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1년 “발발한 남북 전쟁에서, 북군의 군복은 청색이었고 남군의 군복은 회색이어서, 군복의 색깔로 서로를 구별했다고” 합니다. 당시 “어떤 도적 떼가 전쟁터를 통과하려 할 때, 자칫하면 남과 북, 양쪽 모두의 공격을 받을 수 있겠다!”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도적 떼는 상의는 북군처럼 청색 옷을 입고, 하의는 남군처럼 회색 바지를 입는 묘안을 생각해” 냈습니다. 도적 떼는 “북군이 청색 상의를 보면, 공격하지 않을 거야!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한 “남군이 회색 하의를 보면 공격하지 않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를 보니, 북군은 남군이 입던 회색 하의에 주목했고, 남군은 북군이 입은 청색 상의에 주목하여, 남북 양쪽이 함께 공격하여, 도적 떼가 전멸당하고” 말았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문제를 찾고 발견할 수 있고, 문제에 빠질 수 있고, 문제를 피할 수도 있지만, 문제를 온전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에 “우리는 모든 문제의 해결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 문제의 원인을 아시고, 해결할 수 있고, 가장 선하고 복된 길을 열어주시는 유일한 분”입니다.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헌신한 지 12년 만에, 선민은 고리대금으로 야기된 극심한 빈부 차이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지배층을 “제외한 모두가 ‘더는 못 살겠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살려 달라고!’ 하소연이 극에” 달했습니다. 당시 “선민은 먹고사는 문제,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의 고조로, 하루하루 생사조차”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민의 모든 갈등과 아픔, 문제를 하나님 사람/방법/시간을 통해 가장 선하게” 해결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물질과 신분 문제, 건강과 관계 문제, 끊임없는 문제에 빠져” 살아갑니다. 사람은 “누구나 생각지 않은 문제를 만나면 당황하고 두려워하고, 이를 해결하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떤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찾아오고, 그렇게 계속 문제에 빠져 하루하루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인 우리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문제 자체보다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유는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는 그 해결방법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우리는 팬더믹을 비롯한 삶의 모든 문제마다 하나님을 더 찾고, 하나님께 더 나아가야 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 삶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 방법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고 붙이셔서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12년간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잘 끝냈지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문제, 고리대금으로 사회가 분열되고, 자녀를 팔 정도의 극심한 생활고, 또한 땅과 삶의 기반을 잃어가는 문제가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선민이 직접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세워서 바른 분별력과 지혜로 문제를” 풀어가셨습니다. 당시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를 세워서 선민을 돕지 않았다면, 당시 상황은 더 나빠졌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스스로 지금 겪는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면, 세상의 어느 누가 문제에 빠져 힘들고” 아파하겠어요? 오늘날 “인간은 첨단 과학을 통해 많은 업적을 이루었지만, 작은 감기와 자연재해, 팬더믹에도 수많은 영혼이 힘들고 아파할 정도로” 연약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가 처한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직접 돕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을 붙이셔서, 우리 문제를 도우시고, 넘어진 나를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하나님은 “문제에 빠진 나를 위해 항상 돕는 사람을 붙이지만, 오히려 내가 분별력을 잃고, 나를 미혹하는 영혼을 추종할 때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넘어져 아파하는 나를 도울 사람을 예비하셔서 세우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실례로 “어려울 때는 잘 몰랐지만, 훗날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사람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음을 깨달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은 항상 절묘하고 가장 정확하게 나를 돕는 사람을” 붙이십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고 시력을 잃었을 때, 하나님께서 경건한 아나니아를” 붙이셨습니다. 당시 “아나니아는 바울을 의심하고 거부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아나니아를 통해 바울을” 도우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바나바와 디모데, 디도와 실라, 누가와 빌레몬 다양한 사람을 세워서 바울의 사역을” 도우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를 도우려고 요셉을 붙이셨고, 고넬료의 영적 문제를 풀어주려고 베드로를” 붙이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다윗을 도우려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사울의 아들 요나단을” 붙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려고 사람을 붙였다! 이를 아는 것은 절반의 은혜밖에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누군가를 살리고 세우기 위해 세워진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족해도 “내가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고, 사람을 살리고 세움에 쓰여야 하는데, 현실을 보면, 문제를 악화시키는 일에 더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나부터 “하나님께서 선하게 쓰시는 도우미가 되어야, 내가 어려울 때, 하나님께서 내게도 선한 도우미를 붙여주시지” 않겠습니까? 2001-09-11 “테러로 펜타곤과 무역 센터가 공격받으며, 엄청난 인명피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뉴아크 발 샌프란시스코행 UA 93편은 펜실베이니아 들판에 추락하여 인명피해가 크지!” 않았습니다.
당시 “UA 93편에 탑승한 토드 비머는 비행기 좌석용 전화기로 승무원에게 몇몇 승객과 함께 테러범에게 맞설 것을” 알렸습니다. 통화 중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남겼고, 주기도문을 암송한 후 토드 비머가 주변 몇몇 사람에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Are you ready? Let’s role!” 마침내 “토드 비머는 죽었고, 테러범들도 죽었지만, 많은 승객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누구도 그들의 죽음을 절대로 같게 보지” 않습니다.
토드 비머는 “수많은 사람을 살린 사람으로 기억되지만, 테러범은 살인자로 기억될 뿐”입니다. 누가 “엄청난 문제를 일으켰고, 누가 그 문제를 선하게 해결했는지, 그 답도 너무도” 자명합니다. 같은 “장소/시간/상황이었지만, 하나는 선하게 쓰임 받았고 하나는 악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떤 역할로, 무엇을 위해 쓰임 받아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지금 내 생명을 허락하심은 어떤 역할을 위함 때문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삶의 다양한 문제를 만나면, 하나님 사람을 통해 도움받고 일어서기”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손에 붙들린 모세의 지팡이처럼, 내가 타인을 살리며 세우고, 돕는 곳에 쓰임 받기를 더” 원합니다. 한주도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신실한 사람을 붙여주기” 원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 손에 붙들려서 문제를 해결하고, 살리고 세우는 일에 더 크게 쓰임 받기” 원합니다.
2. 하나님께서는 비록 내가 손해를 봐도 순종하는 태도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당시 “선민의 지배층은 동족을 존중하지 않았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본문 12절은,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보내고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하겠다.” 말씀합니다. 놀랍게도 “지배층은 느헤미야의 경고과 책망을 듣고, 12년간 지속한 악행을 악을 멈추고 바꾸겠다!” 결단합니다. 그렇게 “지배층이 느헤미야에게 온전히 순종함으로 선민 공동체의 뿌리 깊은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이처럼 “선민의 문제는 느헤미야가 하나님 음성에 순종하고, 지배층이 느헤미야 음성에 순종하면서”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지배층이 느헤미야의 명령에 반발했다면, 공동체 깊이 만연해 있던 빈부 격차, 고리대금, 사회적 불일치 문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은 “삶의 문제와 아픔을, 누군가의 작지만 온전한 순종을 통해서” 해결하십니다. 순종하면 “문제가 해결되지만, 불순종은 문제를 더 심화시킬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에게 “순종은 너무도 많이 강조되는데, 이유는 순종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고, 그만큼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매우 익숙하여 잘 알고 있지만, 실천이 가장 어려운 믿음의 덕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순종을 통해 일하고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며 문제를 해결해” 갑니다. 구원은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순종함으로 더 굳건해”졌습니다. 주님은 “참 하나님이며 참 인간이셨기에, 십자가 죽음이 두렵고” 버거우셨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십자가 죽음을 피하려 했지만,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순종하심으로 우리의 죽음과 죄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처럼 “주님도 순종으로 문제를 해결했다면, 우리는 더욱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은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 비록 원하지 않고 힘들지만, 내 뜻과 다르지만, 하나님께서 원하기에 따라가는 삶”입니다. 인간관계의 “순종은 친교가 되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면 은혜와 승리, 문제 해결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 내 생각대로 고집부리며 살 때가 더” 많습니다. 여동생이 “개를 키우는 데, 먹을 것을 주면 앉으라면 앉고, 손도 주고, 하라는 대로 잘 순종하지만, 먹을 것이 없으면 자기 멋대로” 했습니다. 문제는 “우리도 내가 원하고 이익이 되면 잘 순종하지만, 싫으면 불순종을 고집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순종은 “삶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고, 못 보고 못 듣고, 체험하지 못한 많은 것을 누리고 깨닫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 기준대로 순종 여부를 결정한다면, 내 신앙은 매번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성장과 멀어질 것”입니다. 코리텐 붐은 “나치가 유럽을 점령했을 때, 유대인을 숨겨주었다가 발각되어 수용소에서 엄청난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수용소에서 겪었던 많은 사연과 은혜를 간증하며,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이끌었습니다.
한 번은 “독일 뮤니히 교회에서 ‘원수를 사랑하라!’ 간증한 후, 한 사람이 간증을 잘 들었다고 인사하며” 다가왔습니다. 살펴보니 “그 사람은 라벤스부룩 간수였고, 코리텐 붐의 친언니와 수많은 사람을 참혹한 죽음으로 몰아갔던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은혜를 받았다면서 악수를 청하는데, 코리텐 붐은 당시 어려운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오른손이 뻣뻣해지며 옆구리에 화살이 꽂히는 것처럼 통증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내가 이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하나? 손을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내면의 갈등과 언니 얼굴을 기억하면서, 저절로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나 제가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게 해 주세요!” 놀랍게도 “짧은 기도 후, 용서하라는 하나님 음성에 순종하였고, 그 사람의 손을 잡았을 때, 과거의 아픔과 상처가 눈 녹듯이 사라지는 평안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살면서 “억울하고 힘들어도, 내 자아와 고집은 물론 내 마음에 채워진 것을 내려놓고 순종해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일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감사하게도 “아직 안 늦었기에, 지금 내면의 갈등이 있다면, 내 생각보다, 고집보다, 세상의 소리보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기” 원합니다. 한주도 “어렵고 힘든 현실에서, 하나님 방식대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서, 삶의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승리와 은혜가 가득하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