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펠러는 “55세 때! 불치병으로 1년을 못 넘긴다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큰 상처로 “병원을 나오는데 행전 20:35 절이 눈에 들어왔고! 록펠러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 이어서 “로비에서, 돈이 없으면 치료받을 수 없다는 병원 직원에게 딸을 살려 달라는 엄마의 절박한 호소가 귀에” 들렸습니다. 이에 “록펠러는 조용히 아이의 병원비를 내고! 훗날 자서전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적이 없었다.” 그 후 “록펠러는 98세까지 장수하며! 많은 자선사업을 감당”했습니다. 당시 “하나님은 아픈 아이와 그 엄마의 한 맺힌 울음을 통해! 영적으로 메마르고 죽어가던 록펠러에게 다가오셨던 것”입니다. 과거 “록펠러에게 먼저 다가오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정적! 이론적 존재가 아니라, 항상 내게 먼저 다가오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내 삶의 변화와 치유! 회복은 이처럼 어떤 사건을 통해 먼저 다가오는 하나님 은혜로” 시작됩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지만!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서, 먼저 다가오시는 하나님 은혜를 모르고 살아갈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다가오심을 모르면, 깨닫지 못하면, 이에 반응하지 않으면! 누구도 영적으로 승리하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여전히 사울의 추격과 박해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다윗에게 먼저 다가오셨고, 이를 통해 회복과 치유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할수록! “다윗에게 먼저 다가오신 하나님 사랑과 은혜가 오늘 내게도 너무 절실히 필요”합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먼저 다가오심의 은혜가 무엇인지! 이를 누리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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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다윗은 도엑과 사울이 놉에서 아히멜렉과 많은 제사장을 살육하여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는 중 “본문 1절에서, 다윗은 블레셋이 그일라를 약탈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에 “다윗은 그일라를 구할지 하나님께 물었고, 하나님은 본문 2절에서 이렇게” 답하십니다.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그러나 “본문 3절에서, 다윗 주변의 모두가 그일라를 구원함이 너무 위험하다!” 반대했습니다.

그런데도 “본문 4절에서, 하나님은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또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다윗은 그일라 출정에 관해 반복하여 물었고, 하나님도 반복하여” 답하셨습니다. 유대인은 “중요할 일의 경우! 같은 내용을 반복하여 말하며 그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중요한 일! 꼭 필요한 내용일 경우!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말씀하며”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처럼 반복되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집중해야 하고, 절대로 반복되는 메시지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셔서!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은혜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하나님께서 “반복하여 말씀하며 먼저 다가오심의 은혜는! 말씀한 내용을 끝까지 책임지시겠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두 번이나 반복하여 물었던 이유는 그만큼 다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다윗은 쫓기는 처지에서! 그일라를 구원한다는 것이 아득해 보였고, 사울의 추격이 너무도 두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본문 5절에서! 다윗은 마침내 그렇게 힘들어 보였던 그일라를 구원”했습니다. 원인은 “다윗과 그 무리의 탁월함이 아니라, 그일라 구원을 반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전쟁의 모든 과정을 책임지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약속대로! 책임지시고, 블레셋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은 능력이 있고! 말씀하신 그대로 책임져 주시고! 항상 승리로 이끌어!”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75세에 정들었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함은! 아브라함 개인의 결정이 아니라, 먼저 다가오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 축복을 반복하여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반복하며 말씀하신 약속을 책임지셨고! 가장 선하게 이끌어 가셨고! 마침내, 아브라함이 믿음의 선조가 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우리 “삶에서! 하루를 정리하고 무사히 침상에 누울 수 있음이 은혜임을” 아십니까? 하루에도 “수많은 사건 사고가 내 주변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내가 잘 몰라도! 하나님의 책임지심이 수많은 사건 사고로부터 나를 막아주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 가든 그로브와 산타 아나에서 무차별 칼부림으로 4명이 사망”했습니다. 미국 “곳곳에서 하루하루 총기 사고로 많은 영혼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7월 20일 오전 2시! Garden State인 뉴저지에서 일어난 폭행 사건이 신문에 대서특필 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내가 잘 몰라서 그렇지, 주님은 지금도 일하시며! 나를 철저하게 지키고 보호하시며! 책임져” 주십니다. 지난 “1984년 인도 보팔에서 유독 가스 40톤이 누출되어 3,500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가스가 누출되어 접하는 곳마다 모두 죽음의 땅으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사건 당일! 놀랍게도! 유독 어떤 마을 앞에서 공포의 가스가 갑자기 진로를 바꾸어서, 그 마을만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보팔에서 사역하던 데일 키츠만 선교사는! 그 마을에 2만의 기독교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세계에 하나님의 일하심! 책임져 주심을” 전했습니다. 인도는 “힌두교 국가이고, 기독교 복음 전파가 쉽지 않은 데! 하나님께서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방법을 통해 2만의 기독교인을 극적으로 살리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내가 꼭 기억해야 할 말씀! 삶의 방향, 교훈과 사랑! 은혜와 책망을 반복하여” 말씀합니다. 그리고 “반복하여 말씀하신 그대로! 바로 여기서 나와 우리 자녀! 직장과 교회를 책임져”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책임짐은 장소와 시간, 상황을 불문하고 언제나 가장 온전”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책임짐은 내 믿음에 비례하여 더 강하게 느끼고 고백할 수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생각할수록!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먼 곳이 아닌 가까이 계시고, 항상 내게 먼저 사랑과 은혜로 먼저 다가와!” 주십니다.

그리고 “비록 지금 힘들고 어려움이 있고! 삶의 돌부리가 적지 않지만! 이보다 먼저 다가오시는 하나님! 더 강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책임지심이 항상 내 삶에 있기에, 절대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한 주간도 “하나님의 책임짐을 확신하며 반복적으로 주시는 은혜! 먼저 다가오시는 은혜를 붙들고 승리하기” 원합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다가오심이 은혜입니다.

본문 7절에서 “다윗이 그일라로 왔을 때, 사울은 다윗을 죽일 수 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다윗을 가두셨다! 말할 정도로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8절에서, 사울은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 모아서 그일라로 내려갔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했습니다. 당시 “사울은 군사의 수적 우월감으로 다윗을 반드시 죽이겠다며 살기등등했던 반면에! 다윗의 경우는 사면초가와 같이 큰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이에 “다윗은 사울이 공격할지! 회복된 그일라 주민이 사울의 압력으로 자신을 배신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공격할 거야! 그일라 주민이 너를 배반할 거야!” 답하셨습니다. 실제로 “본문 14절에서! 하나님은 사울이 매일 다윗을 찾았지만,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기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다윗은 블레셋 전쟁을 치러야 했고, 사울을 피해야 했고, 그일라의 배반도 이겨야!” 했습니다. 그러는 중 “하나님께서 먼저 다가오셔서! 곤고한 다윗을 지키고 보호해 주셨던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이민자의 삶이! 마치 다윗처럼 쉽지 않고,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뿌리가 “옮겨져서 새로운 땅에 정착하는 중! 문화적, 언어적 차이로 인한 차별과 아픔이 적지” 않았습니다. 고달프고 “힘들어도! 쉴 수조차 없고, 자녀들이 잘 되길 바라며! 그저 열심히” 살아갑니다. 어떤 분은 “이제 먹고살 만한데! 건강을 잃어서 힘들고, 자신감을 잃고, 상처로 허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이민자의 삶이 버겁고 힘들어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이 더 큼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항상 먼저 다가오셔서! 지키시고 보호하시기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가 “항상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께 항상 묻고 또 물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어려움 중에 있던 다윗이 총 네 번에 걸쳐 하나님께 간절함으로” 물었습니다.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을 칠까요? 그일라를 구원할까요? 사울이 그일라로 내려올까요?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배신할까요?”

하나님은 “그럴 때마다 다윗에게 응답하시고, 가장 바르고 안전한 길을 열어주시며” 지켜주셨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모든 신앙인이 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지켜주심을 체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는 온전히 하나님만 신뢰하고, 하나님께 묻는 영혼만이 받을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 어떤 시간에도! 어떤 일에도! 세상과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묻고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역사를 보면 “문화와 문명은 항상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 역사에서 21개의 문명이 일어났었는데! 그중 19개의 문명이 사라졌고! 소멸한 19개 문명의 가장 큰 원인은 무신론과 물질주의에 있었다!” 말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이 없다는 무신론! 절대적 진리보다 눈에 보이는 물질을 강조함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의 문제도 물질주의와 무신론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더더욱 삶의 모든 순간! 모든 정황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묻고 살아가야!” 합니다. “정말 이것이 맞나요? 바른길입니까? 틀렸다면 어떻게 할까요?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는 영생과 십자가! 생명과 복음에 관한 물음보다! 세속적이고 이 땅의 것을 더 많이 물으며” 살아갑니다. 결국 “꼭 물어야 할 질문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정말 얻어야 할 은혜를 놓치며” 살아갑니다. 주님의 “공생애 때! 많은 바리새인과 공 회원이 예수님을 죽이려 할 때! 니고데모가 심야에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당시 “니고데모는 여느 바리새인과 달랐는데! 이는 주님께 진리와 복음에 관해 묻고 듣기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거듭남의 영적 비밀을” 듣습니다. 결국 “주님께 와서 진지하게 물었던 니고데모는 생명을 얻었지만! 묻지 않고 자기 고집과 생각에 갇힌 영혼은 모두 주님을 십자가로” 몰아갔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누구도 내일 일은 물론 장래 일을 모르고, 심지어 5분 후의 일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먼저 다가오심! 지키심과 보호하심을 체험하려면! 반드시 하나님께 묻고! 그 응답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다행히 “아직 안 늦었고! 하나님은 하나님께 물었던 영혼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보호”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더 자주 묻는 영혼에게 먼저 다가오셔서 더 큰 은혜를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한주도! “내게 먼저 다가오셔서 나를 지키고 보호하는 하나님 은혜로 날마다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