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04년, 칠레와 아르헨티나 간 국경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두 국가는 해발 3,832m 높이의 우스파야타 산에 예수 동상을 세웠는데, 세워진 예수 동상이 칠레를 등지고, 아르헨티나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축복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에 “칠레 국민은 ‘왜 예수 동상이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아르헨티나만 축복하냐?’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칠레의 어떤 기자가 쓴 글로 인해 두 국가의 분쟁을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얼굴이 아르헨티나를 향한 것은 아르헨티나가 칠레보다 더 예수의 보살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칠레 “국민은 이 기사를 보고 ‘그렇다면 뭐!’ 생각하고 감정을 가라앉히고 더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과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관점과 시각에 따라 큰 혼란이 생길 수도 있고, 평안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교회란 단어 역시 그 정의와 해석에 따라서,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교회는 “어떤 건물과 제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의 모임, 우리 각자가 작은 교회가” 됩니다. 특히 “바울은 고전 1:2절에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말합니다. 이처럼 “교회는 사람을 뜻하고, 우리 각자가 참된 교회가 되어야 하나님 교회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타락했다는 말은 건물이 낡았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이 타락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작지만 신실한 교회가 되려면, 기독교인인 나부터 먼저 신실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새롭게 팬더믹 후, 교회가 교회답게 바로 서려면, 우리 각자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빌레몬서는 “바울이 1차 로마 투옥 때, 골로새 교회 리더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만나서 양육한 후, 다시 주인 빌레몬에게 보내는 내용”입니다. 생각할수록 “노예였던 오네시모가 세상에 빠지지 않고, 바울을 만나 복음으로 작은 교회가 된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빌레몬서는 “비록 한 장의 짧은 내용이지만, 그 안에는 ‘작은 교회인 우리가 품어야 할 성도의 마음가짐, 작은 교회인 우리 각자가 또 다른 작은 교회인 주변의 동역자와 어떻게 합력하며 주의 나라 확장을 위해 헌신할지!’ 메시지가” 가득합니다. 또한 “작은 교회인 내가 어떻게 이 악한 세상에서 바르게 교회답게 살아갈지도” 교훈합니다. 다시 “재개된 수요예배 첫날, 본문을 통해 내가 작은 교회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1. 내가 작은 교회가 되려면, 내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이겨내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 1절에서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되었다!” 고백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총 세 번의 선교 사역을 마쳤는데, 매번 유대인은 바울이 율법을 어겼다고 공격해서, 마침내 감옥에 투옥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찾아오는 지인과 교제할 수 있었고, 자신을 지키는 군사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죄인이었기에, 로마를 떠나 타지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 “바울이 투옥된 이유는 그가 범죄 하고 악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의와 선을 위하여 헌신하고 수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기원후 약 61~63년경,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적지 않은 고난이 있었지만, 아픔과 억울함도 있었지만, 빌레몬서와 골로새서, 빌립보서와 에베소서, 옥중서신을 기술”했습니다.

부족해도 “내가 작은 교회이기에, 복음대로 살아가면 생각지 않은 고난을 겪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겪는 고난의 성격인데, 베드로는 벧전 3:17절에서,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말합니다. 작은 “교회인 우리는 고난을 받아도 악함보다 선을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지금도 “악한 세상은 신실하게 살려는 작은 교회인 우리를 어떻게든 박해하고 힘들게” 합니다.

특히 “딤후 3:12절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말씀합니다. 문제는 “세상이 교회와 신앙인을 조롱하는 이유는 교회가 교회답지 않고, 물질과 권력, 명예를 세상보다 더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우리가 작지만 거룩한 교회가 되려면, 세상의 박해와 공격으로 내가 고난받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에게 “고난은 신실함 때문에 받게 되는 어쩔 수 없는, 피치 못할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은, 죄와 악에 빠져서 정직하지 못하고 신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지난 “2014년 9월, GM은 불량 점화 스위치 문제로 다량의 리콜 사태를” 맞았습니다. 문제는 “리콜 사태는 2003년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 GM은 정직하게 대응하지 않고, 숨기고 회피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렇게 “10년이 지난 2014년, GM은 3,000만대 리콜로 무려 10억 달러를 내야!” 했습니다.

문제는 “우리 중 누가 과연 GM의 정직하지 못함을 자신 있게 비판할 수” 있겠어요?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은 신실하고 거룩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악한 세상과 너무 유사해서 고난을 받을 때가 더” 많습니다. 심지어 “세상과 다른 거룩함보다, 오히려 세상보다 더 악하게 살아서 고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작은 교회답게 신실하려면, 내 죄와 허물로 인한 고난을 받기보다, 오히려 예수로 인해 받는 고난을 체험하고 이겨내야!” 합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세상에서 겪는 고난이 컸는데, 베드로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박해를 받는 중, 천사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났습니다. 바울은 “고후 11장에서, 복음을 전하다 받은 고난 목록을 언급할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초대 교회 성도들은 복음 증거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스데반과 “야고보는 한참 힘있게 일해야 할 때, 허망하게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당한 고난은 자신의 죄와 허물, 정직하지 못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작은 교회답게 신실하려면 ‘과연 나는 예수 잘 믿다가 당한 고난이 있는지! 내 고난이 정말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 지금 내가 당한 고난에 억울하고 아픈 마음보다 기쁨과 감사함이 더 많은지!’ 진지하게 묻고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실하고 정직한 중에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표현임을 알아야!” 합니다. 한소망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허물과 죄로 인한 고난보다, 하나님을 위한 고난이 더 많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도 하나님을 위한 고난, 의와 선을 위한 고난에 굴하지 않고, 고난 중에도 더 정직하고 신실해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신실함과 정직함으로 당하는 고난을 믿음으로 이기고, 작은 교회로써 날마다 승리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2. 내가 작은 교회가 되려면 우리가 항상 주변 사람을 축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3절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말씀합니다. 바울은 “신약 27권 중 13권의 서신서를 신약에” 남겼습니다. 특별히 “바울 서신 대부분은 편지를 받는 대상과 교회를 축복하며 시작되는데, 바울의 축복은 습관적이고 형식적이기보다, 항상 진심과 정성이 가득한 축복이 더” 많았습니다. 특히 “본문 2절에서, 바울은 빌레몬과 함께 골로새 교회의 성도 중 몇 명의 이름을” 거론합니다.

압비아! “학자들은 이 여인을 빌레몬의 아내로,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들로” 말합니다. 그리고 “본문 2절에는 ‘네 집에 있는 교회’라는 독특한 표현이” 나옵니다. 이는 “당시 골로새 지역의 기독교인이 빌레몬의 집에 모여서 예배드렸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바울은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통해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이름으로 빌레몬 개인은 물론 그 가정과 그와 함께 동역하는 모두를 진심으로”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빌레몬과 그 동역자들 그리고 바울 중, 누가 누구를 더 축복해야 상식적으로” 맞을까요? 당시 “바울은 로마 감옥에 수감 중이어서, 어쩌면 자유로운 빌레몬과 그 동역자들이 바울을 축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깊은 하나님의 은혜로 빌레몬과 그 가정, 동역자들을 진심으로” 축복했습니다.

교회가 “교회 되려면, 우리가 작은 교회이기에, 무엇보다 서로서로 진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동역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에 능력이 있어서, 선민은 누구도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선민에게 하나님 이름으로 축복함은 가장 큰 축복이고, 진심이 가득한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작은 교회로 신실하려면, 내 주변 사람을 진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축복하려면 “심령에 상대방이 정말 잘 되기를 원하는 마음, 하나님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축복하려면 “진심으로 상대방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축복은 멀리 있고 무관한 사람보다, 오히려 가까운 사람을 먼저 축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이름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을 축복해야 함을 알지만, 현실은 타인을 향한 시기와 질투, 미움과 분쟁이 더 많아서, 진심으로 축복함과 점점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어는 “다른 어떤 언어보다 욕과 비판적인 표현이” 많습니다. 실제로 “과거 한국 욕을 보면 입에 담지 못할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빌어먹을 놈, 망할 놈, 염병할 놈, 육시랄 놈 등!” 여기서 “육시랄은 소나 말에 팔다리를 묶어서 사지를 여섯 조각으로 찢는 능지처참을” 말합니다. 이처럼 “험한 욕이 일상생활에 넘쳐났다면, 당연히 축복이 어색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쓰는 말, 내가 쓰는 말에는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눅 10:5-6절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말합니다. 이처럼 “말에는 힘과 능력이 있어서 어떻게든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하고, 넘어뜨리고 상처 주는 말보다, 더욱 축복의 말을 해야!” 합니다. 축복이 “타인을 살리고, 타인이 축복을 거부해도, 그 축복이 내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축복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그 능력과 힘이 땅에 떨어져 사라지지!” 않습니다. 스왈론 선교사는 “조선의 가정마다 있던 요강을 귀하고 비싼 밥그릇으로 착각”했답니다. 그래서 “한번은 일부러 곳곳에서 요강을 모아서, 요강에 쌀을 담아서 가정마다 축복하며” 전도했습니다. 당시 “어떤 남성도 스왈론이 요강에 주는 쌀을” 받았습니다. 생각할수록 “요강에 든 쌀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웠지만, 선교사의 축복에는 진심이” 가득했습니다.

훗날 “이 남성은 복음을 영접하고, 믿음의 가정을 이룬 후,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스왈론 선교사님이 요강에 주신 쌀은 저희 가정이 받은 축복의 시작이었다.” 한 소망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고, 내가 작은 교회가 되려면, 항상 우리 입술과 삶이 축복을 선포해야!” 합니다. 실례로 “우리가 타인을 축복하려면, 그 영혼의 장점을 먼저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타인의 단점과 문제점만 주목하는데, 어떻게 그 영혼을 축복할 수” 있겠어요?

부족해도 “내가 작은 교회로, 주변 동역자의 장점을 먼저 본다면, 내 옆에는 많은 동역자가 함께할 것”입니다. 반면에 “만일 내 주변에 사람은 물론 친구가 없다면, 외로움을 느낀다면, 어쩌면 내 입술에 타인을 향한 축복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축복은 나를 살리고, 상대방을 살리고, 내 후손과 모두를 살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를 축복하는 따뜻함이 우리 한 소망 교회 곳곳에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이전보다 더 따뜻해지고, 내가 더 신실한 교회로 날마다 승리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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