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청년이 저명한 교육학자인 존 듀이에게”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선생님께서 그토록 열심히 살아오시며 많은 업적을 이룬 비결이 무엇입니까?” 당시 “90세 노인이었던 존 듀이는 청년에게 이렇게” 답합니다. “산을 오르는 심정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지! 산을 하나 오르고 나면 매번 또 다른 산이 보였어! 그렇게 다른 산이 보일 때마다, 그 산을 계속 오르면서 여기까지 왔어! 젊은이! 만일 오를 산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인생은 끝이야!”

우리 “믿음은 하나의 점이 아니라, 수많은 점이 이어져서 선과 면을 이루며 확장되고 깊어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마치 “겨자씨 하나가 자라서 여러 짐승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하듯, 우리 믿음도 계속 이어지고 자라가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 믿음은 계속 이어지고 자라기보다, 좌우로 치우치고, 사소한 일로 시험과 상처에 빠질 때가 더” 많습니다. 마침내 “믿음이 끊어져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렇게 하나님은 물론 영생과 멀어지고” 맙니다.

당시 “선민은 에스라를 통해 율법을 배운 후, 계획에 없던 초막절을 신실하게” 지켰습니다. 특히 “우리는 본문 1절에서 ‘그달 24일’이란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새해 “첫 달 15~22일까지 초막절을 이미 잘 지켰지만, 연이어 24일부터, 누구도 흩어지지 않고 간절함으로 금식하고 회개하며, 다시 은혜로운 집회를 이어갔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민은 각자의 죄는 물론 조상의 죄까지 내려놓았고, 게다가 이방인과 맺은 부정한 관계까지 모두” 청산했습니다. 그렇게 “초막절을 지킨 후, 또다시 간절하고 뜨거운 은혜의 집회를 이어가면서, 선민과 하나님의 관계는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한결같이, 끊임없이 풍성한 은혜를 주시지만, 문제는 그 은혜 앞에 선 우리에게” 있습니다. 혹자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은혜를 받고 믿음을 이어가며, 영적으로 날마다” 자라갑니다.

반면에 “혹자는 말씀 앞에서 이런저런 핑계로 마음을 닫고, 원망과 불평으로 말씀에서 멀어지고, 있던 믿음마저” 잃어갑니다. 신앙생활은 “팬더믹의 아픔이 커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하루하루, 순간마다, 그래도 이어가는 것”입니다. 신실한 “신앙은 그래도 믿음을 이어가며 흔들리지 않지만, 연약한 믿음은 은혜받음이 끊어지고 이어짐이 반복되며” 흔들립니다. 한주도 “우리가 선물로 받은 믿음을 계속 이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살펴봅시다.

1. 우리가 버릴 것을 온전히 버려야 믿음이 이어질 수 있습니다.

본문 1~2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말씀합니다. 당시 “선민은 초막절 후, 연이어 집회를 열어서 금식했고,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릎 쓰고” 엎드렸습니다. 여기서 “굵은 베를 입고 티끌 앞에 선 것은 회개를 의미하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그렇게 “선민 모두가 이방인과 절교했고, 자기와 조상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과거 “선민의 문제는 어정쩡하게 버렸고, 이방인과 관계도 대충 맺으면서, 마침내 그 어려움이 계속 커져만” 갔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선민은 우상 숭배와 과거의 죄까지 모두 회개하며, 버릴 것을 철저하고 온전하게 모두 내려” 놓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죄를 내려놓을 때 쓰이는 단어 중, 자복과 회개를 많이” 혼동합니다. 자복은 “입술로 내 죄를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이고, 회개는 U-Turn처럼 완전히 다 버리고 새롭게 출발하는 것”입니다.

자복은 “입술로 죄를 인정하고서 다시 범죄 하지만, 회개는 온전히 죄를 버렸기에, 다시 죄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려면, 자복이 아닌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행전 3:19절은,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말씀합니다. 철저한 “회개로 온전히 버리지 않으면 절대로 새날은 물론 구원도 임할 수 없다는 도전”입니다.

주님의 “승천 후, 사도와 120명 성도가 약 10일간 집중하여 기도하면서, 성령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시 “사도와 성도가 어떻게, 무엇을 기도했기에, 최초로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했을까요? 만일 “이들이 형식적으로 자복했다면, 어정쩡하게 모여만 있었다면, 서로를 비판하고 욕했다면, 험담하고 불평했다면, 성령께서” 임했을까요? 분명한 것은 “이들은 진심으로 자신의 무능력과 불신을 눈물로 목이 쉬도록 기도하며 온전히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온전함으로 내면 깊은 죄를 모두 버렸기에, 성령께서 임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삶에 나를 비우는 온전한 회개가 점점 느슨해지고” 있습니다. 이유는 “내면에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 죄의식이 더 강하고, 교만한 자기 의로움이 크기 때문”입니다. 심중에 “‘그래도 내가 누구보다 낫지, 더 열심이야!’ 깊이 착각하는 것”입니다.

항상 “긍정보다 부정적 생각, 세워주기보다 비판하고, 자기는 하지 않으면서 모이면 험담하고 비판한다면, 그나마 있는 믿음을 어떻게” 이어가겠어요? 정말 “기쁘고 힘있게 신앙생활 하려면, 과거의 은혜를 다시 누리려면,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비움과 자복보다, 내 내면 깊이 있는 자존심과 고집, 자기 의로움, 하나님 기뻐하지 않는 것을 철저하게 비워야!” 합니다. 힘들어도 “나를 비울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더 가까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원주민이 원숭이를 사냥하는 독특한 방법이” 있습니다. 원주민은 “호리병 모양의 항아리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각종 과일과 음식을 잔뜩 넣어놓고, 원숭이를” 기다립니다. 얼마 후 “원숭이가 다가와서, 병에 있는 음식을 욕심껏 손으로 쥐지만, 병의 목이 좁아서 손이 빠지지” 않습니다. 원주민이 “다가와도 원숭이는 끝까지 음식을 쥔 손을 펴지 않고, 심지어 원주민에게 붙잡히는 순간까지도 음식에 대한 미련 때문에 손을 펴지” 않습니다.

그렇게 “원주민은 욕심으로 손을 움켜쥔 원숭이를 쉽게” 잡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 누가 손을 펴지 못하는 원숭이가 어리석다고 비판할 수” 있겠어요? 오늘 “우리는 누구보다, 내가 내려놓아야 할 것,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압니다. 어쩌면 “바로 지금, 성령께서 버리라고 하는 것, 그것부터 빨리 버리고 비워야!” 합니다. 바로 지금 “성령께서 내 마음에 버릴 것이 무엇인지 감동을 주는 이유는, 버려야 더 좋은 것을 얻기 때문”입니다.

양손에 “내가 원하는 세상과 구원을 다 붙잡고 신실한 믿음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버리면,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신령한 하늘의 복을 채우시고, 그렇게 채워진 하늘의 복이 내가 당하는 이 땅의 고난과 아픔을 이기게 하고, 더 나은 미래로 이끌어” 줍니다. 버림은 “하나님 은혜를 받겠다는 결단이기에, 항상 승리와 번영이” 있습니다. 한주도 “버릴 것을 온전히 버려서, 새롭게 채우시는 은혜로 힘있게 믿음을 이어가며 승리하기” 원합니다.

2.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러운 삶을 이어가야 믿음도 이어갈 수 있습니다.

본문 7~8절은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그의 마음이 충성 됨을 보시고” 말씀합니다. 선민은 “특히 아브라함의 은혜를 다시 묵상하며, 초막절 후에도 은혜를” 이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그 부르심에 충성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선민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충성을 이어오다가, 그것이 끊어지며 비참한 포로가” 되었습니다.

당시 “선민은 앞으로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이어가겠다는 결단으로 아브라함을 언급했던 것”입니다. 충성은 “가운데 중(中), 마음 심(心), 말씀 언(言) 이룰 성(成)의 합자”입니다. 이처럼 “충성은 가운데 마음, 진심으로 말하고 결심한 것을 끝까지 이어가며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성은 절대로 점처럼 한순간일 수 없고, 선처럼 계속 이어져야 열매와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계속 이어가야 할 충성이 점점 끊어져 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정말 끊어져야 할 미움과 다툼, 불화와 분쟁, 불평과 원망이 이어지며, 그나마 있던 믿음마저” 잃어갑니다. 그러나 “선물로 받은 구원과 영생, 믿음을 이어가려면, 은혜받고 결단했던 헌신과 충성을 다시 찾고, 이를 끝까지 이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일어난 사건과 그 사건을 기록한 시기가 서로 다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일례로 “삭개오가 주님을 만났을 때와 누가가 삭개오에 관해 기록한 때는, 수십 년의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만일 “삭개오가 주님께 입으로만 약속하고, 그 충성이 변했다면, 훗날 누가가 삭개오를 언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삭개오의 충성이 계속 이어졌기에, 누가가 삭개오를 성경에 기록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모든 것이 상황과 처지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변할 수 있고, 계속해서 끊임없이 바뀌는 가변적 특징이” 있습니다.

심지어 “인간관계도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지금 좋은 것이 얼마 후 싫어질 수 있고, 싫었던 것이 상황에 따라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유난히 “사철탕을 좋아하는 다섯 명이, 유명한 사철탕 집에” 갔습니다. 주문받는 “여성이 ‘하나, 둘, 셋, 모두 다 개죠?’ 묻자, 다섯 명이 너무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답니다. 그런데 “이들이 다른 곳에서 ‘모두 다 개죠?’ 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처럼 “세상은 상황과 처지에 따라 변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기독교인의 충성은 언제나 변함없이 이어져야!” 합니다. 힘들어도 “다시 충성을 이어간다면, 우리는 인생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고, 과거에 붙잡혀 살기보다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시 “충성을 이어간다면,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은혜가 채워져서, 더 풍성한 열매를 맺어갈 수” 있습니다. 다시 “충성을 이어간다면, 나는 물론 우리 자녀에게, 살아계신 하나님께도 부끄럽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충성을 이어감은 생사가 걸린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떤 “청년이 인생의 십자가를 어깨에 지고 길을 가는데, 주변 모두가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땀을 흘리며 길을 가고” 있습니다. 청년은 “시간이 갈수록,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서 주님께 ‘십자가를 조금 잘라 달라!’ 요청하자, 주님께서 그 십자가를 조금 잘라”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십자가가 가벼워졌지만, 다시 십자가가 무거워지자, 청년은 계속해서 주님께 ‘십자가를 잘라달라!’ 부탁했고, 마침내, 손으로 뱅뱅 돌릴 정도로 십자가가” 작아졌습니다.

그렇게 “가벼운 십자가를 손에 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가다 보니,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바보처럼” 보였습니다. 얼마 후 “천국 문 앞에 깊은 골짜기가 나타나자, 사람들이 저마다 지고 온 십자가를 다리 삼아 골짜기를 건너” 갔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자기 십자가로 도저히 골짜기를 건널 수 없어서 통곡하다가 잠에서” 깼습니다. 인생은 “‘그렇기 때문에’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훨씬 더 많기에, 더욱 충성을 이어가야!” 합니다.

살면서 “쉬운 길, 편한 길만 찾다가 충성스러움이 끊어지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 영생에 이르는 믿음마저 끊어질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주신 첫사랑, 충성으로 이끄는 거룩한 부르심을 거부하지 말고, 충성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워도, 충성스러움을 이어가야 내가 살 수 있고, 우리 가정과 자녀, 교회가 다시 살아나서 제구실할 수” 있습니다. 한주도 “성령께서 원하시는 신실한 믿음과 충성을 이어가며,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