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저명한 사상가 토마스 칼라일은 유럽에서 피 흘리는 전쟁의 반복을 막기 위해, 책을 쓰기” 원했습니다. 이를 위해 “칼라일은 무려 10년간 최선을 다해 ‘프랑스 혁명사’ 저술에”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완성 직전, 절친한 친구에게 원고 검토를 부탁했는데, 친구가 칼라일의 원고를 읽다가 피곤하여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그 집 하녀가 서재를 정리하다가, 칼라일의 원고를 쓰레기로 알고, 모두 태워버리고” 말았습니다.

칼라일은 “이를 듣고 한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심지어 삶의 의욕마저 잃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칼라일이 창밖에서 인부들이 벽돌을 쌓고 허물기를 반복하며 집을 지어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한 채의 집을 짓기 위해 저렇게 쌓았다 허물기를 반복한다면, 나도 유럽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해야 하겠다!” 그렇게 “토마스 칼라일의 세계적 역작 ‘프랑스 혁명사’가 완성”되었습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다시 새롭게 시작하려 할 때, 두 가지 상황이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먼저 “큰 어려움과 고난을 겪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려 할 때, 과거의 아픔이 내게 큰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일을 새롭게 목표를 정하여 다시 시작할 때, 그 의욕과 열정이 개인과 공동체를 성장으로 이끄는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다시 새롭게 무엇인가를 시작할 때, 하나님은 도우시지만, 마귀는 낙담과 좌절로” 방해합니다. 느헤미야가 “불타고 허물어진 예루살렘 성을 살핀 후, 예루살렘 주민에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이에 “예루살렘 주민도 일어나 건축하자! 힘을 내어 선한 일을 하자!” 화답했습니다. 비록 “산발랏과 도비야의 방해가 있었지만, 느헤미야와 예루살렘 주민은 불타고 허물어진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기 위해, 다시 새로운 시작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이 선언을 계기로, 힘들고 어려운 중에도, 예루살렘 성은 서서히 회복되어” 갔습니다. 오늘부터 “교회가 16개월 만에 다시 사역이” 재개됩니다.

무엇보다 “새롭게 시작된 사역이 안전해야 하고, 열매 맺어야 하는 중요한 숙제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힘들고 어려운 중에도 팬더믹의 아픔을 잘” 통과했습니다. 지금까지 “사역 재개를 위해 많은 분이 기도로 도왔고, 큰 기대로 하나님께” 나왔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다시 주님의 교회를 새롭게 시작하기 위한 결단과 합력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시작하게 하셨기에, 어떤 자세가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1. 다시 새롭게 시작하려면, 누군가 안 볼 때, 더 헌신하고 신실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주민은 깊은 밤에 느헤미야가 어디를 다녀왔고 무엇을 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느헤미야가 “자신이 행한 일과 행방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느헤미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재건을 시작하겠다 굳게” 결심했습니다. 이처럼 “느헤미야가 누가 보든 안 보든, 헌신했기에, 그동안 위축되었던 예루살렘 주민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주었고, 미래를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각오를 다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느헤미야가 누가 보든 안 보든, 다시 시작하려는 결단으로부터 예루살렘 성 재건이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에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지만, 세상에는 안 보이는 것이 더 많고, 또한, 안 보인다고 영향력 없고, 무능력한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모두 누가 볼 때만 헌신하기보다, 누가 보나 안 보나 한결같은 사람을 더” 좋아합니다.

오늘날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는 누가 보든 안 보든, 한결같이 봉사하고 수고하는 영혼, 한결같이 눈물로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영혼이 더” 많습니다. 이처럼 “우리 교회도 부흥하려면 누가 보든 안 보든, 항상 수고하고 헌신하는 영혼이 많아져야!” 합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은 누가 볼 때는 잘하지만, 진짜 신앙은 누가 안 볼 때 더 신실하게” 살아갑니다. 스위스 “취리히 어떤 거리에서, 한 노인이 길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줍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노인의 이상한 행동을 보고 ‘지금 무엇을 줍고 있나? 습득물은 경찰서에 신고해야 한다!'” 경고합니다. 그러자 “노인이 빙긋 웃으면서, ‘별일 아니니 그냥 가세요!’ 말했지만, 경찰은 의심하며 노인의 주머니를” 뒤졌습니다. 놀랍게도 “주머니 안에는 온통 깨진 유리 조각뿐이어서, 경찰이 이유를 묻자, 노인이” 답합니다. “어린이들이 이 유리 조각을 밟으면 다쳐서요!” 이는 “근대 교육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페스탈로치의 이야기”입니다.

산상수훈은 “구제할 때, 금식할 때, 그리고 기도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 한다면, 이는 자기 상을 이미 받은 것이라고” 교훈합니다. 다시 “새롭게 시작하려면, 보일 때는 물론, 오히려 누가 안 볼 때, 더 신실하고 잘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은 자기 PR 시대기에, 누가 보면 더 잘 하고, 나를 보여주려고 무던히” 애씁니다. 일부러 “나를 나타내려고 노력해서, 과거 여러 목회자가 40일 금식을 명함에 새기고 다니는 일까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아무리 보여주려 해도, 안 보는 사람, 보고도 잊어버리는 사람, 무관심한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가 보든 안 보든, 한결같이 헌신하는 영혼을 인정하시고, 그 영혼을 통해 다시 시작하는 일에 힘을” 더하십니다. 이에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누가 보든 안 보든 항상 신실해야!” 합니다. 요셉은 “17세에 친형들에게 팔려서 노예가 된 후 23세에 보디발 가정의 총무가”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시 요셉 말고 왜 다른 인재가” 없었겠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물론 보디발도 누가 보든 안 보든, 어렵고 힘든 중에도 신실하게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요셉의 삶을 주목했고 인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고난과 아픔이 참으로 컸지만, 누가 보든 안 보든, 신실함으로 애굽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16개월간 팬더믹으로 온라인 예배를 드릴 때, 많은 분이 아무도 안 보고, 혼자 있기에 편한 복장과 자세로, 편한 시간에 흐트러진 채로 예배드릴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흐트러진 자세로 온라인 예배를 드림이 임시임을 알면서도 점점 익숙해져” 갔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교회가 다시 모든 예배와 사역을 시작하였기에, 누가 보든 안 보든, 우리 각자가 다시 영적으로 깨어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부터 “누가 보든 안 보든, 내가 지켜야 할 예배의 자리, 직분자의 자리, 봉사와 헌신의 자리, 말씀 듣고 기도하는 자리를 바르고 신실하게 지켜야!” 합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웠지만, 우리 각자가 누가 보든 안 보든, 다시 놓치지 말아야 할 영적 명제를 굳게 붙잡을 때, 한 소망 교회는 다시 힘있게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한주도 “우리가 누가 보든 안 보든 항상 신실함을 지켜서, 하나님께 인정받고 승리하는 삶이 되기” 원합니다.

2. 우리가 다시 새롭게 시작하려면,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19절은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재건을 방해한 산발랏과 도비야의 행동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업신여겼다. 비웃었다. 예루살렘 재건은 왕을 배반하려는 것이다!” 둘은 “끊임없이 예루살렘 재건에 불필요하고 정말 없어야 하는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반면에 “본문 18절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말씀합니다.

느헤미야는 “도비야와 산발랏과 달리, 위축되었던 예루살렘 주민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선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마침내 “위축되었던 예루살렘 주민이 ‘다시 일어나서 힘을 내자! 선한 일을 하자!’ 용기를” 냈습니다. 이처럼 “느헤미야의 선한 영향력이 예루살렘 재건을 힘 있게 다시 시작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새로운 시작 “특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무엇인가를 다시 시작할 때, 항상 시험과 미혹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도 일부러 주변에 악영향을 주고, 고의로 누군가를 힘들게 하려고 계획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나중에 보니, 자신도 모르게 주변에 악영향을 끼칠 때가 많았음을 발견하고 힘들어” 합니다. 악한 “영향력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을 막고, 못하게 하고, 서로를 아프게 하여 합력을” 깹니다. 반면에 “선한 영향력은 다시 일어나게 하고, 다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게 하고, 다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복음을 전하는 헌신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지금,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교회와 주의 나라 확장에 선한 영향력을 주는가? 악한 영향력을 주는가? 고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을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이끌어갈 영적 리더로 일찍” 낙점하셨습니다. 엘리 시대에 “하나님 주시는 이상과 환상이 사라져버릴 정도로 영적 암흑기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유는 “엘리, 홉니와 비느하스의 악영향이 손을 쓸 수 없을 지경까지 나빠지고 말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실례로 “홉니와 비느하스로 인해 예배가 더럽혀지고, 성막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성적인 부정이 자행되고, 악에 악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악영향을 견디다 못하셔서, 어린 사무엘을 세우셔서, 사사 시대를 넘어 왕정 시대를 여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했습니다. 무엇보다 “새롭게 다시 시작함은 절대로 말과 혀로 되지!” 않습니다. 요한 1서 3:18 절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말씀합니다. 핵심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새롭게 다시 시작되어야, 힘이 있고, 열매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다시 새롭게 시작함을 돕기 원하면서, 행동과 실천보다 말이 앞설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말과 혀로는 절대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없고, 오히려 분란과 상처를 양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행하고 진실하려면, 내 시간과 내 물질도 드려야 하고, 억울함과 오해도 있고, 생각하지 않은 장애물로 아플 수도 있지만, 그래도 행함과 진실함이 있어야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암탉은 “100원짜리 달걀을 하나 낳고, 동네방네 시끄럽게, 동서남북 사방으로 ‘꼬꼬댁 꼬꼬!’ 수없이” 외칩니다. 그런데 “암소는 종일 주인을 위해서 힘들게 일하고, 달걀과 비교할 수 없이 비싼 송아지를 낳고도 별다른 말이” 없습니다. 게다가 “암소는 날이 새면 ‘음매! 일하러 가요!’ 다시 말없이 묵묵히 밭으로” 나갑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마다, 암탉 같은 교인은 조그만 일을 해놓고 온 교회를 떠들썩하게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합니다.

반면에 “암소 같은 교인은 큰일을 하고도 묵묵히 여전히 헌신하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더 할 것이 없는지, 기도해야 할 제목이 무엇인지, 도울 사람을 찾고, 항상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미안해하며” 헌신합니다. 오늘은 “교회가 새롭게 재출발하는 날로 볼 수 있는데, 과연 나에게 어떤 모습이” 필요할까요?

오늘 “우리는 어떤 일에 관해 말할 수 있고, 말하고 싶어도, 말보다 먼저 주님 원하시는 행함과 진실함이” 필요합니다. 비판과 “평가보다 나를 먼저 되돌아보고, 나를 영적으로 살핀다면, 그 선한 영향력이 얼마나” 클까요? 그렇게 “행함과 진실함이 많고 깊을수록, 교회는 더 든든해지고, 다시 시작한 우리의 내일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첫 주도! 우리가 더더욱 말보다 행동과 진실함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