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네기 공대 “연구팀이 졸업생 중, 사회적으로 저명한 동문에게, ‘성공하기까지 무엇이 가장 중요했는지'” 물었습니다. 이에 “불과 15%만 전문 지식과 좋은 기술로 성공했다고, 무려 85%가 친밀한 인간관계 때문에 성공했다고!” 답했습니다. 이에 “카네기 공대는 ‘친밀한 관계로 성공한 사람에게 세 가지 방문이 있었다!’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첫째 “입의 방문으로, 전화나 말로써 사람을 칭찬하며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를 맺어가는 것”입니다.
둘째 “손의 방문은, 작지만 손편지와 문자를 통해 진솔한 마음을 전달하며 친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셋째 “발의 방문은, 누군가 어렵고 힘들 때, 직접 찾아가서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이처럼 “성공은 그냥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고, 이에 상응하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고 소외된 삶, 관계가 끊어진 삶을 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친밀함을 원하면서, 삶에서는 좋은 관계를 맺어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시간과 마음을 써서 입, 손, 발의 방문을 실천한다면, 그 관계가 얼마나” 친밀해질까요? 기독교인은 “은혜로 구원받았기에, 당연히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고, 그 비결을 반드시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자기 대신 디모데를 보내도, 바울처럼 영접할 정도로, 그 친밀한 관계가 참으로” 깊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 복음화 초기에, 바울이 당한 박해와 고난은 참으로” 컸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본문 7절에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말합니다. 당시 “바울은 상황이 여전히 어려웠지만, 데살로니가 교회와 친밀한 관계가 큰 위로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서로 아픔을 공유하고,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 할 정도로 그 관계가 친밀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의 친밀함은 그냥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친밀한 “관계는 타인보다 내가 먼저 주님의 마음으로 다가가야 맺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마귀는 성도의 친밀한 관계를 깨고자, 갖가지 미혹으로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귀가 친밀한 관계를 막을수록, 더 강하게 친밀한 관계를 이어가야!” 합니다. 이유는 “연약한 인간은 수직적, 수평적 관계가 친밀해야, 사람답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떻게 친밀한 관계를 맺었는지, 그 비결을 배우기” 원합니다.
1.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면, 우리가 타인의 믿음과 삶이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야 합니다.
본문 2절은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말씀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우리 형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 하나님 일꾼으로” 소개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살피려고 가장 신임하고 믿었던 동역자 디모데를 파송”했습니다. 그만큼 “데살로니가 교회를 사랑했고 교회가 영적으로 든든히 서기를 간절히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바울은 가장 아끼는 동역자를 파송하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영적으로 든든히 서가며, 둘의 관계는 더욱 친밀해지고” 깊어졌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상황과 처지에 따라서 흔들리고 요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믿음도 상황에 따라서, 견고하여 기쁨이 넘치기도 하고, 시험과 상처에 무너지기도” 합니다.
문제는 “믿음이 흔들리면, 누구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고, 오히려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우리는 내 믿음도 굳건해야 하지만, 주변 동역자가 흔들리지 않도록 돕고 중보기도 하는 것도 참으로 귀한 사역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동역자를 “도와서 영적으로 굳건해지면, 그 영적인 견고함이 내게도 선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를 따라서 베들레헴에 이민 갔지만, 그 삶이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룻에게 “베들레헴은 언어와 문화가 달랐고, 선민의 이방인 배척은 큰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나마 의지해야 할 나오미가 그렇게 굳건하고 단단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나오미는 자기 이름을 마라로 바꿀 정도로, 그 절망과 상처가 심히” 깊었습니다. 그런데 “룻이 그런 나오미를 힘껏 도와서 생활을 책임지고, 부족함이 없도록” 섬겼습니다. 그렇게 “나오미가 영적으로 견고해지며 룻과 더 친밀해졌고, 마침내 오벳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오늘의 “비극은, 같은 교회에서 같은 하나님을 섬기며, 정말 친밀해야 할 성도의 관계가 이런저런 이유로 깨져감에”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름이 틀린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좀처럼 서로 하나 되는 친밀함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게 “서로 친밀함을 잃었기에, 교회에 와도 재미와 은혜가 없고, 있는 믿음마저 잃어가는 것”입니다.
특히 “서로 다른 우리가 한 교회에서 함께 동역함은, 내 의지보다 하나님의 경륜이 더 깊이 작용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를 도와야 함께 세워져 갈 수 있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주의 나라 확장을 위해 힘있게 일할 수”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레드우드 국립 공원에 있는 나무는 그 크기가 엄청나게” 큽니다. 어떤 “나무는 밑으로 2차선 도로가 가능하고, 어떤 나무는 장정 20명이 손을 맞잡아야 할 정도로” 거대합니다.
학자들은 “레드우드 나무가 거대한 몸집을 지탱하는 이유를 그 나무의 뿌리 형태에서” 찾습니다. 일반적으로 “나무는 크기와 뿌리가 비례하는 데, 레드우드는” 다릅니다. 레드우드는 “그 뿌리가 깊지 않지만, 옆의 나무들과 잘 얽혀”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많은 레드우드 나무들의 뿌리가 서로 깊게 연결되어, 그 웅장하고 거대함을 지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대한 레드우드는 그 뿌리가 서로 깊이 연결되어 합력하며 생존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 “성도의 친밀한 관계는 좋은 건물이나 시설보다, 성도가 은혜롭게 연결되어, 서로를 돕고 합력하며” 형성됩니다. 연약한 “인간은 절대로 홀로 온전히 설 수 없고, 든든하고 굳건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주의 백성은 그 믿음의 뿌리가 서로 깊이 연결되어서, 서로를 돕고 지탱해주고, 합력해야 더 힘있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소망 교회는 서로 합력하고, 지탱해주고,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사역하고” 있습니까?
나부터 “옆에 있는 누군가를 도와야, 그 영혼이 살아나고, 나도 살아나고, 우리 교회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친밀한 관계를 원한다면, 바로 나부터 주변 가까운 동역자를 도와주고, 세워주고, 격려해 주길” 원합니다. 그렇게 “나부터 주변 사람을 귀하게 여겨서, 한 소망 교회가 친밀한 관계로 더 부흥하기” 원합니다. 그렇게 “항상 서로 도와주며 세워주고, 긍정과 칭찬으로 합력하여, 깊은 친밀함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기” 원합니다.
2.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면, 우리가 항상 잘 챙기는 사랑과 관심으로 타인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본문 5절은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그를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니” 말씀합니다. 바울은 “염려한 대로, 시험하는 자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와서 어려움을 주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침내 “바울은 심사숙고 끝에, 가장 신임하는 디모데를 보내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을 꼼꼼히 챙겼고, 다행히 디모데로부터 데살로니가 교회에 관한 좋은 소식을 듣고” 안도했습니다.
당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와 그 관계가 친밀했기에, 이처럼 잘 하고 있는지, 괜찮은지,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지 챙겼던 것”입니다. 우리가 “타인이 잘 하고 있는지 챙기는 것은 감시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도 타인에게 감시받고 조정 당하고, 내 의견이 무시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설사 “나를 챙겨주어도, 나에게 강압적으로, 함부로 말하면서 챙긴다고 하면, 어떻게 친밀할 수” 있겠어요? 그러나 “감시와 조정하려는 마음, 무시와 폄하가 아니라, 진심이 가득한 사랑과 관심으로 다가와서 챙기면,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말의 방문인 중보기도로, 손의 방문으로, 발의 방문으로 타인을 섬기고 챙길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 “타인이 필요한 것을 예상하고, 마음과 물질까지 동원하여 돕고 챙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의 마음으로 나를 챙기며 살펴줄 때, 닫힌 마음이 열리고, 전보다 더 친밀한 관계를 맺어갈 수”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골로새에서 주인 빌레몬으로부터 도망하여, 바울을 만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까요? 어쩌면 “그 먼 여중 중, 깊게 잠도 못 잤을 것이고, 편하게 식사도 못 하며, 불안감에 떨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두려움과 깊은 경계심에 빠져 있던 오네시모가 어떻게 주님의 사역자로” 바뀌었을까요?
만일 “바울이, 오네시모가 노예라고, 강압적으로 명령하고, 함부로 말하고 소홀했다면” 어땠을까요? 오네시모가 “마음을 열고 바울과 친밀하게 된 기초는, 바울이 주님의 마음으로 오네시모를 신실하게 섬기고 챙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쉽지 않았겠지만, 이처럼 바울의 진심 어린 챙김이 오네시모를 살려냈고, 교회의 역사까지 바꿀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타인을 챙기는 것을 귀찮고 번거롭게 여겨서, 꼼꼼하게 챙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오늘날 세상이 개인주의적이고, 나 위주로 살아가고,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탈현대주의 사고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은 하나님의 챙겨주심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듯, 챙겨줌은 믿는 자의 소중한 덕목”입니다. 실제로 “억지로 챙겨서 문제가 되는 것이지, 진심으로 챙기면 그 관계는 친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아가서 “진심으로 누군가를 챙기면, 인간관계도 좋아지고, 타인을 환난에서 건져낼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최근 “아주대학 홍 창영 정신 건강학과 교수가 참으로 특이한 내용의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부모와 어른에게 한주에 1회 전화하는 것은 월 1회 방문과 비슷하여 노인의 우울증 예방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특히 “노인이 손주와 한주에 1번 통화하면, 그렇지 않은 노인보다 우울증 발생률이 무려 23%나 줄어든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대인은 과거보다 상황이 훨씬 좋아졌지만, 바쁘다고 어른에게 자주 연락드리지 않을 때가 더욱” 많습니다.
문제는 “단순한 전화통화보다, 조금 더 세심하게 부모를 챙기며 통화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노부모에게 전화할 때, 건강 관련 안부를 꼼꼼하게 물어라!” 강조합니다. 실례로 “약은 챙겨 드시는지, 몇 달에 한 번씩 약을 처방받는지, 혈당과 혈압 조절은 잘 되는지, 무릎과 허리 통증은 없는지, 챙겨야!” 합니다. 저도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리며 대부분은, ‘별일 없죠?’ 이처럼 형식적인 물음이 가장 좋지 않은 전화습관이라고” 평가합니다.
특히 “한국의 부모님은 몸이 좋지 않아도, 심지어 심각한 건강 이상이 올 경우, 자식이 걱정할까 봐 제대로 말씀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화 한 통화를 해도, 꼼꼼히 챙겨서 묻고 확인하고 챙기는 지혜로운 습관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생존해 계신 부모님께 전화할 때, 어떻게 전화하고, 어떤 대화로” 챙기세요? 끝으로 “홍창영 교수는, 그래도 다행인 것은, 팬더믹으로 인해, 우리가 더 부모를 꼼꼼히 챙기게 되었다!” 말합니다.
삶에서 “뿌리고 심은 대로 열매를 거둠은 만고불변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면, 이처럼 주변 사람을 챙기고 보살피며 헌신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처럼 사랑과 정성으로 챙기는 것이, 그렇게 어렵거나, 엄청난 물질이 들지!” 않습니다. 실제로 “챙기지 못함보다 챙기지 않음이 더 많기에, 우리 생각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변의 가까운 사람을 주님의 사랑으로 챙기고 섬기며, 더 친밀한 관계를 맺어가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