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관광객이 이스라엘을 여행 중, 목자가 양들에게 ‘Manah Manah’ 소리치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Manah는 ‘Follow Me!’라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양들이 목자의 부름에 줄지어 따라” 왔습니다. 이에 “관광객이 목자에게, ‘내가 양들을 한 번 불러보겠다!’ 말하자, 목자가 이를” 허락했습니다. 관광객이 “목자의 옷을 입고, 목자의 목소리처럼 ‘Manah, Manah’ 소리쳤지만, 양들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깜짝 “놀란 관광객이 ‘주인의 부름이 아닌데도 응답하는 양이 있는지!'” 묻자, 목자가” 답했습니다. “가끔 아픈 양이 주인 외의 음성을 듣고 따라갑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미물인 짐승도 주인을 알아보고, 작은 일에도 주인을 저버리지 않고 따라서 살아가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 교회와 기독교인은 세상에서 주인이 누구이고, 누가 자신을 부르는지, 구분하지 못하고, 소리 나는 대로, 내 기분대로 쫓아가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주인의 음성을 저버리는 삶이 반복되면, 그 저버림이 습관으로, 습관이 생활로, 생활이 신앙으로 굳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계속 저버림이 반복되면, 그 삶이 어떻게 좋아질 수” 있겠어요? 그러나 “비록 세상이 악해도,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실족하지!” 않습니다. 본문 8절은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저버리다. 아데톤은 법과 규정, 효력을 폐지하다. 무효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 아데톤은 거절하다. 무시하다. 의미로 더 많이” 쓰였습니다. 문제는 “저버리는 대상 또는, 무엇을 저버리는가? 이보다, 당시 많은 유대인이 바울의 가르침과 복음을 저버림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르신 이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거룩하게 살아가고, 이방인과 달리 신실해야 함에 있지만, 이를 저버리고 사는 인간이 너무” 많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처음에는 복음을 저버리고, 심지어 바울을 핍박했지만, 다시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여,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마침내 “믿음 소망 사랑이 있는 교회, 소아시아 곳곳에 선한 본이 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이민자인 “우리 삶이 버겁고 힘들어서, 은혜를 저버리고 내 마음대로 살아가려는 미혹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복음과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이 땅을 살아갈 수 있을지” 살펴봅시다.
1.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삶은, 배우고 아는 것을 힘써 행하며 살아갑니다.
본문 1절은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말씀합니다. 바울은 “무엇인가 예고도 하지 않고, 무조건 일방적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라, 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본인이 직접 가르쳤던 복음, 디모데를 통해 다시 강조한 교훈을 기억하라!” 도전합니다. 그렇게 “바울은 자신과 동역자를 통해 배운 것을 삶에서 힘써 행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사랑의 수고, 믿음의 역사, 소망의 인내로 우뚝 서고, 소아시아 곳곳에 본이 되는 교회로 인정받은 이유는, 이처럼 말씀을 배운 그대로 힘써서 행한 결과”였습니다. 이처럼 “주의 종과 성령님의 가르치심을 통해 배운 것을 힘써 행하는데, 어떻게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어요? 속담에 “굴러가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말합니다. 삶이 “정체되어 있어서, 없어야 하는 이끼가 끼고, 마침내 삶이 더 피폐해져 가는 것”입니다.
요 14:26절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말씀합니다. 문제는 “성령께서 항상 내 안에서 바르고 선하게 가르쳐 주지만, 우리가 이를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오늘 우리의 영적 지식은 점점 빈곤해져 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잘 모르면서도 배우려고 하지 않고, 배우지 않으니 더 모르게 되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북 왕국은 B.C 722년에 앗수르에 패망하고, 남 왕국은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이유는 “선민이 배우고 알아야 할 것에 힘쓰지 않고, 정반대의 길로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택함을 받은 선민으로서 배우지 말아야 할 것, 알지 않아도 되는 것, 힘쓰지 말아야 할 것에만 집중했던 것”입니다.
당시 “하나님께서 선민이 저지른 한두 번의 범죄로 인해, 이처럼 심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선지자를 파송하셔서, 선민에게 거룩한 말씀을 반복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선민은 배우지 않았고, 행하려 하지 않았고, 그릇된 것만 따라서 살았기에,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패망의 모든 책임이 선민에게 있었고, 마침내 이스라엘의 고난은 계속 이어져서, 이방 땅에서 70년간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배우고 아는 것을 힘써 행해야 할 이유는, 나 혼자만 잘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물론 “무엇보다 말씀과 은혜를 배우고 알아가며 힘쓸 때, 누구보다 나 자신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 “배우고 아는 것을 행하려고 힘쓰며 살아갈 때, 나의 자녀와 가정이 살아나고, 주변의 많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배우고 알아가려 힘쓸 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새로운 것이 보이고, 더 성장하고 발전해 갈 수” 있습니다.
축약하면 “배우고 아는 것을 행하려 힘쓸수록 더 성장할 수 있지만, 이 은혜를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2002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는 다나카 고이치 씨”였습니다. 통상 “노벨 화학상 수상자는 세계적 학력과 천재성을 인정받는 과학자가 대다수”입니다. 그러나 “다나카 씨는 최종학력이 대졸이고, 나이도 불과 43세로 박사는 물론 대학교수도” 아니었습니다. 다나카 씨는 “실험을 좋아했고, 화학을 사랑하는 연구원일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승진보다 화학 실험을 더 좋아했던 다나카 씨가 노벨 화학상을 받은 계기는, 실수로 어떤 용액을 떨어뜨렸는데, 이로 인해 암의 조기 진단과 신약 개발의 가능성을 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언론은 “다나카 씨의 업적은 우연이 아니라, 항상 실험을 통해 배우고 알아가는 과정을 반복함에 있었다고” 평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가졌는가, 보다, 오히려 내가 받은 것에서 얼마나 더 배우고 알아가려고 힘쓰는가에 더욱” 주목합니다.
은혜를 “저버리는 삶은 배우고 알아가려 하지 않고, 행함이 없는 삶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언제나 하나님의 저버림을 받지 않도록, 영적으로 깨어서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도 “성령께서 항상 필요한 것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기에, 우리가 그 교훈을 배우고 알아가기 위해 힘써서 은혜를 저버리지 않기” 원합니다.
2.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삶은, 거룩함을 지키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3절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거룩함과 반대로 음란을 말하며, 이어지는 구절에서, 이방인과 구별된 가정생활, 색욕을 따르지 않는 삶, 형제를 해하지 않는 삶을 거룩함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과거로 돌아가서 거룩함을 버리고 세속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가 앞으로도, 항상 거룩함으로 세상과 달라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바울은 “거룩함을 지키면 은혜를 저버리지 않지만, 거룩함과 멀어지면 은혜를 저버리고, 복음마저 잊어버릴 수 있다!” 경고합니다. 바울은 “비록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진 기간이 짧았지만, 교회가 거룩함으로 성장하길 간절히” 원했습니다. 오늘날 “악하고 세속화된 세상에서 거룩함은 어딘지 시대에 뒤떨어지고, 멀어지고 소외된 단어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거룩함을 말씀하면 구태의연하고 고리타분한 옛날의 유산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이유는 “거룩함의 정의를 잘 모르고 잘못 적용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은 “목소리, 옷 입는 것으로, 외적인 모습과 생각하는 것으로 결정되지 않고, 실제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한 마디로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는 삶, 세상과 구별되게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거룩하기보다 악한 세상에 함몰되어서, 세상을 닮아가며 세상과 같아지려고 노력하며 살아갈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기독교인은 악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거룩해야, 십자가 복음으로 주신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19세기 말 “찰스 스펄전 목사는 런던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1866년 “메트로폴리탄 교회는 출석 성도가 무려 4,500명 정도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였다고” 합니다. 어느 주일, “스펄전 목사가 설교를 통해, 메트로폴리탄 교회의 성도에게 이렇게” 도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향해 가슴이 뜨거운 사람, 열둘만 있다면 이 런던의 삭막하고 고독한 환경을 기쁨이 충만한 곳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4,500여 명이 있어도 전부가 다 미지근한 성도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최근 “한 소망 교회는 새로운 분의 방문이 계속 이어지고 있고, 작게나마 교회학교가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팬더믹의 어려움 중에도 이런 은혜를 누리고” 있을까요?
과거 “한 소망 교회가 뉴저지의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하고 부흥한 이유, 지역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친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모두가 “말하는 좋은 시설, 좋은 위치, 좋은 교육 프로그램 등이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교회를 세워가는 중, 마음과 뜻, 물질과 힘을 다해서 헌신하고 수고한 분들의 공로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록 나타나지 않아도, 교회 구석에서 봉사한 분들, 간절하게 중보기도 한 분들의 역할도 크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우리가 전혀 모르고 상상도 못한 영혼, 어쩌면 우리 자녀 중 누군가 간절히 교회를 위하여 기도함에 대한 응답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스펄전 목사의 설교처럼, 한 소망 교회에서 가슴이 뜨겁고 거룩한 사람 열둘이 있었고, 지금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홍해 사건은 “성경에서 가장 통쾌하고 엄청난 은혜가 가득한 사건”입니다. 홍해 “사건을 통해, 선민이 애굽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가나안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애굽 군이 “추격할 때, 하나님 사자와 불기둥이 선민과 애굽군 사이에서 선민을 보호”했습니다. 홍해를 “통과하며, 하나님은 선민에게 마른 땅을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홍해 사건을 통해, 선민 중 희생자가 하나도 없었음을” 강조합니다. 이유는 “선민이 애굽의 세속적 문화를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한 거룩함 때문”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선민의 승리는 더는 세속적 삶보다 하나님만 추종하는 거룩함을 택한 결과”였습니다. 레 11:45절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함을 원하신 이유는, 선민을 하나님 백성으로 삼고 책임져 주기 위함에”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처럼 거룩함은 출애굽 선민만이 아니라,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에게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거룩함으로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영혼을” 찾습니다. 인간이 “거룩함을 추구할 때, 하나님께서 그 영혼과 가정과 선물로 주신 자녀와” 동행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저런 핑계로 거룩함을 외면하고, 마침내 은혜를 저버림에” 있습니다. 세상이 “악할수록, 더 거룩하여,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