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저장성에서, 어떤 여성이 82세로 사망했는데, 자녀들이 특별한 장례식을” 진행했습니다. 장례식에 “대형카메라 9대, 악단 100명과 리무진 9대가 동원되었고, 국가행사용 폭죽, 그리고 수천의 조문객을 초청”했습니다. 이로 인해 “민폐가 너무 커서, 중국 공산당은 장례식 장소를 빌려준 기관과 지역 관계자를 처벌했다고” 합니다.
짧은 “이야기지만, 연약한 인간이 화려하게 장례식을 치른다고, 죽음의 슬픔이 참된 소망이 될 수 없음을” 교훈합니다. 어쩌면 “그만큼 죽음에 대한 공포가 크고,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참된 소망으로 바꾸려는 방법을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죽은 자의 구원 문제로 갈등이” 컸습니다. 특히 “주님의 재림 전에 죽은 자는 구원 받을 수 없다고 여겨서, 주의 재림 때, 살아서 믿음이 있는 자만 구원받는다.” 생각했습니다.
또한 “당시 불신자는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에게 복음을 들었지만, 성경에 합한 종말론 지식의 부재로, 소망보다 슬픔에 빠져 갈등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이 땅의 삶을 다한 자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다. 죽은 자에 관한 정의부터 새롭게 해야!” 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비록 주의 재림 전에 사망해도 구원받을 수 있고, 영광스러운 주의 재림에 참여할 수 있고, 부활이 있기에 슬퍼하며 근심하지 말라고” 도전했습니다. 당시 “바울의 교훈은 슬픔과 낙담에 빠진 데살로니가 교회를 넉넉히 위로했을 것”입니다. 연약한 “인간은 모두 죽음에서 예외일 수 없고, 누구나 본인과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과 죽음을 통해 이별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우리는 죽음 앞에서 예외 없이 슬픔 중 무기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부활과 영생을 믿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이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기독교인의 죽음은 단순히 슬픔으로 끝날 수 없고, 오히려 더 큰 소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문제는 “죽음만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일상은 세상의 악함이 극심해도, 팬더믹의 고통이 어렵고 힘들어도, 슬픔보다 소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죽음과 악함이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슬픔보다 소망으로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1. 슬픔이 소망이 되려면, 우리가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디모데 또는 다른 누군가를 통해, 데살로니가 교회가 죽음 후 구원 문제로 갈등하고 있었음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의 사후에 관해 정확하게 알려줄 필요성을 느껴서 펜을 들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누릴 복을 참으로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설명합니다. “주님 안에서 죽은 자는 하나님이 예수의 재림 때 함께 데려올 것이다. 주님의 재림 때, 죽은 자를 먼저 일어나게 하실 것이다!”
“주의 재림 때,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는 공중에 올라가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성도는 훗날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있을 것이다!” 바울이 “이처럼 성도의 사후 삶을 자세하게 말한 이유는, 단순히 죽음의 문제로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말라는 의도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 땅의 삶이 짧고 한계가 있고, 절대로 전부가 아니기에, 하나님과 함께할 영원한 천국, 영생을 사모하라고 도전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는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고 입술로 고백하지만, 현실은 이 땅의 삶을 전부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풍요함보다 물질적 풍요함을 더 사모하고, 천국보다 세상에서 더 좋은 것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노력하여 얻고자 했던 세상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 “지금 내가 자신하는 건강, 기억력, 남에게 없는 특별한 나의 재능까지도 점점 약해져 갈 수밖에” 없습니다.
나아가서 “물질도, 내가 소유한 것보다, 오히려 내가 사용하고 쓰는 것만 내 것임을” 아세요? 실제로 “쓰지도 못하는 거금이 내게 작은 기쁨이 될 수도 있지만, 하나님 나라, 영생을 얻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눅 12장을 보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부자가 농사를 지었는데, 소출이 풍성해서, 곡식 쌓을 곳을 걱정할 정도로 풍년이었고, 마침내 거대한 창고를 짓고 기뻐했지만, 하나님께서 그 밤에 그 부자를” 부르셨습니다.
생각할수록 “이 부자는 나름대로 열심히 일해서 소출이” 많았습니다. 나아가서 “곡식을 모으려는 준비성이 있었고, 내일부터 편하게 살려고 생각하는 계획성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남들의 부러움을 샀지만, 주님은 이 영혼이 어리석다!” 책망하셨습니다. 이유는 “이 땅의 삶에만 집착하고 죽음 이후를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죽음 “후의 삶이 더 길고 중요했지만, 어리석은 부자는 이 땅의 것을 전부로 알고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부자가 어리석다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어리석다고 욕먹어도 좋으니, 그래도 부자로 한번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세요? 물론 “이 땅의 삶이 짧고 덧없이 빨리 지난다고, 되는대로 대충 살아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유는 “주께서 나를, 지금 삶의 자리에서 소중한 청지기로 세워서 헌신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선순위인데, 무엇을 더 소중히 여기며 살아갈 것인가로 인해 슬픔과 소망이 나뉠 수” 있습니다.
약해도, “우리가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천국을 바라보고 살아간다면,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체험하고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정애주 “사모는 남편이 모두에게 존경받는 목회자, 100주년 기념 교회를 섬겼던 이재철 목사”입니다. 그리고 “아들이 넷인데 장남은 변호사, 둘째는 유명한 유투버, 셋째는 최근 화제가 된 가수이고, 막내는 독일에서 미술을 공부 중”입니다. 게다가 “본인은 유명 기독교 출판사 홍성사를 운영 중”입니다.
겉으로는 “세상에서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지만, 이 분이 최근 고백한 내용이 큰 도전을” 줍니다. “아직 제 인생의 정점은 오지 않았어요! 제 인생의 정점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그 순간입니다.” 그 “간증을 듣고 ‘저분은 진짜 기독교인이구나!’ 생각했는데, 이유는 이 땅의 그 무엇보다, 천국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땅의 삶은 내가 노력해서 얻어야 할 것이 많지만, 천국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삶은 모세의 고백처럼, 길면 70년 강건하면 80년이지만, 천국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이 땅과 죽음 후의 영원함 중 과연 무엇을 선택해야 더욱” 지혜로울까요? 그런데도 “오늘 우리는 영원함이 있음을 자주 들어서 알고 있지만, 여전히 제한적인 세상에 함몰되어!”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내가 남은 삶을 소망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슬픔에 빠져 살아갈 것인가?’ 이는 철저히 내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핵심은 “세상은 내게 참 소망을 절대로 줄 수 없지만, 오직 복음과 하나님만 내게 참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직 안 늦었기에,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이 땅의 것이 전부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천국을 소망하며 하루하루 믿음의 길을 가며 영적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
2. 슬픔이 소망이 되려면, 영원한 삶을 위하여, 지금부터 믿음으로 준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하나님 백성이 이 땅의 삶을 다하고 죽음 이후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단순히 “종말론 지식이 부족해서 슬퍼하고 낙심한 데살로니가 교회에 죽음 후 삶에 관한 바른 지식을 가르치려는 것이 목적”이었을까요? 오히려 “영생에 대한 소망으로 죽음 이후의 삶을 바로 알고 준비하라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19절에서,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강조했습니다.
위로하다. “팔라칼레이테는 현재형 동사로, 바로 지금부터 서로 위로하라는 뜻”입니다. 더는 “죽음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잘못된 지식에 얽매여 있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죽음의 의미와 가치, 사후 세계의 은혜를 바로 알고, 서로 위로하며 함께 준비하라는 도전”이었습니다. 오늘날 “시대가 아무리 첨단과학의 영향이 크고 철학적 다양성이 깊어도, 영생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기에, 영생을 얻기 위한 바른 방법을 분명히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인 성경만이 영생을 얻는 방법, 영생을 얻기 위한 준비를 가장 바르게 가르쳐” 줍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영생이 멀리 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나와 상관이 없다, 아직 할 일이 너무 많다고’ 변명과 핑계로 영생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당연히 “관심이 적어지기에, 영생을 위한 준비도 미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삶에서 “준비는 미래를 한 번 더 생각하게 하는 힘과 지혜이기에, 너무도 중요한 덕목”입니다. 실제로 “준비 없는 삶과 준비하며 살아가는 삶이 얻고 맺는 열매가 어떻게” 같겠어요? 요셉이 “17세에 형들에게 팔려서, 말하는 짐승인 노예가 되어, 애굽에 끌려” 갔습니다. 생각할수록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달랐고, 특히 채색 옷을 입을 정도로 사랑받던 사람이 무시 받고 천대받는 노예가 되었으니, 그 마음의 상처와 아픔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랬던 “요셉이 불과 13년 만에 당대 최강국 애굽의 총리로” 발탁되었습니다. 당시 “애굽에서 요셉만 한 지혜와 능력을 갖춘 사람이 왜 없었겠으며, 애굽 신하 중 총리가 될 신하가 왜” 없었겠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노예였던 요셉이 이처럼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을까요? 핵심은 “요셉이 슬픔에 빠져 있지 않고, 보디발 가정에서 일했던 경험, 감옥에서 억울하고 힘든 중에도 소망으로 미래를 준비하며 살았기에 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삶에서 “준비가 있다면, 항상 그만큼 더 선한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영생을 얻으려는 준비가 많을수록, 그 열매와 상급이 더 크지” 않겠어요? 우리가 “영생을 준비하려면, 영생이 있음과 영생은 예수를 믿어야만 얻을 수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주께서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이를 제대로 알고 준비하며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영생을 위한 준비는 일시적이기보다, 영생을 얻기까지 끝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유럽을 “출발한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향하는 중, 거대한 풍랑을 만나서, 가까스로 무인도에 도착”했습니다. 우선 “당분간은 무인도에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이민자들은 배에 싣고 온 짐을 내렸고, 다행히 몇 달 동안은 버틸 수 있는 양식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양식은 미국에 정착해서 쓸 종자였기에, 당분간 무인도에 머무르려면, 그 종자를 심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농사를 시작해야 하는데, 누군가 무인도에서 금광을 발견”하였습니다.
무인도 “곳곳에 금덩어리가 널려 있었기에, 사람들은 금덩이를 줍기에” 바빴습니다. 그렇게 “금을 줍다 보니, 씨 뿌리고 일해야 함을 잊었고, 얼마 후 겨울이” 되었습니다. 비록 “엄청난 양의 금을 얻었지만, 이민자들은 식량이 없어서 모두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눈앞의 금덩이를 찾을 준비는 철저하지만, 다가올 영생을 위한 준비는 너무도” 소홀합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는 영생을 위한 준비를 바로 지금부터 해야!” 합니다.
모세는 “시 90:10절에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말씀합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는 점점 더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위한 준비도 더는 늦추지 말고, 지금부터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하심대로 해야!” 합니다. 부족해도 “우리가 철저하게 영생을 준비하여, 슬픔보다 소망으로 남은 삶이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