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디는 “모세의 인생을 세 단계로 구분하였는데, ➀ Something의 단계로 모세가 왕자로 있을 때”입니다. 모세는 “왕자로 있으며,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스스로 대단한 인물로” 착각했습니다. ➁ “Nothing의 단계로, 광야에서 40년간 무기력하게 살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절감했습니다. ③ “Everything의 단계로, 아무것도 아니었던 영혼이 하나님 손에 붙들려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권세 있고, 능력 있는 자로 우뚝” 섰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누구나 질그릇 같지만, 하나님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 백성이 되면 강건하고 힘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능력과 가치, 힘은 하나님과 맺는 관계의 깊이와 정비례”합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진짜 힘과 능력, 온전한 피난처를 사모하면서, 안타깝게도 정반대의 길을” 갑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영원토록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아가야 하지만, 우리는 세속적이고 있다가 없어질 것만 끊임없이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어리석게도! “오늘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 줄 알면서도, 계속 자기 고집과 주장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는 만큼 존귀하게” 됩니다. 본문 8절에서 “너희의 힘! 마읏제캠은 힘, 능력, 세력을 뜻하고, 나아가서 피난처, 산성이란 의미로, 하나님을 말하고 표현할 때 가장 많이” 쓰였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민에게 큰 힘이 되었지만, 선민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힘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불행히도 “선민은 세상과 우상에게서 힘을 찾으며 살아가다가, 마침내 비참한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민은 무려 70년 만에 하나님이 진정한 힘이심을 깨닫고, 다시 말씀 앞에 서서 예배를 회복했고, 기뻐하며 과거의 아픔과 근심을” 극복했습니다. 선민은 “감격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성도의 교제를 깊이” 나누었습니다. 세상이 “악할수록, 우리에게는 더더욱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다른 누구보다 하나님께서 힘을 주셔야, 악한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 없이 많은 것을 가져도 그것은 빈손이 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을 붙잡으면 빈손인 인생이 더 풍성해지고 힘을” 얻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백성으로 필요한 힘을 가지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1. 기독교인의 힘은 믿는 사람답게 해야 할 일을 할 때 더 강해집니다.
본문 “10절에서 주의 성일은 나팔절로 유대력으로 새해 첫날을” 말합니다. 문제는 “당시가 어떤 절기인가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일에 선민이 무엇을 했는가에” 있습니다. 이들은 “성일에 손을 들고 아멘으로 율법을 들었고, 눈물을 흘리도록 은혜받았고, 함께 먹고 마시며 기뻐했고, 몸을 굽혀 하나님께 경배하며” 예배드렸습니다. 이를 보면 “과거에 선민이 포로로 잡혀간 이유는 이처럼 성일에 해야 할 일을 잃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선민은 해야 할 일과 멀어지며, 점점 무기력해졌고, 마침내 국가와 정체성마저” 잃었습니다. 그러나 “선민이 다시 주의 성일에 꼭 해야 할 일을 찾았을 때, 그들은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이 하나님과 성경이 아닌 기독교인과 교회를 비판하는 이유는 성경과 하나님을 믿는다며 해야 할 일을 바르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해야 “한다면서 미워하고, 합력해야 하는데 나와 다르다고 거부하며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친하고 가깝다가도, 작은 이견에도 가차 없이 공격하고 평생” 외면합니다. 또한 “우리는 모두 말씀대로 살아가야 하고 기도해야 함을 알지만, 다양한 변명과 핑계로 이를” 외면합니다. 이처럼 “교회와 기독교인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면서 아무 문제 없다고, 오히려 너무 잘하고 사는 것처럼 착각하기에 더 무기력해지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땅끝까지 증인이 된 이유는, 오순절에 사도로서 해야 할 일, 기도와 말씀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사도들이 서로 크다고 다투며,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면서, 그들은” 실족했습니다. 선민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신뢰할 때, 가나안 전쟁에서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러나 “선민이 하나님과 율법을 버리고 우상에 빠지면서, 못할 일을 행하면서 이방 땅에 끌려” 갔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할 때, 거룩한 성군이 되었지만, 해야 할 일을 잊고서 밧세바를 곁눈질할 때, 실족하여” 넘어졌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백성답게 힘있게 살아가려면, 먼저 내 주변에 있는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12절은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말씀합니다. 성경은 “일부가 아닌 모든 백성이 서로 마음을 열고 교제하며, 사랑과 은혜를 나누며 즐거워하였다!” 말씀합니다. 생각할수록, “당시 선민이 매번, 매년 이렇게 사랑하며 교제했다면, 이 내용을 이렇게 강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과거 “한소망 교회는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가 있었고, 영적 선진의 헌신과 수고, 최고의 위치, 좋은 건물로 큰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앞으로 더 힘있게 사역하려면, 외형적 조건보다 먼저, 우리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서로 다른 점, 부족한 점, 아프고 연약한 점을 충분히 덮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진정한 성장과 부흥은 다른 무엇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에서 시작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연하지만 “배우자를 사랑하고, 자녀와 부모를 사랑하고, 구역원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해야 하지!” 않겠어요? 어떤 “며느리가 저녁밥을 짓다가, 경험이 부족하여 그만 밥을 다 태워서, 어쩔 줄 모르고 그저 울고만” 있었습니다. 귀가한 “시어머니가 울고 있는 며느리의 이야기를 듣고, ‘내 잘못이다. 내가 밥물을 잘못 맞추어서!'” 위로했습니다. 조금 후 “남편이 아내에게 ‘미안해요! 내가 아침에 물을 조금만 길어와서 그랬어요!” 사과했습니다.
시부도 “며느리에게 ‘내 잘못이다. 내가 장작을 너무 굵게 패서 그랬다!'” 사과했습니다. 비록 “밥은 태웠지만, 이 가정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는 “하나님의 핏값으로 세우신 우리 교회가 이 가정과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서로 “달라도, 실수해도 이해하며 격려하고, 양보하고 서로에게 져 주는 것, 이것이 기독교인인 우리가 정말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사랑과 은혜, 능력을 주셔서, 참된 힘을 주시지” 않겠어요?
사랑하는 “가족끼리 양보하고 져 주는 것은 절대로 자존심 상하는 굴욕이” 아닙니다. 마귀는 “‘어떻게 이런 대접을 받아!’ 격동하지만, 하나님은 ‘괜찮아! 문제없어! 더 잘 될 거야!'” 말씀합니다. 우리가 “먼저 옆에 있는 가족과 동역자, 구역 식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래서 그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 하나 될 때, 나와 교회가 참된 힘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한주도 “기독교인으로 해야 할 일, 특히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며 승리하기” 원합니다.
2. 기독교인의 힘은 하나님 말씀을 바로 알고 깨달을 때 더 강해집니다.
본문 12절은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말씀합니다. 선민이 “즐거워하며 힘을 회복한 기초는 잃어버렸던 말씀을 다시 찾고, 바르게 알고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밝히 안다. 헤비누는 말씀을 깨닫는다. 배운 내용을 제대로 알아들음을 뜻”합니다. 선민은 “그렇게 말씀을 밝히 알아가며, 뜨거운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기쁨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선민이 “비록 포로에서 돌아오고, 무너진 성벽이 재건되었지만, 이것이 참된 즐거움과 기쁨의 원천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말씀을 깊이 깨닫고 알아갈 때, 더 큰 기쁨을 누리고, 더욱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성경에 관해 너무 무지하면서, 성경을 알아가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많은 교회와 기독교인이 말씀보다 세속적 지도력, 철학과 경영이론에서 답을 찾기에, 교회는 점점 더 약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고 살아가기보다, 상식과 고집, 세상의 고정관념과 유행을 주장하다가 서로 다투며 실족할 때가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바로 알고 헌신하며 동역한다면, 하나님 주시는 힘과 능력이 얼마나” 클까요? 담임목사가 “주일에 교회학교 교실을 방문해서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얘들아! 여리고 성을 누가 무너뜨렸지요?” 아이들이 “우리가 안 그랬어요. 정말이에요. 말하자, 옆에 있던 교사가 거들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누가 여리고를 무너뜨렸는지 몰라도, 우리 아이들은 확실히 아닙니다.” 목사가 “기막혀하자, 동행한 서기 장로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목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아이들이 무너뜨리지 않았지만, 교회 재정으로 보수해 줍시다.” 오늘 “우리 중 누가 성경에 무지한 이들을 자신 있게 비판할 수” 있겠어요? 실제로 “성경을 내 손과 가방에, 차에 가지고 다니는 것보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똑바로 알고 깨닫는 것이 진짜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나를 강하게 하고, 넘어진 나를 세워주고, 못 보고 듣던 것을 보고 듣게” 합니다. 말씀이 “팬더믹과 이 땅의 모든 문제를 이겨 낼 정답을 주는 유일한 해답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기독교인답게 하늘의 능력과 힘을 덧입고 이 땅에서 승리하려면, 다시 하나님 말씀을 배우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의 “위대한 영적 부흥은, 선민이 먼저 에스라에게 율법을 가지고 와서 읽어달라는 요청에서, 말씀 앞으로 나아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반면에 “과거의 문제는 선민이 말씀을 듣고 배우는 자리, 행하고 살아내려는 자리로 나아가지 않음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말씀을 듣고 배우는 자리로 얼마나 자주” 나아갑니까? 한주는 “168시간인데, 주일에 30분 말씀 들으며, 어느 누가 자신 있게 말씀 앞에 나아간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게다가 “말씀을 집중하여 듣지 않고, 배우려는 마음도 없다면” 어떨까요? 말씀은 “교역자와 중직자만 열심히 듣고 읽으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지금 나에게 필요한 힘을 얻을 수” 있겠어요? 주님은 “마르다와 마리아가 병든 나사로에게 와 달라는 요청을 듣고도, 나사로가 죽고, 무려 나흘 만에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당시 “두 자매는 약속한 듯 똑같이,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고백했습니다.
두 자매의 “차이점도 있었는데, 마르다는 길에 서서 주님 말씀을 들었지만, 요 11:33절은 마리아가 주님 발 앞에 엎드리어 말씀을 들었다.”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마르다가 아니라, 말씀 앞에 간절함으로 나갔던 마리아를 위로하신 후, 눈물을 흘리시며 나사로를 살리러 가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실제로 “나사로가 살아난 이적은, 마리아가 말씀을 배우고 듣기 위해서 간절함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갔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말씀은 “귀로 듣고 마음으로 영접해야 하고, 더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있어야 새 힘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기독교인다운 힘을 얻으려면, 말씀을 배우고 듣는 자리로 나아와야!” 합니다. 다행히 “내 삶에 말씀을 듣고 배우는 자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기에, 배우려는 열정이 있다면, 내 삶에 엄청난 힘과 능력이 될 것”입니다. 한주도 “바쁘지만, 그래도 말씀을 배우고 듣는 자리로 나와서 영적 힘을 얻고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