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최초의 목사 중 한 분인 이 기풍 목사의 아내, 윤함애 사모가 남긴 간절한 유언이” 있습니다. “살면서 5분 이상 예수를 잊지 말아라!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라! 주의 종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그런데 “록펠러의 어머니 엘리자 데이비슨도 윤함애 사모와 참으로 유사한 유언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을 친 아버지로 섬겨라! 예배 시간에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라! 성경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하라! 주의 종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놀랍게도 “평생 하나님만 철저하게 섬기며 살았던 영혼이 남긴 간곡한 유언은, 동서양의 구분이 없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땅을 홀로 살아갈 수 없기에, 타인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부탁은 단순할 수도 있고 간곡할 수도 있는데, 간곡한 부탁은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간곡한 부탁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꼭 해야 하고, 꼭 필요하기에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나는 할 수 없기에, 내게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이처럼 간곡히 부탁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보다 성령과 말씀의 간곡한 부탁을 붙잡고 살아간다면, 절대로 실족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양한 핑계로, 사람과 하나님의 간곡한 부탁을 외면하고 살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본문 11절은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말씀합니다. 권면하다. “원어는 위로하다 격려하다의 뜻이고, 보혜사 성령과 그 어근이” 같습니다.
이를 보면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얼마나 간곡하게 부탁하며 말씀을 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핵심은 “바울의 간곡한 부탁 내용보다 바울의 간곡한 마음에” 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 진심으로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로 서기 원했고, 그 결과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든든해졌고, 소아시아 곳곳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성장해” 갔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고, 그 모든 말씀에는 항상 성령님의 간곡한 부탁이 가득 차” 있습니다.
만일 “이처럼 주님의 간곡한 부탁, 하나님 말씀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는 넘어지고 실족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신앙인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설교를 통해 주시는 간곡한 부탁, 말씀을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실제로 “지금도 내가 하나님의 간곡한 부탁, 그 메시지가 들린다면, 나는 아직 영적으로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간곡한 부탁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 바울은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 말씀을 받으라고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본문 13절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말씀합니다. 이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왜 굳건하게 되었고, 모두에게 본이 되었는지 귀한 단서를” 줍니다. 비록 “초기에 바울을 극심하게 박해했지만, 차차 바울의 설교를 하나님 말씀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이방 교회는 바울의 설교를 하나님 말씀으로 받지 않았기에 성장하지 못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들어야 함을 간곡하게 부탁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야 “영적으로 성장하고, 내 인생이 영생으로 향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은 “말씀의 홍수 시대로, 내가 원하는 본문과 설교자, 시간과 방법대로 말씀을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 중 진짜 하나님 말씀으로 집중해서 듣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요? 만일 “우리가 어떤 설교든 하나님 말씀으로 받는다면, 체험하는 은혜가 얼마나” 클까요?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 말씀으로 듣기보다, 오히려 그 날의 말씀을 평가하고, 심지어 거부할 때도 적지!” 않습니다. 내게 “주시는 메시지를 받기보다, ‘오늘은 뭐가 좋았다. 뭐가 틀렸다. 이랬으면 좋겠다!’ 요구가” 많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전하실 때, 유대인과 논쟁이 참 많았고, 핍박과 박해가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유대 종교지도자와의 갈등은, 말 그대로 일촉즉발의 위기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러는 중에도 큰 은혜를 받는 영혼이 있었고, 회개와 구원의 역사가 계속”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같은 말씀을 들어도 그 반응과 대응의 차이가 컸던 이유는, 주님의 설교 내용이 아니라, 그 말씀을 어떤 마음으로 듣는가에” 있었습니다.
주님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들었던 영혼은, 모두 다 살아났고, 병이 치유되었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설교를 하나님 말씀으로 듣기를 거부했던 영혼들은, 곧 주님의 박해자가 되어, 주님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내가 듣는 모든 말씀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메시지로 듣고” 있습니까? 달리 질문하면 “여러분은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마다 은혜받고 새롭게 되는 역사가” 있습니까?
만일 “내가 듣는 설교에 은혜받는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왜 많은 교회 중, 이곳으로 나를 부르시고, 수많은 목사의 설교 중, 지금 이 말씀을 듣게” 하셨을까요?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 받아야 할 은혜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삶이 버거워도, 말씀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는다면, 항상 영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스티븐 코비는 “사람이 타인의 말을 들을 때, 다섯 가지 수준으로 듣는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무시하는 태도로, 상대방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 좋지 않은 태도”입니다. 둘째는 “맞장구를 치며 듣는 체하는 태도로, 듣기는 듣지만, 전혀 말씀이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셋째는 “선택적 청취로, 상대방의 말 중에 내가 원하는 것, 내게 이익이 되는 것만 듣는 것”입니다. 넷째는 “신중한 경청으로, 타인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주의 깊게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티븐 코비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그 사람의 관점에서, 내가 그 사람이 된 것처럼 듣는 공감적 경청을 강력하게 도전”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은 내가 하나님 말씀을 어떤 태도로 듣기” 원하실까요? 안타깝게도, “많은 분이 말씀을 무시하는 태도로 듣기에, 교회 문만 나서면 받은 말씀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설교 중에 “아멘으로 화답하지만, 말씀을 내 기준과 생각대로 선택하고 골라서 받아들이기에, 내 삶이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다를 수 있지만, 주시는 모든 말씀을 나를 위해 주심을 믿으며 들을 때, 은혜가 더 크지!” 않을까요? 부족해도 “주시는 메시지마다 하나님 말씀으로 듣는 영혼은 절대로 실족하거나 넘어질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적어도 말씀을 듣는 짧은 시간이라도 내게 주시는 메시지로 받는 간절함과 사모함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간곡한 부탁, 말씀을 하나님 말씀을 들어서 날마다 승리하기” 원합니다.
2. 바울은 절대로 하나님과 반대편에 서지 말라고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본문 15~16절은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말씀합니다. 바울은 “당시 유대인이 예수와 선지자들, 주의 종을 박해했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보다 모든 사람의 대적이 되었고, 이방인의 구원을 막았다.” 말합니다. 마침내 “본문 16절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유대인에게 임하게 되었다!” 말씀합니다.
당시 “유대인은 이처럼 자신이 하나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과 정반대에 서서 살아가는 영혼이 참으로” 많습니다. 심지어 “하나님 편에 선 영혼보다, 하나님 반대편에 서 있는 자들의 목소리가 더 크기도”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과 무관한 이단의 열정이 얼마나 뜨거운지” 모릅니다. 특히 “이단은 그들의 교리를 철저하게 공부하지만, 기독교인은 성경공부에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이단은 “물질과 시간을 내서 전도하지만, 기독교인은 전도에 너무도 소극적이고” 비판적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인의 어정쩡하고 연약한 신앙이 과연 하나님 편에 서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18C “유명한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가 한 말이” 있습니다. “수 세기 동안 기독교가 일어났는데, 나는 50년 안에 기독교의 말살을 보여 주겠다!” 이로 인해 “볼테르는 수많은 무신론 책자와 하나님을 부인하는 글로 하나님과 반대편에” 섰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고 20년 후, 그의 집은 외국어 성경을 출판하는 본부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죄인을 살리고 있기에, 볼테르 작품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훗날 “볼테르가 남긴 말은 참으로 큰 영적 여운을” 줍니다. “나는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좋았다. 나는 이제 지옥으로 간다.” 우리 “주변에 은연중에 하나님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지만, 문제는 볼테르처럼 하나님과 극단적으로 반대편에 서는 사람도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세상의 불신자보다 교회 안에 있는 자칭 기독교인”입니다. 실제로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임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을 반대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말씀을 듣고 동의와 인정을 넘어서, 오히려 온전히 순종하고 신뢰하기” 원합니다.
비록 “진리를 거부하거나 반대하지 않았지만, 진리와 함께하지 않고 겉도는 것이, 나도 모르게 하나님과 반대편에 서는 것”입니다. 대하 36:15~16절은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의 사신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신들을 비웃고 그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의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그의 백성에게 미치게 하여 회복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말씀합니다.
선민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방 땅에 70년간 포로로 잡혀가서 비참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은 “너무도 명쾌하게, 이스라엘이 하나님 편이 아니라, 그 반대편에 섰기 때문이다!”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자주 오해하는 것이 있는데, 선민은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고, 오직 우상만 섬겨서, 이처럼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민은 하나님을 섬겼지만, 때로 우상도 섬기며, 전형적인 양다리 신앙을 가졌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는 “오늘 우리의 모습과 너무도 유사”합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다며, 많은 분이 물질과 명예, 권력과 성공을 더 신봉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신학적으로 가장 경계하는 종교 다원주의,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주장도 세속적 학문이 아니라, 주의 종을 길러내는 신학교에서 나온 영적인 이단”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신학자, 하나님에 관하여 연구하는 학자조차 하나님만 믿는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삶에서 하나님이 최우선이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최우선이 아닐 때가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모습과 패망한 선민의 모습 중, 과연 무엇이 얼마나” 다를까요? 하나님은 “오늘도 성령을 통해서, ‘연약한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 최우선 신앙, 하나님만 섬기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라!’ 간곡하게” 부탁하십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도 신앙은 우상숭배로 갈 수 있지만, 하나님만 신앙은 구원을 선물로” 받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반대편에 서지 말고 하나님 편에 서라! 하나님도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만 믿는 신앙으로 살아가라!’ 바울의 간곡한 부탁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족해도 “우리가 지금부터라도 하나님도 믿는 신앙을 버리고, 다시 우리 마음을 정립해서 하나님만 믿는 신앙을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삶이 바울의 간곡한 부탁처럼 날마다 한결같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