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김제의 금산교회는, 1905년, 당시 지역 유지였던 조덕삼의 사랑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조덕삼은 김제 최고 부자로, 교회 재정은 물론 교회를 지을 땅까지 책임질 정도로 영향력이 컸는데, 당시 금산교회에는 조덕삼의 종인 마부 이자익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금산교회가 성장하여 장로를 세울 때, 조덕삼이 떨어지고 이자익이” 뽑혔습니다. 당시는 “여전히 유교적 전통이 컸기에, 모두가 이를 보고 염려하고 교회를”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덕삼이 겸손히 모든 결과를 받아들였고, 장로가 된 이자익을 진심으로” 축복했습니다. 비록 “집에서는 종이었지만, 교회에서는 이자익을 깍듯하게 장로로” 섬겼습니다. 또한 “조덕삼은 이자익이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도록 물질적으로 지원했고, 훗날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모셔서, 함께 교회를 힘있게” 세워갔습니다. 이는 “한 사람이 하나 됨을 지킬 때, 얼마나 복된 일이 일어나는지 잘” 말해줍니다. 요 17:11절은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말씀합니다.
주님은 “공생애 마지막 밤, 12 사도가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하나 되길” 기도했습니다. 교회마다 “하나 됨을 지켜야 함을 알지만, 하나 됨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분열된 마음, 죄 성과 편협함, 미움과 시기, 질투가 하나 됨을 너무도 쉽게 깨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귀의 미혹이 극심하기에, 하나 됨은 반드시 힘써 지켜야 할 덕목”입니다. 느헤미야와 “선민은 52일 만에 대적의 공격과 방해를 이기고 성벽 재건 공사를” 끝냈습니다.
특히 “본문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총독이 된 지 12년 후의 내용”입니다. 외적으로 “성벽 재건이 끝났지만, 내적으로는 지배층의 권력 남용과 경제적 불균형으로 먹고사는 문제가 무너졌고, 그동안 지켜왔던 공동체의 하나 됨이 완전히 깨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선민의 하나 됨이 깨지자, 개개인의 신앙과 가정이 깨져서 사회 전체의 분열로” 확대되었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죄로 인해 깨진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이어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는 깨지고 나누어진 세상과 관계를 하나로 만들려고” 오셨습니다. 이에 “우리가 십자가 복음을 믿는다면, 하나 됨을 지켜야 하고, 절대로 내가 하나 됨을 깨지 말아야!” 합니다. 이유는 “나와 교회가 하나 됨을 지켜야 미래가 더 나아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 됨을 깨지 않고 지키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살펴봅시다.
1. 하나 됨을 지키려면, 가까운 사람을 존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성벽 “공사 후 12년 만에, 선민 공동체 전체가 흉년과 식량난, 과도한 세금과 고리대금으로 갈가리 찢어져” 있었습니다. 특히 “본문 5절은,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팔았다.” 말씀합니다. 당시 “지배층은 자기 이익을 위해, 고리대금 등으로 가난한 동족을 오랫동안 착취”했습니다. 지배층이 “동족을 존중하고 배려하기보다, 자기 편안함과 안락함을 먼저 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가장 가까운 동족끼리 서로를 향한 존중을 잃었기에 사회 곳곳에서 분열이” 가중되었습니다. 존중은 “단수가 아닌 복수형 단어이고, 일방적이지 않고 쌍방적, 관계적 용어”입니다. 존중은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 시각으로 무장되어야 가질 수 있는 성령의 은사”입니다. 실제로 “인간의 존중은 한결같지 않고, 상황과 처지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해 갈 수” 있습니다. 이에 “존중받기 원하면, 나부터 먼저 상대방을 존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마 7:12절, “황금률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말씀합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물질과 사회적 지위, 학력으로 사람을” 구분합니다. 심지어 “교회조차 하나 됨을 지키기보다 다양한 이유로 하나 됨을 깰 때가 더” 많습니다. 존중은 “믿음으로 변화되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삶에서 시작되어서, 상대방을 높이며 하나 됨이 더 굳건해지도록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노예였던 “오네시모가 빌레몬 집에서 존중받았다면, 그는 목숨을 걸고 도망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망가서 바울을 만났는데, 놀랍게도 바울이 자신을 노예가 아닌 주의 자녀로 존중해” 주었습니다. 당시 “상식을 파괴한 바울의 존중이 오네시모가 수직적 수평적 하나 됨을 이루도록 이끌었을 것”입니다. 훗날 “오네시모가 변화되어 골로새 교회로 다시 돌아갔을 때, 빌레몬도 바울과 같이 오네시모를 존중해서 노예를 동역자로” 받아줍니다.
이처럼 “바울이 오네시모를 존중했고, 그 존중이 빌레몬에게 전해졌고, 마침내 존중으로 모두가 주 안에서 하나 됨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존중은 “나 혼자 모든 일을 할 수 없고, 타인과 동역해야 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가질 수” 있습니다. 심중에 “‘내가, 나를, 나 없이는’ 나만 강조하는 죄 성으로는 절대로 존중과 하나 됨을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존중이 필요한 이유는, 주께서 나와 내가 싫어하는 영혼까지 존중해서 살렸기 때문”입니다.
부족해도 “존중해야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고, 하나 됨을 지키며 세상에서 실족하지!” 않습니다. 교육학 용어, “생태적 감수성은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이 있기까지 수고한 사람을 생각하고 존중하는 예민하고 순수한 마음가짐을” 뜻합니다. 일례로 “사람이 밥 한 그릇을 먹어도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흘린 농부의 땀을 존중하는 따뜻한 마음을” 말합니다. 종이 “한 장을 사용해도, 나무를 자르며 수고한 사람의 헌신을 존중하는 마음가짐”입니다.
커피 “한 잔을 마셔도 커피 농사를 위해 수고한 농부의 땀과 헌신을 존중하는 마음가짐”입니다. 하나님 “교회와 기독교인이 삶의 터전에서, 이처럼 주변 모두를 존중하는 생태적 감수성이 깊어진다면 얼마가” 귀할까요? 이처럼 “생태적 감수성은, 우리가 먼저 가까운 사람을 진심으로 존중해야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부부마다 “배우자를 부르는 호칭이 참으로 다양한데, 많은 분이 ‘이봐요, 여기요, 아무개 엄마로, 아예 손짓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혹자는 “‘어이!’ 아내를 불러서, 아내가 ‘내가 졸병이냐?’ 항의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부부간 “가장 좋은 호칭은 ‘여보, 같을 여(如), 보배 보(寶), 보배 같은 당신’일 것”입니다. 이처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존중받아야, 세상에서도 존중받고, 주변에 있는 사람을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존중은 “선택이 아닌 필수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한 소망 교회는 오랫동안 하나 됨이 깨져서, 어렵고 힘든 시간이” 있었습니다.
누구도 “다시 교회가 깨져서 어려워지고 힘들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부터 옆에 있는 사람을 진심으로 존중하며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유는 “내가 타인을 존중해야, 나도 존중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어떤 경우에도 내가 하나 됨을 깨는 일에 동참하거나, 주도적 역할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주도 “우리가 가까운 사람부터, 교회와 가정, 삶의 현장에서 서로 존중하여, 하나 됨을 지켜나가기” 원합니다.
2. 하나 됨을 지키려면, 우리 각자가 하나님과 영적 교류가 더 깊어져야 합니다.
당시 “선민은 지배층의 고리대금으로 힘들고 어려워서 더는 이렇게 못 살겠다.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특히 “본문 2~4절에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말이 무려 세 번이나” 나옵니다. 또한 “본문 1절은,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었다!” 말씀합니다. 당시 “여성은 존중받지 못했는데, 구약 전체에서 본문이 유일하게 외면당하던 여성까지 나섰음을 언급하고 있다면, 삶의 어려움과 아픔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힘들고 어려웠지만, 먹고살기가 막연했지만, 자녀가 노예로 팔려갔지만, 선민 대다수는 사람에게 하소연할 뿐,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과거 “성벽 재건 때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먼저 찾았던 선민이 이렇게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찾고 부르기보다 사람을 찾으면서, 공동체의 하나 됨이 점점 더 깨져” 갔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과 교류가 깊어져서 은혜를 받아야!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실제로 “하나님과 깊이 교류하여 은혜받으면, 내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하나님의 눈과 귀로 세상을 보고 들으며” 살아갑니다. 반면에 “하나님과 교류가 끊어지면, 매사가 삐딱하고 부정적이고, 논쟁과 시빗거리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교류가 끊어지면, 본인도 힘들어지고, 주변 모두를 힘들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현대 기독교인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과 교류가 과거 그 어떤 시대보다 더 얕아져 감에” 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기독교 기관이 현대 기독교인의 영적 상황을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오늘날 교인 20%는 기도하지 않고 25%는 성경을 안 읽는다. 30%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60%는 주중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 70%는 선교헌금을 하지 않고 90%는 가정예배는 물론 전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내 신앙과 내 영적 상황은” 어떻습니까? 문제는 “오늘 우리도 교회에 나오고 예배에 참석하면서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렇게 “하나님 주시는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기에, 하나님과 교류가 끊어지고, 마침내 수직적 수평적 하나 됨을 지켜내지!” 못합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도 성령께서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 주고, 생각나게 하시고” 동행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게을러서, 세상에 너무 깊이 빠져서, 매번 눈앞만 보기에 은혜에서” 멀어집니다.
심지어 “은혜를 사모함이 점점 식고, 받은 은혜도 희미해져 가고, 성도의 교제도 사라져서, 마침내 하나 됨과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익과 세속적 목적을 위해 서로 연합하고 헤어지길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 됨을 지키려면, 무엇보다 하나님과 교류가 날마다 더 깊어져야!” 합니다. 부족해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고, 말씀 묵상과 기도, 찬양, 봉사와 헌신이 더 굳건해져야!” 합니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과 교류가 깊어져야 자신감도 커지고, 타인과 관계가 원만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류가 깊어져야, 매사에 긍정적이고,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공생애 때, 12 사도는 하나 되지 못하고, 항상 서로 크다고” 다투었습니다. 오죽했다면 “주께서 체포되던 밤까지 ‘서로 크다!'”고 다투었겠어요? 그런데 “그랬던 사도들이 주님의 승천 후,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면서, 완전히” 달라집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과 교류가 깊어지면서 성령을 체험했고, 모두가 더는 다투고 분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과 달리 매사에 양보하며 배려했고, 중보기도 하며 서로를 세워주고, 존중하고 동역하며, 하나 됨을 지켜” 나갔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외적으로는 전과 같았지만, 내적으로 하나님과 교류가 이전보다 훨씬 더 깊어졌던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 됨을 굳게 지키려면, 누구보다 나부터 위로부터 공급하는 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은혜받아야 “내 악함과 죄를 이기고, 구원의 확신이 더 굳건해질 수” 있습니다. 은혜받아야 “베풀고 섬기며, 양보하고, 미워하던 영혼까지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은혜는 “내가 바뀌어야 받을 수 있기에, 한 주간 우리가 한 번 더 말씀 앞에 서서 기도하고, 한 번 더 봉사하고, 한 번 더 구역 식구와 주변 사람에게 사랑을 표하기” 원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교류가 계속 깊어지는 은혜로 하나 됨을 굳게 지키며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