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먹고사는 문제, 환난과 어려움이 항상”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인간의 제한적 삶을 향하여,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우선순위의 전환을” 도전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먼저! 프로톤은 상대적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무엇보다 먼저’를 강조”합니다. 이유는 “무엇보다 가장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할 때, 이 땅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매사가 형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중 “2022년도 교회 표어를 마 6:33절 말씀으로” 정했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하나님 “말씀에 합한 우선순위 설정은 삶의 질서는 물론 앞으로 살아가는 우리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특히 “팬더믹을 이겨내려면, 무엇보다 삶의 우선순위 설정이 가장 시급”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 설정이 내 생각과 경험, 세상의 상식보다, 하나님 말씀에 기초해야!” 합니다. 우리가 “2022년도, 어렵고 힘든 상황을 이겨내려면,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어떻게 실천하며 살아갈지!” 살펴봅시다.

1.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은 하나님을 최우선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33절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나라, 바실레이아는 절대 군주가 다스리는 왕국으로, 이는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천국을” 뜻합니다. 의! “디카이오쉬엔도 인간적 기준이 아닌 순전히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의로움을” 뜻합니다. 주님은 “의식주로 고생하던 선민에게, 하나님께서 주인이신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함을” 도전하셨습니다.

사람이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모든 것이 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죄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최우선의 삶에서 이탈하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마귀는 하나님 최우선을 막으려고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오늘의 “비극도 삶의 첫 단추, 하나님 최우선의 삶을 잃어버림에서 시작됨을” 기억합시다.

지금 “팬더믹의 아픔이 깊지만, 우리가 다시 삶의 첫 단추, 하나님 최우선의 삶을 회복한다면, 우리 삶과 미래는 달라질 것”입니다. 힘들어도 “하나님 최우선, 우선순위가 바르게 정립되면, 우리 삶은 새롭게 질서가 잡혀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공생애 마지막 밤까지, 서로 크다고 다투며 합력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주님이 먼저가 아니고, 항상 자기 자존심과 이기심, 내가 먼저라는 생각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12 사도는 각자 자기 생각과 주장이 먼저였기에, 그들은 주님이 어렵고 힘들 때, 모두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심지어 “주께서 십자가 고통을 당하실 때도, 제자들은 여전히 자기중심적 삶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체험 후,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은 한 번도 다투거나 대립하지 않고 항상 합력하며 동역”했습니다. 이유는 “매사에, 각자에게 하나님 최우선의 삶이 정립되었기에, 서로 다투고 대립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도 모두가 하나님 최우선의 삶이 정립되었기에, 사도의 인생이 새로워지고, 교회도 이전과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최우선을 알고 있지만, 실제 삶은 바쁘고 분주하여서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최우선의 신앙이 흐려지고, 자기 생각대로 우선순위를 정해서, 우리 일상이 질서를 잃고 뒤죽박죽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혹자는 “인류 최대 난제는 중국집에서 짬뽕과 짜장면 무엇을 먹을까에 있다.” 말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사람이 이것저것 선택하지 못함을 악용하여 짬짜면을 만드는 상술이” 나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최우선이 흐려지고, 삶의 중심이 흔들리기에,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도 모두 흔들리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흔들리면 정함이 없고, 정함이 없으면 미래는 계속 흔들리고 요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명한 “속담이” 있습니다. “시계가 하나인 사람은 시간을 정확히 알지만, 시계가 두 개인 사람은 결코 확실한 시간을 알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는 끊임없이 주의력이 분산되는 세상을 살아가기에, 목표를 설정해도 목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더욱” 많습니다. 마침내 “목표를 세우지 않고, 집중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리더가 본분을 잃어버리고 넘어짐은 우선순위 설정에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갈등하고 아파하는 이유도 서로 우선순위 설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토저 목사의 강한 도전에 주목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삶의 최우선으로 생각하라!” 이유는 “하나님 최우선의 삶이 기독교인에게 가장 큰 은혜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개의 시계가 필요 없고 오직 하나님의 시계 하나만 주목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최우선의 삶은 결코 추상적이고 이론적이지 않고,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2022년도 “무엇보다, 우리 삶에 예배가 최우선이 되고, 하나님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 현실이 너무도 힘들고 어렵기에, 더더욱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삶이 최우선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봉사와 헌신이 삶에서 최우선 순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삶의 중심과 기준이 하나님 최우선으로 설정되면, 우리가 팬더믹은 물론 삶의 문제를 넉넉히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22년 새해, 하나님 최우선의 삶을 살면서, 모든 것을 더하시는 은혜로 항상 승리하기” 원합니다.

2.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은 하나님 교회를 최우선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33절에서 “그 나라, 바실레이아는 절대 군주가 통치하는 국가를 뜻하기에, 이 땅에서 진정한 바실레이아를 찾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도 “굳이 가장 유사한 바실레이아를 찾는다면, 아마도 하나님의 교회일 것”입니다. 바울은 “엡 1:22~23절에서,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신다!” 말합니다. 성경은 “예수가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가 예수의 몸이다! 강조하며”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회답게 제구실하면, 교회는 충분히 바실레이아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구하며 헌신하면,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다 풍성하게 채우겠다!”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기도,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못 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이유는 “작은 교회인 우리 각자가 예수를 머리로 삼지 않고, 예수의 몸으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기보다, 자기도 모르게, 세속적 이익집단으로 변질되어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교회를 구성하는 우리부터 교회가 최우선이 아니기에, 교회의 위상과 역할이 점점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항상 교회를 최우선에 두고 살아가면, 교회 구성원이 어떻게 분쟁하고 다툴 수” 있겠어요? 말은 “교회 최우선이지만, 사실은 내 고집과 이익 내 편안함이 먼저이기에 서로 다투는 것이” 아닐까요?

고후 11:28절은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회심 전 “바울은 기독교인을 향한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였기에, 교회는 없애야 하고, 없어져야 할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회심 후, 바울은 온갖 핍박과 박해에도, 그 마음에는 항상 하나님의 교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욕을 당해서 죽어가면서, 배고프고 목마른 중에도 교회가 최우선”이었습니다.

이유는 “바울이 하나님 최우선으로 살아갔기에, 하나님 교회도 삶의 최우선에 자리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위상이 떨어짐은, 우리 삶에서조차 교회가 최우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에게 교회는 삶의 전부요 중심이어서, 매사가 교회 위주”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교회는 내 삶의 작은 부분이 되었고, 심지어 우리에게 교회는 더는 삶의 중심이 아니고, 그저 없으면 조금 불편한 기관 정도로 그 가치가 하락”하였습니다.

특히 “팬더믹을 통과 중 온라인 교회가 생겨나며, 교회관이 많이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이 교회는 다니지만, 소속감과 주인의식 없이, 말 그대로 항상 교회의 손님에 머물러 신앙생활을” 합니다. 당연히 “교회를 통해 주어지는 은혜와 능력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고, 마침내 삶도 점점 세상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습니다.

신학자 “이반 일리치가, 현대는 선생은 많아도 스승은 없고, 학생은 많아도 제자가 없다. 목사는 많아도 목자가 없고, 교인은 많아도 성도가 없다.”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비극은 교회는 많은데, 내 교회가 없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과거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여 나라를 잃었듯, 내 나라가 없는 국민은 가장 불쌍한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이 “국권이 없는 중, 홀로코스트로 600만의 무고한 생명을” 잃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목회자가 미국 교회를 빌려 예배드리며 집 없는 설움을 토로하는데, 이처럼 예배드릴 처소가 없음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백성인 나도 반드시 내가 예배드리고 기도할 수 있는 교회, 내 교회가 있어야, 힘들어도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소망 교회가 정말 내 교회가 맞는지! 자문해” 보세요!

교회를 “사랑하면 다른 교회와 비교하지 않고 섬기는 교회에 대하여 희망과 비전을 품고 칭찬하며” 살아갑니다. 교회를 “사랑하면, 나부터 물질적 영적 심적 헌신으로 후세를 길러내고, 소유의식보다 주인의식으로 섬기는 열정이” 있습니다. 2022년 “한 소망 교회 미래는, 내가 교회를 얼마나 삶의 우선순위에 두는가로 결정될 것”입니다. 올해도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한결같이 교회 사랑을 먼저 삶으로 실천하며 승리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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