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6-08-22일, 심야에 아프리카 중서부 카메룬의 한 화산에서 유독가스가 분출”되었습니다. 사고 “원인은 당시 카메룬 북서부의 니오스호에서 이산화탄소와 혼합 유독가스가 수면을 뚫고 뿜어져 나와서, 주변에 있던 세 개의 마을을 순식간에 덮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고로 “최소 1,700여 명이 순식간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사고 현장은 “마치 중성자탄의 폭발처럼, 가옥들은 그대로 있었지만, 많은 사람만 죽어 있었다고” 합니다.
혹자는 “마치 주님의 재림처럼, 생각지 않은 때, 생각지 않은 방법으로 엄청난 참사가 일어났다.” 말했습니다. 마 24:36절은 “그러나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말씀합니다. 성경은 “주님의 날이 언제 임할지 침묵하지만, 주의 날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피곤하고 힘들면 졸 수 있고, 수면을 통해서 쉼을 얻어야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졸지 말고 깨어 있어야 악한 세상에서 주의 날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악할수록, 성도가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함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주의 날이 반드시 임할 것이고, 마치 도둑처럼 그리고 임산부가 갑자기 아이를 낳는 것처럼, 주의 날이 임할 것이다!”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가 어둠에 빠져서 살아가지 않으면, 주의 날이 도둑처럼 임할 수 없다고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주께서 재림하는 날은 구원이 확정되는 날이지만, 동시에 심판과 징계의 날이기도” 합니다. 나아가서 “주님의 초림은 재림을 약속하고 있지만, 재림 이후는 모든 것이 다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의 날이 가까이 다가와도, 주의 백성은 이를 넉넉히 이길 수 있기에, 말씀에 합하게 준비하며 살아가라고 도전”합니다.
주님의 “날은 이를 알고 준비하는 자에게는 은혜와 구원의 날이지만, 오늘 우리는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빠서, 주의 날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심지어 “주의 날에 무관심함이 반복되어, 주의 날이 내 삶에 아무런 영향도 주고 있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의 날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영혼은, 이 땅에서 주어진 청지기의 사역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날이 가깝기에, 이를 어떻게 준비하며 살아가야 할지!” 살펴봅시다.
1. 주의 날이 가까이 왔기에, 우리가 어두움이 아닌 빛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 4~5절에서, 성도를 어두움에 있지 않은 사람들, 빛과 낮의 아들로” 말합니다. 그리고 “본문 8절은, 성도를 낮에 속한 사람이기에, 어둠과 반대로 살아가야 함을” 말씀합니다. 낮의 “특징은 보이고 공개될 수밖에 없기에, 언행을 더 조심하게” 됩니다. 반면에 “밤은 어두움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고 비공개적이기에, 낮보다 죄에 빠질 위험이 훨씬 더” 큽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낮처럼 살아가야 함을 도전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밤처럼, 불 신앙으로 살아간다면, 가까이 다가온 주의 날은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주의 날이 가까울수록, 한결같이 어둠이 아닌 빛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마5:26절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말씀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빛보다 어둠에 빠져 성도라고 당당하게 말하기도 부끄러운 삶을 살아갈 때가 더” 많습니다.
최근 “한국의 상황을 보면, 기독교인과 교회라는 단어가 크게 공격받고” 있습니다. 핵심은 “하나님과 복음에 문제가 있기보다, 오히려 교회와 기독교인이 하나님은 물론 복음과 역행하며, 어두움에 빠져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블랙아웃은 “대정전 사태를 말하는데, 전력 사용량이 급증하여 공급량이 부족할 때, 발생하는 현상을” 뜻합니다.
발전기가 “사용량을 감당하지 못해서, 전압이 떨어지고, 그 발전기와 연결된 다른 모든 발전기가 멈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블랙아웃은 전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생활에서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영적 블랙아웃은 영적 능력을 잃어서, 순식간에 삶의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영적 블랙아웃이 시작되면, 주일 예배를 점점 멀리하고, 이어서 기도가 줄어들고, 봉사와 헌신을 잃어가고, 봉헌 생활마저 멈출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물론 교회와 멀어지면서, 그 삶이 점점 더 어두워져” 갑니다. 문제는 “영적 블랙아웃은 절대로 혼자 해결할 수 없고, 그 악영향이 주변에 연쇄적으로 확장되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마침내 “영적 블랙아웃은 내 삶은 물론 주변 모두를 실족으로 이끌어가는 재앙이”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예배와 말씀에 대한 태도, 봉사와 봉헌 생활, 내가 지금 빛 가운데 살아가는지, 어두움에 살아가는지, 자문하며 답을 찾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내가 영적으로 잠들어가고, 어둠에 빠져가는 것을 가장 경계해야!” 합니다. 누구도 “어둠에 빠지면 하나님과 멀어지고, 구원과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두운 밤을 살아도 빛의 사람처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공개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요 13:30절은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말씀합니다. 성경은 “유다가 미혹을 받고 주님을 팔려고 나간 시간이 밤이었고, 이는 당시 유다가 어둠에 속해서 살아갔음을” 말씀합니다. 유다는 “비록 낮이었지만, 누구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두리번거리며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마침내 “잘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에 주님을 팔기 위해, 괴로워하는 주님을 뒤로하고, 유대인에게 주님이 계신 곳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렇게 “유다가 이미 빛이 아닌 어둠에 속해 있었기에, 본인과 동역자, 심지어 주님까지 다 힘들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밤을 피할 수 없지만, 지혜로운 영혼은 밤에도 밤에 속하지 않은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이처럼 빛 가운데 살아가야 할 이유는, 빛 가운데 살아가야, 주님의 날에 버림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빛 가운데 “살아가야, 구원에서 멀어지지 않고, 영생을 얻고, 주님과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며 동역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세상이 어둡고 악하다고, 같이 어둠에 속해 살아가는 것은 변명”입니다. 세상이 “어둡기에, 우리는 더욱 빛 안에서, 주님을 닮아가며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빛 가운데 살려면 어렵고, 심지어 희생과 손해도 감수해야 하지만, 그래도 주의 백성이 빛 안에서 살아가야, 주님의 날이 도둑처럼 임하지!” 않습니다. 팬더믹으로 “어렵고 힘들지만, 그럴수록 더욱 우리 믿음을 지켜서 빛 안에서 주의 날을 기다리는 신실함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
2. 주의 날이 가까이 다가오기에, 우리는 우리를 살리시는 은혜가 있음을 기억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9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말씀합니다. 바울은 “주께서 우리를 먼저 택하심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도전하며, 본문 10절에서, 주님께서 연약한 우리로 하여금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말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죽을 수 없고, 죽음과 무관하고,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살아계셔서 천지를 주관하실 유일한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죄인인 인간을 하나님처럼 영원히 살게 하려고 부르시고 은혜를 주셨다.” 말씀합니다.
주의 “날이 가까울수록, 주께서 우리를 살리려 하시기에, 우리는 더욱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고 세우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이를 잘 모르고 이 은혜를 벗어나서 살아가려 함을” 책망합니다. 마침내 “충분히 세워지고 살 수 있지만, 악에 빠져서,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어둠에 빠져” 살아갑니다. 심지어 “기독교인조차 생명으로 다가가기보다 세속적 사고에 빠져 죽음으로 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실제로 “오늘날 교회가 세상을 위해 기도하기보다,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더는 교회와 기독교인을 존중하지 않고,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는 집단과 사람들로” 책망합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자력으로 악한 세상에서 생존해 갈 수 없고, 스스로 살고 싶다고 해도, 혼자 살 수 없는 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이 살리고 세우시는 하나님을 믿어 영접하면, 살리고 세워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날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더더욱 주님의 살리시고 세우시는 은혜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의 살리시는 은혜로 살아가기에, 우리도 타인을 살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타인을 살리고 세우는 삶을 살아가려면, 우리 말과 입, 선택과 결정이 살리고 세워가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유는 “주께서 항상 죄인인 나를 살리고 세워 주시는 사랑이 가득한 말로 다가오셔서, 나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변을 보면, 죽이고 아프게 하는 말로 인해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봅니다. 혹자는 “험한 말을 하고 ‘나는 뒤끝 없다.’ 말하지만, 누군가가 말로 받은 상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혹자는 “생각 없는 말, 즉흥적인 말로, ‘아니면 말고 식으로’ 타인의 상처를 건드려서, 평생 지워지지 않는 아픔을 주기도” 합니다.
어떤 “익명의 기독교인이 자신의 언어, 말에 관하여 드린 세 가지 기도 내용을 소개하려” 합니다. 먼저 “이분은 ‘복된 입이 되게 해 주세요!’ 기도했는데, 이는 말에 축복과 저주가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둘째, “‘내 입에 파수꾼을 세워 주세요!’ 이는 생각 없는 말, 거친 말,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도록 입단속을 결심하는 것”입니다. 셋째, “‘살리는 말을 하게 해 주세요!’ 이는 영적이고 신령한 말을 하고, 살리는 말을 하겠다는 깊은 결단”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항상 내 말과 입술이 살리고 세우는 데 쓰임 받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만일 “나의 말이 퉁명스럽다면 고쳐야 하고, 부드러운 말을 위해서 훈련해야!” 합니다. 내 말이 “부정적이고 비꼬듯 말한다면, 이 또한 상대방을 배려하는 말이 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링컨이 “40세 후에는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는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 말이 험해진다면, 이는 내 삶과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내가 훈련해서 따뜻한 마음, 살리고 세우려는 마음을 가진다면, 내 말도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욥기에서 “환난에 빠진 욥을 위로하려고 엘리바스 소발 빌닷 세 친구가 찾아” 옵니다. 당시 “세 친구가 욥에게 말하는 내용은 모두 옳았고, 이치와 상식에 맞았지만, 놀랍게도 욥은 그들의 말을 듣고 더 분노했고, 공격적으로 변해” 갔습니다. 이유는 “세 친구의 말이 옳았지만, 진심으로 욥을 살리고 세우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욥을 살리고 세우려는 진심이 없었기에, 욥은 더 크게 상처받아 생일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맙니다. 살리고 “세우는 삶은 살리고 세우려는 마음에서 비롯되고, 이는 살리고 세우는 말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옳고 이치에 맞는 말이라고 다 위로가 되지 않고, 살리고 세우려는 마음으로 하는 말만이 실족한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타인을 살리고 세우려는 마음과 말을 위해 훈련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이 “힘들수록, 우리가 살리고 세우려는 삶으로 무장하면, 주변에 살리고 세울 수 있는 사람은 너무” 많습니다. 또한 “내가 살리고 세우려고 훈련할수록, 나와 가족 내 주변 사람과 교회가 살아나고 세워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십자가 보혈로 살리고 세우심은, 나도 살리고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힘든 현실을 살아가지만, 더욱 살리고 세우려는 마음과 언어로 주의 날이 가까이 다가옴을 예비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