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07 제작진이 다니엘 크레이그에게 캐스팅 제안을” 했습니다. 당시 “크레이그는 ‘작은 악역이겠지!’ 생각했지만, 제작진은 그를 여섯 번째 007로” 선택했습니다. 특히 “언론은 다니엘 크레이그가 금발이고 경력이 많지 않다고” 혹평했습니다. 그러나 “크레이그는 15년간 다섯 편의 007을 연기하며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어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15년 동안 007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나는 본드였고, 본드가 나였다.”

크레이그는 “배우로서 007 캐스팅 후, 그 역할에 맞게 살려고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복음을 영접했다면, 이에 걸맞게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무엇이 되었다는 것을 넘어, 무엇이 됨에 걸맞게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실례로 “목사가 되는 것보다 목사다운 삶, 장로가 되는 것보다 장로다운 삶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유는 “복음을 영접한 인생은, 과거 불신자 시절과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방 교회들이 “본문 9~10절에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복음을 영접한 과정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과거에 섬기던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된 과정, 주님의 재림을 얼마나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는지,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든 변화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데살로니가 교회가 복음을 영접한 이후! 복음을 영접한 교회답게 바뀌어서 주변 곳곳에 선한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을 “영접한 삶은 주변 사람은 물론 궁극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나의 변화된 모습을 인정하고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복음을 “영접한 삶은 절대로 과거와 같을 수 없고, 주변에 미치는 영향력의 성격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삶이 과거와 똑같다면, 내가 영접한 복음이 맞는지! 깊이 자문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이전과 달라지지 않고 똑같다면, 한 소망 교회가 붙잡고 있는 복음이 맞는지, 확인해야 하지!” 않겠어요? 분명한 것은 “복음은 능력과 생명이 있어서 변화시키고, 죽음을 영생으로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나의 주로 영접하고, 생명의 말씀을 영접한 나의 삶이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 살펴봅시다.

1. 우리가 복음을 영접했기에, 주변 모두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본문 7절은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마케도니아와 아가야는 발칸 반도 주변으로, 당시 헬라 전역을 말하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헬라 전역에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일부가 아닌 모두에게,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 말했습니다. 심지어 “본문 8절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말씀한 정도”였습니다.

당시 “바울은 고린도에 있었는데, 데살로니가 교회의 온전한 변화가 너무도 감동적이어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관해 따로 할 말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본이 되다. 튀폰은 진흙이나 밀랍에 찍어서 어떤 형상을 똑같이 만드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마치 그대로 찍힌 형상처럼 데살로니가 교회에 똑같이 남았고, 그 능력이 곳곳에 전파되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문제는 정말 본받고 싶고, 모범이 되는 신앙이 점점 줄어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기독교와 성직자, 또한 교회과 기독교인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교회가 세상을 위해 기도했지만, 이제는 세상이 교회를 기도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유는 “교회와 기독교인이 복음을 영접한 삶답게 살지 못해서, 마침내 세상이 교회를 점점 더 멀리하고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불행히도 “많은 목회자도 교인에게 ‘나처럼 믿어!’ 말하기 어렵고, 영적인 선배가 후배에게 ‘나처럼 봉사해, 헌신해!’ 말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믿음의 후배가 ‘나도 저렇게 믿어야지!’ 보다 ‘나는 저렇게 안 해!’가 더” 많습니다. 가정에서도 “많은 부모가 자녀에게 ‘나처럼 살아라!’ 보다 ‘나처럼 살면 안 된다!’ 말할 때가 더” 많습니다.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가 자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도 본보기, 둘째도 본보기, 셋째도 본보기!” 실제로 “언행 불일치 부모의 잔소리는 자녀에게 해악이 되고,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잔소리보다, 부모의 등 뒤에서 부모의 삶을 보고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모두에게 나와 똑같이 행하라고 말하도록 행동하라!” 말했습니다. 이처럼 “내 삶이 본이 될 수 있다면, 그 영향력은 달라질 것”입니다. 이처럼 “본이 되어 살아가려면, 우리가 버릴 것을 버리고, 취할 것을 취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본문 9절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 말씀합니다. 처음부터 “데살로니가 교회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역에서 본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극심하게 반대했고 너무도 폭력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는 숭배하던 우상을 철저히 버렸고, 참되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거짓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버릴 것 버리고, 취할 것을 취했기에, 데살로니가 교회는 복음을 영접한 교회답게 모두에게 본이 되었던 것”입니다. 고전 11:1절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말씀합니다. 과거 “바울은 복음의 훼방자요 핍박자였고, 죄인 중 괴수”였습니다. 만일 “바울이 바리새인 전통과 주께 받은 은혜를 함께 붙잡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일 “바울이 과거의 악행을 그대로 유지했다면” 어땠을까요?

만일 “바울이 과거처럼 악했다면, 어떻게 13개의 서신서를 쓸 수” 있었겠어요? 그러나 “바울이 버릴 것을 버리고, 정말 취할 것을 취했기에, 이처럼 자신 있게 복음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바울이 주님을 온전하게 영접함에서 모두에게 본이 되는 삶이 시작되었고, 바울 본인도 주를 영접한 신앙을 더 굳건히 지켜나갈 수” 있었습니다. 본이 “되는 신앙은 그냥 시간이 지난다고 되지 않고, 내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거듭나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자녀와 가족에게, 누군가에게 본이 되지 못했다면, 과연 어떤 모습이 문제였는지를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 께름칙하고 불편한 것이 있다면, 이것부터 버리고, 그 자리에 다시 은혜와 복음을 채워가야!” 합니다. 그럴 때 “내가 복음을 영접한 은혜가 더 깊어지고, 굳건하여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부족해도 “우리가 항상 주님의 은혜 안에서, 본이 되는 삶을 살아서 복음을 영접한 신앙을 지켜나가기를” 소원합니다.

2. 우리가 복음을 영접했기에, 선한 소문이 내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8절은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말씀합니다. 특별히 “여기서 한국어로 번역된 소문이란 단어는 원어에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의 그 믿음이 모든 장소에 퍼졌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핵심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과 삶이 헬라 곳곳에 선한 소문으로 퍼졌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보여준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이내가 곳곳에 아름다운 소문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현대인은 “소문에 굉장히 예민해서, 어느 가게에서 물건을 싸게 판다고 하면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그곳으로 사람이” 몰려듭니다. 어떤 “식당의 음식이 맛있다고 소문나면, 모두가 그 식당을 찾지만, 맛이 없다고 소문나면 문을 닫을 정도로”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소문이 중요하고 무서운데, 이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어떤 교회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외면합니다. 한 마디로 “소문이 잘 나면, 그 교회는 부흥하고, 반대로 나쁜 소문이 퍼지면 부흥과 성장은 점점” 멀어집니다. 문제는 “오늘날 세상은 교회와 기독교를 선하게 보지 않고, 신뢰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경우 “전도의 문이 점점 막혀가고 있고, 교회 이야기만 꺼내면 이상하게 된다! 하소연이” 깊습니다. 이유는 “교회에 관한 나쁜 소문의 악영향 때문”입니다.

특히 “팬더믹을 겪으며, 한국 교회는 좋은 소문보다 나쁜 소문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제대로 모르면서, ‘교회는 이렇다더라! 기독교인은 원래 그렇다더라!’ 소문과 고정관념이 나쁘게 퍼져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한 소망 교회에 관한 소문은 어떤지, 세상이 우리 교회를 뭐라고” 할까요? 많은 분이 “회복되었다, 좋아졌다, 말하지만, 나쁜 소문이 여전히 있고, 불행히도 나쁜 소문이 역전되기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한 소문과 나쁜 소문은 모두, 이에 상응하는 원인과 이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와 기독교인이 복음을 영접한 사람답게 말하고, 매사에 신실하게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나쁜 소문이 좋은 소문으로 바뀌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바뀌지 않으니까, 매번 예전처럼 살아가니까, 나쁜 소문이 더 굳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선한 소문을 만들어가려면, 우리가 매사에 영적으로 패하지 말고, 승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어쩌면 “바울도 완악했던 데살로니가 교회가 선한 소문 내는 교회가 될 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는 복음을 영접하고, 치열한 영적 싸움을 통해 과거의 우상 숭배를 극복했고, 지금은 좋은 소문을 가진 교회로” 바뀌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비록 이 땅에 있었지만, 오히려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주, 재림의 주님을 바라보며, 심판에서 건지실 예수의 능력으로 과거의 영적 피폐함과 악행, 완악함을 믿음으로” 이겨냈습니다.

이처럼 “치열한 영적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고 말씀과 믿음으로 이겨냈기에, 데살로니가 교회는 좋은 소문을 내며, 복음을 영접한 은혜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죄인인 “인간이 복음을 영접함도 귀하지만, 더 귀한 것은 영접한 복음을 잃지 않고 잘 지켜야!” 합니다. 믿음은 “새롭게 얻음보다, 잃지 않고 수성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문제는 복음을 들었지만, 매일 반복되는 영적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패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언제나 악에 패하지 말아야 하고, 복음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왕상 4:34절은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으니 이는 그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들이 보낸 자들이더라.” 말씀합니다. 솔로몬이 “등극하기까지, 이복형제 아도니야의 반역이 있었고, 그 외에도 쉽지 않은 고난이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아도니야 반역 때, 다윗의 군대 장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이 합세하여 그 어려움이 더” 컸습니다.

솔로몬은 “이를 극복해야 했고, 왕이 된 후에도 수많은 고난과 역경에 굴하지 않고, 모든 아픔을 이겨냈기에, 성전을 건축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지혜로운 왕, 가장 부유한 왕,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큰 왕으로, 좋은 소문이 퍼져” 나갔습니다. 주님은 “요 16:33절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주님께서 세상의 악을 이겼기에,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도 악을 이겨내라!” 도전합니다.

우리가 “데살로니가 교회와 솔로몬처럼 우리 주님을 붙들고 악을 이겨 나갈 때, 선하고 복된 소문이 더 퍼져 나갈 것”입니다. 여전히 “뉴저지와 미국은 팬더믹으로 인한 어려움이 줄어들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더더욱 영적으로 깨어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 각자와 한소망 교회가 선으로 악을 이기며, 복음을 영접한 기독교인답게 살아서 좋은 소문을 내며 승리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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