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10:10절은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말씀합니다. 당시 “바울의 글은 탁월했지만, 말은 어눌하고 답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 재학 때, 존경하던 교수님 한 분이 바울과” 비슷했습니다. 그분이 “쓴 책과 글은 너무도 명쾌했지만, 강의를 시작하면 2/3를 재울 정도로” 지루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 교수님의 연구하는 태도를 보고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한여름에 “얼음물에 발을 담그고 책을 보며 연구하셨고, 그 후 새로운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그분은 “항상 성경을 토대로 새로운 것을 배우고 가르침을 반복했기에, 학문적 깊이가 날로 깊어졌던 것”입니다. 당연히 “고인 물은 썩지만 흘러가는 물은 정화”됩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영적으로 배우려 하지 않고, 봉사와 헌신도 줄어가기에, 영적 부패가 가중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신앙은 항상 배우고 가르침을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배우려 함은 내 부족함을 아는 것이고, 가르치려 함은 함께 성장하기 원하는 마음이 있음을” 뜻합니다. 실제로 “주중에 말씀을 배우는 영혼과 습관적으로 주일에 오는 영혼이 어떻게” 같겠어요? 초막절은 “선민이 출애굽 후 40년간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살아가며 경험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율법은 “출애굽 기념일인 유월절, 밀의 첫 수확을 기념하는 칠칠절, 또한 초막절을 선민의 삼대 절기로” 말합니다.

하나님은 “선민이 각종 절기를 통해 하나님 은혜를 다시 배우고 후손에게 이를 가르치기” 원하셨습니다. 특히 “본문에 등장하는 선민은 70년간 포로로 고생하며, 초막절은 물론 다양한 절기를 통해 배우는 과정은 물론 이를 자녀에게 가르치는 과정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선민의 삶은 더더욱 황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싫든 좋든, New Normal 시대를 살아가야!” 합니다. 게다가 “새로운 시대는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변해가서, 조금만 안일해도 뒤처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한 “새로운 시대는 나부터 배우고 가르치지 않으면, 영적 정체성을 지키기가 점점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고 무엇을 후손에게 가르쳐야 할지가 명확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바른 것을 배우고 가르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살펴봅시다.

1. 배우고 가르치려면, 삶의 선택 기준이 항상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13~14절은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 말씀합니다. 당시 “선민은 다른 무엇보다 말씀을 선택했고, 율법에 가까이 다가가서 초막절의 교훈과 가치, 은혜를 깊이” 배웠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시 선민이 초막절을 안 지켜도 무방했지만, 말씀을 들어서 배우고 보니, 도저히 그대로 초막절을 지나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민이 먼저 말씀을 택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실제로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교훈보다 말씀을 먼저 선택하여, 부모가 말씀을 배우고, 자녀에게 가르치는 선순환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재개된 초막절 준수는, 선민이 말씀을 배우고 자녀에게 가르치는 귀한 전통을 이어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삶에서 다양한 선택을 하지만, 문제는 그 기준이 무엇인가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기분과 상황, 감정에 따라서, 모방과 고집대로, 인간적인 전통을 먼저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문제는 “세상 기준을 택하면 그 결과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다른 기독교인의 능력은 하나님 말씀이 항상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커집니다. 우리가 “그렇게 말씀을 선택해야 세상의 악함과 미혹을 이기고, 그 지혜를 배우고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인은 말씀을 선택의 기준에서 제외하고 살아갈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러시모어산에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네 명의 대통령 동상이”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러햄 링컨, 테오도르 루스벨트”입니다. 이들이 “미국 역사에 선한 영향력을 끼친 공통점 외에도, 이들은 모두 성경을 삶의 기준으로 살았다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습니다. 실례로 “조지 워싱턴은 성경이 아니면 세계를 다스릴 수 없다고 말했고,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은 성경을 반석으로 삼아 서 있다고 선언했고 에이브러햄 링컨은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T. 루스벨트는 “어떠한 방면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든지를 막론하고 그가 자기의 생을 참되게 살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에게 성경을 연구하라고 권하겠다.”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을 삶의 기준으로 선택하며 살아가려면, 성경에 관하여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선민은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말씀을 멀리했기에, 에스라가 낭독한 말씀을 해석해 주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말씀을 깨달았고, 마침내 성경대로 초막절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선민은 성경을 알아갈수록,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하나님 주시는 참 기쁨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성경을 “똑바로 알아갈수록, 말씀의 은혜를 더 배우기 원했고, 더욱 자녀에게 가르칠 열정이 생겼던 것”입니다. 오늘의 “문제는 말씀을 제대로 모르면서 배우려 하지 않고, 심지어 모르는 것에 익숙한 채” 살아갑니다. 당연히 “말씀의 능력과 은혜를 잘 모르기에, 이를 자녀에게 가르치려는 열정이 점점 식어가는 악순환이 반복되지” 않겠어요?

대상 2:2~3절은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말씀합니다. 다윗은 “유언에서 솔로몬에게 권력, 명예, 물질, 번영보다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다윗은 “솔로몬처럼 화려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위대한 군주”였습니다.

다윗은 “평생을 살고 보니,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이 가장 중요함을 절감해서, 일평생 열심히 말씀을 배우며 가까이했고, 마침내 배운 그 말씀을 사랑하는 솔로몬에게 가르치려 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이미 New Normal 시대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도 빨리 변하는 시대를 살아가기에, 그 선택의 폭이 다양할 수도 있지만, 기독교인인 우리는 더욱 하나님 말씀을 삶의 기준과 척도로 선택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영혼은 가변적 세상이 아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말씀을 기준 삼고” 살아갑니다. 누구보다 “나부터 말씀을 바로 알아야, 믿음으로 넘어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말씀을 “배우고 가르쳐야, 나와 우리 가정과 교회가 든든하고, 우리 자녀가 든든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말씀을 배워가며 바로 알고 체험하면, 말씀을 가르칠 수밖에” 없습니다. 한주도 “우리가 항상 말씀을 먼저 선택하여, 배우고 가르치며 승리하기” 원합니다.

2. 배우고 가르치려면, 나도 나만의 영적 초막을 직접 굳건히 세워가야 합니다.

본문 16~17절은 “백성이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말씀합니다. 당시 “포로에서 돌아온 선민은 어쩌면 초막절을 처음 지켰을 수도 있지만, 각자가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예루살렘 곳곳에 거할 초막을” 지었습니다. 성경은 “선민이 각자 초막을 지었고, 예루살렘 곳곳에 초막이 가득했다!” 말씀합니다.

선민 “각자가 자신과 가족을 위한 초막을 곳곳에 직접, 독립적으로 세웠던 것”입니다. 그렇게 “직접 초막을 세워가며, 더 깊이 말씀을 배웠고, 마침내 자녀에게 바르게 가르치며 선한 영적 전통을 세워갈 수” 있었습니다. 영생은 “예수 믿는 믿음으로 받는데, 여기서 믿음은 공동체적 믿음이 아닌 철저하게 개별적인 믿음을” 뜻합니다. 실제로 “구원은 배우자와 부모, 자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받을 수 없고, 내가 직접 내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구원은 “어떤 공동체가 한꺼번에 받기보다, 오히려 많은 경우, 성도 각자가 자기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그 영적 독립성이 모여 공동체의 구원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많은 기독교인이 자기 믿음보다, 목회자와 사람을 의지하고, 교회를 의지하여, 단지 군중심리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수를 “직접 만난 영적 체험이 없기에, 사람을 바라보다 실망하고 상처받고, 마침내 가나안 성도가 되어, 하나님 주변을 맴돌며 영적 고아로” 전락합니다.

분명한 것은 “연약한 인간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 상황과 처지를 바라본다면, 내 생각대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누구라도 흔들리고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교회 중직자, 사람이 아니고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 믿고 신앙생활을 해야, 올바른 것을 배우고 가르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요아스는 “7세에 왕이 되어, 영적 아버지 여호야다가 생존했을 때는 성군이었지만, 여호야다 사후에는 실족하여 악한 폭군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내 믿음 없이 남의 믿음만 의지했던 요아스는 우상 숭배로 영적 타락이 극심했고, 마침내 은인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까지” 죽였습니다. 사람은 “내 믿음이 있어야 악한 세상에서 넘어지지 않고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기 믿음을 지키는 영혼, 자기 믿음을 성경에 기초하고 살아가는 영혼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내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려면, 나부터 영적으로 안일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 “선민은 영적으로 안일해서 믿음을 잃었고, 다시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으면서 안일함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인은 “영적으로 안일해지면 무력해질 수밖에 없고, 그동안 쌓은 모든 것이 한순간에 다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 신앙은, 자기도 모르게 극심한 안일함에 빠져 허덕일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어떤 “기독교인이 꿈에서, 천사가 자기의 열정을 저울로 달아보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자기가 “교회에서 열심히 헌신한 것을 저울에 달아보니, 그 중량이 100근이 되어, 그래도”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열심의 내역을 듣고 반성하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서 더욱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내역을 보니, 자기 이기심으로 행한 열정이 14근이고, 파당으로 자기 세력을 얻기 위한 열정이 15근, 자기 명예를 얻기 위한 열정이 22근이나” 되었습니다.

또한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열정이 23근, 하나님을 사랑해서 진심으로 봉사한 열정은 불과 26근”이었습니다. 이에 “꿈에서 깬 기독교인은 자신의 열정이 안일했음을 회개하며 겸손해졌고, 훗날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가르치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신앙을 저울로 달아보면, 안일함이 빠진 진짜 열정, 하나님을 위한 열정이 얼마나” 될까요? 오늘 “내가 배우고 가르치지 못함은, 무능력보다 안일함에 빠져 살아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안일함은 “내 신앙과 삶을 연약하게 하지만, 열정은 내 삶을 다시 세워가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영적으로 안일하지 않도록, 내 신앙을 항상 점검하며 ‘여기가 좋사오니!’ 이 태도를 이겨 내야!” 합니다. 안일함은 “습관이기에, 반복되는 안일함은 훗날 내가 나를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나 자신을 괴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한주도 “우리 각자가 안일함을 이기는 신실함으로, 날마다 배우고 가르치며 승리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