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에서 “사역할 때, 한 청년이 세례를 신청하며 자랑스럽게 한 말이” 기억납니다. “저는 이번에 다섯 번째 세례를 받습니다. 이 교회는 빵이나 초코파이 안 주나요?” 청년은 “군에서 빵과 초코파이 준다고, 기회가 되는 대로 세례를 받았다!” 말했습니다. 실제로 “군에서 많은 군인이 천주교 불교 기독교 중 빵과 초코파이를 많이 주는 곳으로 향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군대에서 ‘빵 신자 초코파이 신자’라는 말이 크게 유행했었다고” 합니다.
세례는 “죄인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신앙고백이자,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변화의 시작”입니다. 문제는 “많은 영혼이 세례의 가치와 의미를 모르고 받듯이, 성찬도 그 의미와 가치를 모르고 참석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성찬은 “하나님께서 주의 재림까지 반복하여 지키라고 명령한 것이고, 자신을 주신 사랑의 극치”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습관적으로, 남이 하고, 교회가 하라고 하니, 생각 없이 성찬에 참석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부를 주신 은혜와 사랑을 받고도, 그 의미와 중요성을 모르고 살아갈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주님은 “본문 27절에서 (떡을 나눈 후 잔을 들고 축사하시고)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말씀했습니다. 주님은 “떡과 잔을 일부가 아니라, 제자 모두에게 주며 마시라고” 명하셨습니다. 성찬은 “일부가 아니라,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영혼은 인종과 지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 받아야 함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은 주님 주신 떡과 잔의 의미를 몰라서 심히” 당황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다 주셨지만, 그 의미를 몰랐기에, 제자들은 여전히 ‘누가 크냐?’ 다투었고, 모두가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오늘은 “세계 교회가 함께 성찬 주일로 지키는 데, 여러분은 성찬의 의미와 가치를” 아십니까? 특히 “팬더믹을 지나며, 성찬은 바이러스가 전이될까 두렵고 부담스러워서 제일 먼저 멈출 수밖에 없었던 거룩한 예식”입니다.
그러나 “성찬은 주님의 공생애 막바지에, 제자에게 꼭 주고 싶으셨던 은혜”였습니다. 성찬은 “그 의미와 가치를 아는 영혼에게 하늘의 능력은 물론 성장과 발전, 거듭남과 치유의 은혜를” 줍니다. 그래서 “성찬은 초대 교회부터 지금까지 대대손손 이어졌고, 개신교는 세례와 함께 두 가지 성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본문을 통해 “주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주신 의미와 가치가 무엇이고, 우리가 성찬의 은혜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살펴봅시다.
1. 주님께서 나를 위해 몸과 피를 주셨기에, 성찬을 통해 하나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해야 합니다.
주님은 “성찬을 통해, 당신의 몸과 피, 언약의 피를 조금도 아끼지 않고 제자에게 모두” 주셨습니다. 여기서 “몸과 피를 주심은 일부가 아니라, 생명 전체, 주님의 모든 것을 다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신 12:23절은 ”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이다! 말씀할 정도로 유대인에게 피는 생명 그 자체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려고, 생명 자체였던 당신의 피와 육신을 아낌없이 전부 주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성찬을 통해 당신 전부를 주심은 주님의 의지와 함께 하나님의 허락함이 있었다!”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려고 독생자 예수를 허름한 구유에 보내셨고,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역하게 하셨고, 십자가에서 물과 피까지 다 드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살리려고 당신 자신은 물론 하나밖에 없는 아들, 독생자까지도 주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살리려고 자기 자신을 내놓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타인을 살리려고 아들까지 내놓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의 살과 피를 주셔서, 우리에게 생명, 영생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처럼 주님의 몸과 피, 나를 살리려고 전부를 주신 엄청난 사랑을 모르기에, 항상 형식적이고 생각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나의 정체성을” 아세요? 나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희생시켜야만 용서받을 수 있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반면에 “나는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주면서까지 살려내고, 살리기 원하신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을 받을 때마다, 나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몸과 피를 희생하면서까지 살려낸 소중한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처럼 “성찬을 통해 내 가치와 소중함을 알면,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마치 교회 마당만 밟듯, 매번 형식적으로 성찬에 참여하면, 참 은혜를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부족하지만, “우리가 성찬을 통해, 나를 살리려고 당신의 몸과 피를 주신 그 크신 사랑을 알면, 하루를 살아도 세상에 함몰되지 않고, 헛되게 시간 낭비하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내가 존귀한 존재임을 모르기에, 집요하게 이어지는 악에 너무도 쉽게” 실족합니다. 그렇게 “내가 받은 사랑과 가치를 모르면 나도 힘들어지지만, 하나님도 힘들어질 수밖에 없고, 마침내 한 번뿐인 인생이 하나님 영광을 가릴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지난 “2015년 5월 13일, 서초구 내곡동 예비군 훈련장에서 총기사고로 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총기사고를 일으킨 남성은 훈련 중 갑자기 K2 소총을 난사해서 3명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문제는 “사건 후, 이 남성이 남긴 유서의 내용”이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무슨 목적으로 살아가는지 모르겠고, 그냥 숨을 쉬니까 살아가는 것 같다. 나의 외적인 것들과 내적인 것들 모두 다 싫고 더럽게 느껴진다.”
남성은 “눈만 뜨면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았고, 항상 자신감을 잃어서 죽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룩한 성찬을 통해, 창조주이자 주권자 하나님, 전지전능하고 편재하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살리려고 당신의 몸과 피를 주셨다!”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든 세상을 살아도 성찬을 통해 받은 사랑으로, 내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항상 기억하고, 나를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비록 “오늘 우리 이민자의 삶이 버겁지만, 그래도 ‘주의 살과 피를 받은 성찬을 통해, 나는 일어설 수 있다! 미래와 소망이 있다. 하나님 은혜로 이 땅을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음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까지 주며 사랑하셨기에, 우리 각자가 성찬을 통해 영적인 질병은 물론 육체적 질병까지도 깨끗하게 치유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한주도 성찬을 통해 주신 사랑과 은혜로 악한 세상을 능히 이겨나가기” 원합니다.
2. 주님께서 나를 위해 몸과 피를 주셨기에, 우리는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제자들은 “주께서 주신 떡과 잔을 받았지만, 그 가치와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성찬 후, 가룟 유다는 주님을 팔기 위해 어두운 세상으로 나갔고, 세 제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처럼 깨어 있지 못하고, 모두 잠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 듯, 성령 세례 후, 제자들은 성찬을 받은 사람답게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성령 체험 후 “더는 위축되지 않았고, 땅끝까지 주님의 증인으로 살며, 날마다 달라지고” 성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왜 당신의 몸과 피를 주셨고, 하나님께서 왜 독생자 아들까지 우리에게” 주셨을까요? 단순히 “성찬의 의미를 아는 것을 넘어서, 진짜 목적은 성찬의 은혜를 통해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더는 세상과 나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야 하기에, 성찬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 년에 수차례 성찬에 참여하지만, 변화되지 않고 항상 영적 제자리걸음을” 반복합니다.
문제는 “성찬의 능력이 참으로 크고 깊지만, 내가 성찬의 은혜를 받고도 바뀌려는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를 믿고, 주님의 살과 피를 그렇게 많이 받고, 과거 주님을 모르던 때와 비교하여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나요? 핵심은 “겉만 달라지기보다, 성찬의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우리 속사람이 이전과 달라져야!” 합니다. 과거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용, 미용 박람회에서, 많은 회사가 자사 제품의 우수성을” 홍보했습니다.
어떤 “회사는 노숙자를 모델로 세우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당시 “모델로 뽑힌 노숙자는 머리가 엉키고 헝클어져 있었고, 수염도 길었고, 피부가 거칠었고, 옷도 너무” 더러웠습니다. 그런데 “이 회사는 노숙자를 자사 샴푸로 머리를 감게 하고, 이발하고, 면도하고, 거친 얼굴 피부를 마사지하고, 로션과 향수로 멋을 내고, 새 옷까지” 입혔습니다. 불과 “1시간 만에 노숙자는 완전히 새롭게 되어서, 회사 제품의 우수성을 크게 알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회사 직원이 노숙자를 발견한 곳에 가서 감사를 표하려는 데, 깊은 절망에 빠지고” 맙니다. 불과 “하루 전, 말끔했던 노숙자는 만취 상태였고, 새 옷은 이미 잃어버렸고, 머리는 다시 헝클어졌고, 얼굴에는 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습니다. 비록 “좋은 화장품으로 겉이 변했었지만, 어느 누가 이 노숙자가 변했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문제는 “오늘 우리가 이 노숙자처럼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깊이 자문해야 하지” 않을까요?
실제로 “오늘 우리도 주님의 보혈로, 그 고귀한 살과 피를 받았지만, 달라지지 않고 그냥 그대로” 살아갑니다. 여전히 “죄 중에 빠져 세속적으로 살아가고, 주님 주신 살과 피와 너무도 무관하게” 살아갑니다. 우리가 “거룩한 성찬을 통해 진짜 변화되려면, 성령의 깊은 임재를 체험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여, 주님의 살과 피를 받고도 넘어진 제자들을 다시” 일으켰습니다. 성령이 “임하여, 변화된 삶을 살아가도록 많은 기독교인을” 바꾸셨습니다.
신학적으로 “로마가톨릭은 성찬, 떡과 잔이 우리 몸 안에서 진짜 예수의 살과 피가 된다. 화체설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캘빈은 주의 떡과 잔을 받을 때, 성령께서 임하여 우리를 바꾼다. 영적 임재설을” 말합니다. 성경은 “유월절에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었고, 부활 후 40일간 제자들과 동역했고,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다!” 말씀합니다. 참고로 “유월절에서 오순절까지가 50일 차이가 있고, 주님은 부활 후 40일을 사역하고, 하늘로 승천”했습니다. 계산해 보면, “제자들은 약 10일간, 세상과 분리되어,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면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우리도 “성령을 체험하려면, 하루 중 짧게라도 성령과 교제하는 시간,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는 시간을 확보해야!” 합니다. 실례로 “한 소망 만나,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성령님과 깊이 교제할 때, 주께서 주신 살과 피가 내 연약한 삶과 의지를 강하고 담대하게 바꾸어갈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를 받는 성찬을 통해 성령과 깊이 교제하며, 우리 삶이 더욱 거룩하게 변화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