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 “만주에서 한국어 신약성경이 최초로 번역되었지만, 성경을 한국에 가져오는 것은 불법”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이성하가 목숨을 걸고 성경을 국내로 들어오려 했지만 실패한 후! 백홍준이 기막힌 지혜를” 발휘합니다. 백홍준은 “장터에서 잡서를 사고, 한지로 된 성경을 풀어서 긴 끈을 만들었고, 그 끈으로 잡서를 묶어서 등에 지고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입국 후 “백홍준은 줄로 된 성경을 풀어서,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헌신했습니다.
도대체 “백홍준이 왜 이처럼 생명을 걸고 성경을 한국에 들여” 왔을까요? 이는 “당시 한국에서 서양 문물 중 그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이 가장 필요하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하나님 말씀은 여전히 가장 절실하지만, 우리가 그 말씀의 능력을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딤후 3:16~17절은,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한다! 모두에게 말씀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도전합니다.
하지만 “교회 역사상 말씀의 은혜를 가장 많이 받았던 한국 기독교가, 오늘날 점점 말씀과 멀어지고” 있습니다. 마침내 “과거 어느 때보다 말씀이 항상 가깝고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성경이 필수품이 아닌 기호품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히브리 “원전을 보면,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한 권으로 되어 있을 정도로, 그 연관성이” 깊습니다. 특히 “본문은 성벽 재건 후,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함께 말씀을 선민에게 가르치며 개혁을 추진했다.” 말씀합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4절을 제외하고 1~6절까지 구절마다 ‘모든 백성, 모든 사람’이란 표현이 무려 6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본문은 말귀를 알아들을 만한 선민은 누구나 말씀 앞에 섰다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일부가 아닌 선민 모두에게 말씀이 필요하고, 모두가 말씀을 들어야 함을” 도전하셨습니다. 지난주 “우리의 궁극적 사명은 자녀들, 후세대를 세우며 살리고, 죽어가는 영혼을 하나님께 되돌려야 함을” 나누었습니다.
문제는 “사람을 세우고 살리려면, 하나님께 많은 사람을 돌아오게 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모든 문제의 해답은 과학과 문명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 자신과 우리 가정, 자녀들, 교회가 팬더믹과 지금의 아픔을 극복하려면, 다른 무엇보다 살아있는 하나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렇다면 “모두에게 필요한 말씀을 내 것으로 영접하며 살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1. 말씀이 모두에게 필요하기에 말씀 앞에 서려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 말씀을 가져오기를 원한 것은 에스라가 아닌 모든 백성”이었습니다. 당시 “그저 율법을 낭독만 했는데도, 말귀를 알아들을 만한 사람이 모두 말씀 앞에 섰고, 새벽부터 정오까지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에 “본문 6절은, 에스라가 말씀을 전할 때, 모든 백성이 아멘으로 응답하고,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드렸다!” 말씀합니다. 생각할수록 “당시 70년간 포로로 힘들고 고달팠던 선민의 눈물과 상처가 얼마나 깊고” 컸을까요?
게다가 “귀국 후, 성벽 재건 중 당한 환난도 컸기에, 선민 중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가 깊은 사모함과 간절함으로 하나님 말씀 앞에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주일예배 때, 만일 제가 설교가 아니라 성경을 그저 낭독만 하면, 그 반응이” 어떨까요? 당연히 “지루해하고, ‘목사가 설교 준비를 안 했군!’ 불평이 얼마나” 크겠어요?
그런데 “선민 모두가 새벽부터 정오까지 낭독하는 말씀 앞에서 흐트러짐 없이 섰던 이유는 영적인 간절함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큰 문제는 말씀에 대한 깊은 간절함과 사모함을 잃어가는 것”입니다. 과거와 “달리 십자가 복음, 하나님 사랑, 나를 구원하심을 들어도 큰 감동, 큰 뜨거움이” 없습니다. 문제는 “말씀이 아니라, 내게 있는데, 그렇다면 여러분 심령에는 말씀에 대한 뜨거움과 간절함이 있는지, 자문해” 보세요!
어떤 “목사가 북한에서 핍박받는 지하교회에서 설교했던 경험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설교시간에 “지하교회 성도 모두 너무도 간절하게 말씀을 들었는데, 설교가 끝나자 모두가 ‘한 번 더 설교해 달라!’ 청해서, 같은 내용의 설교를 세 번이나 전했지만, 전혀 흐트러짐” 없었습니다. 당시 “지하교회에는 목회자가 없었고, 목회자가 직접 전하는 설교를 들을 기회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지하교회는 한국 라디오를 통해 들은 목회자의 설교를 녹음하여 필사하고, 그 내용을 주일에 읽고 나누면서 뜨겁게, 감격적으로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을 너무도 쉽게 구하고, 너무 쉽게 분실하지만, 지하교회 성도는 자기 성경을 가지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라고” 합니다. 훗날 “우리가 그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 과연 누구의 신앙을 더” 기뻐할까요? 말씀의 “능력은 매사를 당연하게 여기는 신앙, 어정쩡한 신앙, 대충 믿는 신앙에 임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내 귀를 열어주고, 내 인생을 바꾸고, 이 땅의 번영은 물론 천국까지 길을 열어주는 유일한 영적 통로”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 말씀의 소중함과 능력을 잃은 채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선민은 “포로로 이방 땅에 끌려가기 전, 오늘 우리처럼 율법이 있음을 당연하게 여겨서, 전혀 갈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포로가 되고서, 우상 앞에서 고난과 조롱을 당할 때, 말씀의 능력을 다시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선민은 예루살렘에 돌아온 후, 모두 함께 모여 에스라가 낭독하는 율법 앞에 간절함으로” 엎드렸습니다. 지혜로운 “영혼은 지금 누리는 말씀의 능력을 알고 간절함으로 붙들지만, 어리석은 영혼은 말씀을 놓치고 그 능력을 그리워하며” 후회합니다. 불행히도! “현대 교회 안에는 말씀의 소중함과 능력을 모르고 살아가는 영혼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모세는 “40일 금식을 두 번이나 하며 말씀을 받아서 선민에게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성경은 “모세가 행한 두 번의 40일 금식에서, 물과 떡을 먹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도대체 “왜 모세가 그렇게 40일 금식을 두 번이나 하면서, 목숨을 걸고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선민에게” 전했을까요? 이유는 “말씀 없이 가나안에 들어간 선민은 실족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율법만이 선민을 살릴 수 있다는 간절함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선민에게 말씀이 필요함을 확신했기에,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자녀와 후세를 세우고, 사람을 주께로 돌이키려면, 나부터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바쁘고 “분주해도, 시험과 상처가 있어도,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 말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사람은 “누구도 살 수 있는 길을 알면서, 일부러 위험한 곳을 찾지!” 않습니다. 아직도 “팬더믹과 삶의 어려움이 많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다시 말씀 앞에 간절함으로 서야!” 합니다. 우리가 “한주도 말씀의 능력을 바로 알고 날마다 승리하기” 원합니다.
2. 말씀이 모두에게 필요하기에, 주시는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들어야 합니다.
본문 6절은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느헤미야는 말씀 앞에 선 선민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손들고 아멘! 아멘 했다. 하나님 앞에서 몸을 굽혔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했다.” 선민은 “그렇게 아멘으로 말씀을 받았기에, 하나님께 몸을 굽혔고, 마침내 하나님께 진심으로” 경배드렸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말씀을 듣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양쪽 귀로 듣고 말로 다 쏟아버리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실제로 “오늘 우리는 말씀을 듣고, 옳다고 동의하고 인정하지만, 입술과 전인격으로 ‘아멘!’으로 응답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순복음 교회는 말씀마다 아멘하지만, 장로교인은 너무도” 조용합니다.
우리 “성도는 말씀은 집중해서 잘 듣지만, 입술로 아멘 하는 분은 별로!” 없습니다. 아멘은 “‘옳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결단과 각오의 고백”입니다. 문제는 “결단과 각오로 말씀 듣는 영혼과 딴 생각하며 듣는 영혼이 어떻게” 같겠어요? 아멘은 “세 종류가 있는데, ‘입술로 하는 아멘, 마음으로 하는 아멘, 행동으로 하는 아멘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아멘이건, 마음과 힘을 다해 고백하는 아멘에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청주 “청석 교회 조동식 집사의 간증”입니다. 손이 “귀한 가정에서 아들이 결혼했는데, 시어머니가 자녀를 많이 낳기 원해서, 며느리와 함께 목회자에게 기도를 받으러” 갔습니다. 목회자가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데, 며느리가 조용히 있자, 안타까운 시어머니가 며느리 몫까지 크게 아멘으로” 답했습니다. 1년 후 “그 가정에 드디어 아들이 태어났는데, 아들을 낳은 사람은 며느리가 아니라 크게 아멘으로 화답한 시어머니”였습니다.
그렇게 “시어머니의 아멘으로 태어난 늦둥이가 바로 조동식 집사”였습니다. 우리가 “팬더믹을 극복하고, 버거운 이민 생활을 이겨 내려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아멘 신앙으로 항상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본문은 “에스라가 율법을 낭독하자, 이에 상응하여 시시각각 변하는 선민의 태도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에스라가 “율법을 펴자 백성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에스라가 하나님을 송축하자 선민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큰 소리로” 화답했습니다.
선민은 “이어서 말씀 앞에서 몸을 굽혔고, 마침내 땅에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드렸습니다. 이 모든 “행동은 선민이 에스라가 이끌어가는 대로 마음을 다하여 집중했기에, 가능했던 반응”이었습니다. 특히 “느헤미야는 모든 백성, 모든 사람이 이렇게 말씀에 반응하였다고 기록하며, 그들의 영적 집중력을 크게” 칭찬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아멘 신앙으로 무장하여 은혜받으려면, 항상 영적으로 집중하여 말씀 앞에 간절함으로 서야!” 합니다.
실제로 “말씀은 내가 집중하는 만큼 은혜가 임하고, 집중하는 만큼 마음이 열려서 삶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말씀을 듣지만, 이 생각 저 생각 마음을 빼앗겨서, 30분도 집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배드리고 교회 문을 나서면, 그날 들은 말씀을 잊어버리는 기독교인이 참으로” 많습니다. 눅 10:42절은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말씀합니다.
이는 “주께서 공생애 중, 가장 편하게 여기신 베다니 마르다와 마리아 집에서 나눈 대화 내용”입니다. 당시 “마르다가 언니를 돕지 않는 마리아를 원망하자, 오히려 주님은 마리아가 좋은 것을 택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이유는 “마리아가 주님의 발 앞에 앉아서 너무도 집중해서, 또한 간절함으로 말씀을 잘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마리아가 택한 좋은 편이란 말은 말씀을 사모하는 순수함, 간절함, 말씀에 집중하는 마음가짐을” 뜻합니다.
한주도 “성령께서 다양한 말씀을 우리에게 주실 때, 바라기는 말씀을 들을 때만이라도, 우리가 집중하여 들어야!” 합니다. 이민자로 “바쁘기에, 매 순간 말씀 앞에 설 수 없기에, 말씀을 짧게 듣는 시간만큼이라도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게 “집중해서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에 감동이 있고, 마침내 아멘으로 화답할 때, 나는 영적으로 더 성장해 갈 것”입니다. 한주도 “주시는 말씀을 집중해서 들음으로 아멘 신앙으로 날마다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