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크록 맥도날드는 종이컵 행상으로 돈을 벌어서 시카고에서 작은 햄버거 가게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맥도날드는 크록의 열정으로 120여 개국 35,000여 개 매장을 가진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크록의 경영철학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맥도날드의 사훈은 열정과 경험이다. 맥도날드 사원에게 필요한 것은 박사 학위가 아니라 열정이다. 음식을 직접 만들어 보고 배달한 사람만 회사의 중역이 될 수 있다.”

크록은 “성공을 이루면서, 사업 경험이 깊어지면서, 사람에게 능력과 전문지식보다 열정이 훨씬 더 중요함을 깊이 체험했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열정이 있다는 것은 아직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음을” 뜻합니다. 실제로 “열정이 있는 사람과 열정이 없는 사람이 이 땅을 살아가는 방식이 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 부족해도 “열정이 있으면, 사람은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자신감이 있고, 항상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영혼은, 누구나 열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 백성답게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려면, 다른 무엇보다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실례로 “성경에 등장하는 영적 거장을 보면, 모두가 열정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죽을 위기가 너무도 많았지만, 복음을 들고 땅끝을 향하는 열정으로” 헌신했습니다. 모세도 “타락한 선민을 살리려고 ‘생명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달라!’ 청할 정도로 열정적”이었습니다.

주님도 “새벽부터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고, 사역 중 먹을 시간과 쉴 겨를도 없이 유대 곳곳을 누비며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과 영적 거장들의 열정으로 인해, 오늘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열정으로 구원받은 우리가, 꼭 필요한 열정을 잃어버리고, 열정이 식은 채 살아갈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오네시모는 “도망친 노예로, 그 삶이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네시모가 도망 노예였지만, 어떻게 해서든 살려내려는 열정이 참으로” 컸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열정이 빌레몬에게 전달되어, 빌레몬서를 통한 생명의 역사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게 이익이 되는 일에는 열정이 크지만, 하나님 기뻐하는 열정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백성다운 열정이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회복할지!” 살펴봅시다.

1. 하나님 백성인 우리에게 항상 세우고 살리려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몬 1:18절은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말씀합니다. 이는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피해를 주었다면, 바울이 직접 갚겠다는 고백”입니다. 당시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오네시모가 끼친 손해보다, 오네시모를 반드시 살리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에 “본문 19절은,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말씀합니다.

신약에서 “바울이 쓴 13개 서신서 중, 로마서는 더디오가 대필했고, 그 외, 고린도 전후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바울이 직접” 썼습니다. 특히 “바울은 빌레몬서를 직접 쓰며, 오네시모를 살리려는 열정을 곳곳에 잘”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오네시모를 살리기 위해, 절대로 형식적으로 빌레몬서를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진심으로, 열정을 다해서, 빌레몬의 마음을 움직여서 오네시모를 살리려고, 펜을 들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열정이 자기 자신보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집중되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바울과 우리 각자가 성자 하나님의 열정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추구하는 열정이 너무도 다름을 절감하게” 됩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열정으로 구원받았지만, 우리는 누군가를 살리려는 열정이 너무도” 부족합니다.

분명히 “한 영혼을 살릴 수 있지만, 귀찮은 마음이 크고, 바쁘고 분주하다고, 누군가 하겠지! 변명과 핑계가 참으로” 많습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례로 “오늘도 여전히 많은 영혼이 교회를 찾지만, 오히려 교회와 교인 수가 점점” 줄어갑니다. 이처럼 “교회와 성도들이 줄어감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누군가를 살리고 세우려는 열정이 점점 줄어가는 것”입니다.

새 가족이 “오면 ‘새 가족부 일이야! 목사가 챙겨야지!’ 말하고” 무관심합니다. 그러나 “내가 조금만 사랑과 관심, 열정을 가지면, 충분히 한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의 문제는 살리고 세울 영혼이 분명히 있지만, 이를 살리고 세우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눅 15장은 “세 가지 비유 잃어버린 양과 동전, 아들의 비유를 한꺼번에” 소개합니다. 주님은 “세 가지 유사한 비유를 통해, 한 명의 영혼이 천하보다 귀함을” 강조하셨습니다.

특히 “유대인이 같은 내용이나 표현을 세 번 반복함은 최상급 표현으로, 꼭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이를 보면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열정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아니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문제는 “죽어가는 영혼, 복음이 필요한 영혼을 살리는 것은 쉽게 말로만 되지!” 않습니다.

마귀가 “누군가를 살리려 할 때,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서 막아” 섭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살리려면, 마귀보다 더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마귀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두 번 시도해 보고, 너무 쉽게 포기하고,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과 핑계가 참으로” 많습니다. 셔우드 홀이 “쓴 책, 조선 회상을 보면, 셔우드 홀의 아버지 제임스 홀은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했지만, 안타깝게도, 환자를 치료하다가 전염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이에 “아들 셔우드 홀이 아버지를 이어 조선을 살리고 세우려는 열정으로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특히 “어린이들이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어린이 병원을 설립했고, 부인병을 치료하려고, 이제는 사라지고 없지만, 동대문 이대 병원도” 세웠습니다. 셔우드 홀은 “아버지 제임스 홀과 동역한 어머니의 열정도 이렇게” 소개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사랑하심처럼 조선 사람들도 사랑함을 깨달았을 때, 나도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이 좋은 소식을 말하고 싶은 열망에 불타게 되었다.” 이처럼 “수많은 영혼을 살리려는 열정을 통하여, 지금 내가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바로 나부터 주변 영혼을 살리고 세우는 열정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훗날 “하나님께서 ‘네게 준 생명과 은혜로 평생 몇 명을 살렸니?’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겠어요?

단 12:3절은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말씀합니다. 영혼 구원은 “나의 작은 말 한마디, 중보기도, 관심과 사랑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문제는 “내 능력보다, 내가 정말 누군가를 살리려는 열정이 있는가, 이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변에 있는 영혼을 살리고 세워가는 열정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착하고 충성 된 종아!’ 칭찬 듣기” 원합니다.

2. 하나님 백성인 우리에게 한 번 더! 조금 더 수고하려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뜨거운 열정으로 빌레몬서를 썼지만, 본문 21절에서,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바울은 “빌레몬이 자신이 부탁한 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더 큰 관심으로 오네시모를 영접해줄 것을” 믿었습니다. 이처럼 “빌레몬은 바울이 요청한 것보다 더욱 마음을 쓰고, 말씀대로 조금 더 순종하여, 오네시모를 살려내고, 큰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영접할지 여부는 바울의 전 사역에서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도망 노예 오네시모가 정착하도록, 상식보다 더 많이” 수고했습니다. 본문에서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이처럼 고백할 정도로 매사에 한 번 더 수고했던 것”입니다. 당시 “바울은 누군가에게 부탁하여 간접적으로 오네시모를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직접 펜을 들어 오네시모를 살리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 스승이 제자를 대할 때, 일반적인 상식과 선을 넘은 엄청난 열정”이었습니다. 이처럼 “바울과 빌레몬이 한 번 더 수고하고, 조금 더 헌신하는 열정이 많은 열매를 맺도록” 이끌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붙들어야 할 도전은, 열정은 여기까지 했으니 다 했어! 이보다, 내 생각과 상식보다 한 번 더 수고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 정도면 되었다 생각해도, 나는 한 번 더 신경 쓰고, 마음을 써서 한 번 더 헌신하는 것이 열정”입니다. 산상수훈의 “교훈처럼, 오리를 가자면 십 리를 가고, 속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주는 것이 열정”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누군가의 큰 열정으로 구원받았지만, 오리는 고사하고, 작은 옷조차 나누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리를 가고, 겉옷을 벗어주는 영혼을 비상식적이라고, 이상한 사람으로 거부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지금 내가 행하는 일에서 한 번 더 수고하는 것이 시간은 물론 물질적으로 부담되고 번거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들어도, 한 번 더 열정을 가지고 수고해서 한 영혼이 살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내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 이는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성경에서 “다윗과 요나단은 가장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둘의 나이 차이가 적게는 20년 많게는 25년이” 넘었습니다.

게다가 “한 명은 차기 대권 주자였고, 한 명은 왕에게 미움을 받고, 그저 평범한 목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둘은 요나단이 항상 다윗을 위하여 한 번 더 수고하는 열정 때문에” 친해졌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할 때, 요나단은 이를 외면하지 않고, 언제나 한결같이 한 번 더 수고해서, 다윗에게 아버지의 계획을 알려 주어서, 다윗을” 살렸습니다. 그래서 “훗날 다윗은 사울이 아닌 요나단 때문에, 그 아들 므비보셋을 사랑으로” 품었습니다.

우리가 “조금 더, 한 번 더 수고함은 그만큼 상대방을 깊이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한 번 더 “수고함은 나와 주변 모두를 아름답고 푸근하게 만들어” 줍니다. 한 번 더 “수고함은 실수를 줄이고, 어떤 일을 행할 때 더 나은 결과로 이끌어” 갑니다. 이에 “기독교인은 항상 주어진 일과 모든 사람에게 한 번 더 수고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이유는 “이 땅에 오신 주님도, 인간의 악함을 알고도 한 번 더, 조금 더 수고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색해서 나와 다르다고, 내 기준대로 ‘여기까지, 그뿐이야!’ 단정 지을 때가 더” 많습니다. “나는 할 만큼 했어! 문제는 내가 아니라 저 사람이야! 나와 상관없어!” 실제로 “내가 누군가를 향해 조금 더 수고하지 않으면, 내가 어렵고 힘들 때,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한 번 더 수고하려 하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카고에서 “부목사로 사역할 때, 선배 목사의 작은 배려에 큰 은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항상 끈 없는 구두를 샀는데, 이유는 나름대로 교인을 한 번 더 생각하는 배려 때문”이었습니다. 추운 “시카고에서, 목사가 심방 후 현관 밖에서 끈을 묶으면, 배웅하는 교인이 이를 기다리다가 감기에 걸릴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외적으로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한 번 더 수고하고, 한 번 더 헌신함은 본인과 주변 모두에게 상상할 수 없는 큰 은혜를” 줍니다. 생각해 보면, “한 번 더 수고한다고 내가 큰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한 번 더 수고하려는 열정이 있고 없고 인데, 하나님은 한 번 더 수고하는 열정을 가진 영혼에게 하늘의 복을 더하실 줄” 믿습니다. 항상 “한 번 더 수고하는 열정으로 주변 사람을 더 살리고 세워가는 승리가 있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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