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타의 한 대학에서 대인관계와 건강의 상관관계를 연구하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핵심은 “건강하게 살려면, 금연이나 살을 빼는 것만큼 인간관계를 잘 맺어라!” 조언합니다. 연구진은 “약 30만 명에게 148개 항목을 묻고 얻은 답을 통해, 대인관계가 좋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사망률이 무려 50%가 낮았다.” 주장합니다. 또한 “대인관계가 안 좋은 사람은 하루에 15개비 담배를 태우는 것처럼,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 말합니다.

심지어 “좋지 않은 인간관계는 알코올 중독, 운동 없는 삶, 비만보다 더 나쁘다고” 합니다. 연구진은 “현대인에게 Well-Being, 건강하게 잘 사는 것이 최고 가치가 되었는데, 그 기초가 인간관계에 있다!” 강조합니다. 현대사회는 “인터넷과 SNS를 통해 인간관계가 넓어지고 다양해졌지만, 그 깊이는 점점 얕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고, 아는 사람은 많지만, 진심으로 마음을 나눌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도 지인에게 전화하고 싶지만, 그 사람이 바쁘고 불편할까 봐 전화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찾아가서 “만나고 싶은데, 환영받기보다 어색할 것 같아서 주저하기도” 합니다. 특히 “이민자인 우리는 각자 먹고살기 바쁘고, 가족 중심으로 살아가기에, 더욱 깊고 신실한 인간관계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기독교인답게 살아가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맺어야 함이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가 많은 영혼을 살리고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 보고합니다. 특히 “행전 2:46절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이처럼 “초대교회가 든든했던 이유는, 내외적으로, 수직적 수평적으로 아름다운 관계를 맺으며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문제는 “이처럼 아름다운 관계는 인간적인 노력으로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하나님만 인간을 서로 하나 되도록, 아름다운 관계를 맺도록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빌레몬서를 “읽을수록, 바울과 빌레몬 관계가 정말 깊고 아름다웠음을 알게” 됩니다. 얼마나 “관계가 깊고 아름다운지, 도망친 노예를 돌려보내고, 처소를 예비해 달라고 자연스럽게 청할 정도”였습니다.

얼마나 “그 관계가 깊고 아름다웠던지, 바울은 빌레몬 가족들 이름까지 일일이 알았고, 그 가족들을 거명하며 안부를 묻고 중보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팬더믹을 지혜롭게 통과하려면, 한소망 교회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되려면, 반드시 신실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맺어가야!” 합니다. 본문의 “바울과 빌레몬의 관계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변의 동역자와 아름답고 신실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을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우리가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맺으려면, 항상 주변 사람을 위하여 중보 해야 합니다.

본문 4절은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말씀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며, 자신이 빌레몬과 그 가정을 위해 중보 하되 항상 기도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여기서 “항상, 원어 판토데는 ‘언제나, 끊임없이!’라는 의미”입니다. 옥중에서 “바울은 그저 생각날 때만 빌레몬을 위해 기도하거나, 어쩌다 한 번씩 기도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항상 끊임없이 빌레몬과 그 가정과 동역자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나아가서 “바울은 빌레몬을 위하여 감사함으로 기도한다!” 고백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중보기도 할 때, 내가 타인의 아픔과 어려움을 대신하여 눈물 흘리고 아파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누군가는 감사와 기쁨으로, 뿌듯함과 은혜로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중보기도에 기쁨과 감사가 더” 있을까요?

이처럼 “중보기도는 누군가를 위해 잠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마음에 품고 간절히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는 힘들고 어려운 분을 말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과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이처럼 “우리가 서로를 위해 진심으로 중보기도 할 수 있다면, 그 관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깊어지겠어요?

이민자인 “우리가 차를 운전하면서 기도하고, 잠들기 전에 잠깐 드리는 기도는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엎드려 간절함으로, 뜨겁게, 집중해서, 누군가를 위해 눈물로 드리는 기도는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타인을 위해 간절함과 열정으로 중보기도 하는 것은 중 노동처럼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든 중보기도가 넓어지며 깊어지고, 뜨거울수록 나는 물론 내 기도의 대상까지 모두를 살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인 “우리가 타인을 돕고 세우는 방법이 참으로” 많습니다. 실례로 “물질로 도울 수 있고, 필요한 사람을 소개해주고, 부족함을 채워주고, 함께 식사하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어려움을 들어주고, 함께 아파하고 눈물 흘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인을 가장 힘있게 돕고 세우는 방법은, 타인의 문제를 내 문제로 알고, 중보기도로 돕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녀와 배우자, 가족을 위한 최고의 사랑은 눈물과 간절함으로 드리는 중보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은 몇 명을 위해 중보기도하고” 있습니까? 나의 “영적 지경은 믿은 연륜과 직분보다, 얼마나 많은 영혼을 위해 중보기도 하는가에” 있습니다. 중보기도는 “오해로 멀어지고 끊어진 관계를 다시 하나로 이어” 줍니다. 특히 “관계가 깨지고 나를 힘들게 하고, 안 보고 싶은 영혼일수록 더 중보기도 해야!” 합니다.

이유는 “싫고 미웠지만, 중보기도 중, 성령께서 그 영혼을 이해하게 하시고, 미움보다 사랑하는 마음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중직자라면, 내 중보기도 목록에 최소한 10명은 있어야!” 합니다. 주변의 “영혼들을 위해 항상 간절함으로 하나님께 중보 할 때, 인간관계는 참으로 아름다워지고 깊어질 것”입니다. 이에 “중보기도는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고, 문제를 해결하고, 교회를 바로 세워가는 능력과 힘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1993년! “워싱턴 DC는 한 해에 무려 454명이 살해될 정도로 상황이” 나빴습니다. 그런데 “불과 6년 만에, 워싱턴 DC의 살인사건이 50%, 강도는 70%, 강간은 40%가” 줄었습니다. 이유는 “6년간, 약 6,000명이 미국과 워싱턴 DC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고, 의회의 기독교인들도 마음을 다해 중보기도에 동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중보기도가 능력이 있기에, 우리는 아름다운 관계를 위해 반드시 중보기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나를 위해 기도해야 하지만, 배우자와 자녀, 가족과 주변 지인을 위한 중보기도도 꼭 필요”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중보기도 할 때,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직접 들으시고 개입하시고 응답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중보기도를 통해 얼마든지 아름다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고,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우리가 누구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누구를 내 중보기도에 더해야 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중보기도가 “어렵지만, 중보기도는 내 삶과 인간관계, 하나님과 관계를 많이 바꾸어갈 것”입니다. 비록 “힘들고 버거운 이민 생활이지만, 중보기도의 능력을 알고, 실제로 중보기도 하면서 아름다운 관계를 맺어가기” 원합니다.

2. 교회로서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맺으려면,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5절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말씀합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지, 5절 한 절의 말씀에서 잘 설명해” 줍니다. 빌레몬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또한 “빌레몬은 골로새 지역 리더로, 주변 모든 성도에게 사랑과 믿음으로 헌신하며” 섬겼습니다. 특히 “여기서 들었다. 아쿠오는 ‘들려 오다. 소문이 나다.’라는 의미”입니다.

비록 “짧은 한 절의 말씀이지만, 빌레몬의 신앙생활이 참으로 신실했고, 그 신앙이 곳곳에 두루 선하게 퍼져나갔음을” 말씀합니다. 이처럼 “빌레몬은 당시 주변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받는 일꾼”이었습니다. 게다가 “살아계신 하나님도 인정하실 정도로 빌레몬은 신실해서, 항상 아름다운 관계를 맺으며” 살았습니다. 교회는 “물론 기독교인 각자도, 세상과 불신자들에게 아름답고 좋은 소문이 나고, 인정을 받으며 살아가야 당연하지!” 않겠어요?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교회에 관하여 다양한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서로 섬기며 예배드렸고, 말씀을 전하는 선교, 말씀을 가르치고 사람을 세워가는 교육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모두에게 인정받아서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인정받으려면, 교회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제가 “한 소망 교회에 부임해서, 몇 주간 전했던 비전에 관한 설교가” 있었습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Spiritual Service, 친밀한 섬김과 교제, Intimate Fellowship, 복음을 전하는 선교 God’s Mission, 성도와 2세를 양육하는 Nurturing 2nd Generation!” 우리가 “이처럼 신실한 예배와 교제, 선교와 양육이 있다면, 당연히 세상에서 인정받지!” 않겠어요? 특히 “교회와 우리 각자부터 이처럼 예배드리고, 교제하며 선교하고, 양육하는 삶에 힘쓸 때, 세상에서 인정받고, 날마다 아름다운 관계를 맺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가 세상에서 인정받으려고 예산을 들이고, 노동력을 동원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이 세상에서 인정받는다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교회도 인정받는 것”입니다. 당연히 “전도의 문이 열릴 것이고, 많은 영혼이 찾아올 것이고, 더 힘 있게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부족해도, 나 하나라도, 나부터 세상에서 교회와 주변 사람에게 얼마나 인정받는가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주변 사람에게 인정받는 삶은 내 힘으로, 나아가서 내 의도와 계획대로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현실을 보면, 많은 신앙인과 교회가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상식도 못 지키고, 세상이 아니라고 하는데 고집과 독선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신 5:11절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 말씀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있다.” 경고합니다. 반면에 “우리가 작지만 신실한 교회로 살아간다면, 악한 세상은 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겠지만,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은 매우 기뻐하실 것”입니다. 자공이 “공자에게 ‘어떤 사람이 선하죠? 모두가 선하다 하면 정말 선한 것인가요?'” 물었습니다.

이에 “공자는, 아니다. 진짜 선한 사람은 선한 사람에게 선한 평가를 얻고, 악한 사람에게는 악하다는 말을 들어야 한다!” 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선하고 신실한 사람, 아름다운 관계를 맺어가는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요? 하나님께서 “선하다고 말씀하는 사람, 그러나 마귀는 나쁘다는 말을 해야 진짜 인정받는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목사로서 “가장 큰 기쁨과 보람은 교인이 세상 곳곳에서 인정받고, 영향력 있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독생자 주님을 주시면서까지 살린 주의 백성이, 세상 곳곳에서, 누구와 무엇을 해도 선하고 신실하다 인정받는다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실제로 “한 번뿐인 인생이 주변에 해를 끼치고, 욕먹고, 무기력하게 살아간다면,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팬더믹을 “지나며, 하루하루 버거운 이민자로 살아가고 있지만, 힘들고 어렵지만, 그래도 하나님 앞과 세상에서 신실함으로, 하나님 백성답게 인정받으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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