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코람 데오는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으로, 이는 하나님께서 나와 늘 가까이 계심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최근 코람 데오 만큼 코람 문도(세상 앞에서)라는 개념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코람 데오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은 코람 문도, 세상 앞에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고백하며 살아가야 함을” 도전합니다. 오늘의 “문제는 코람 데오 신앙이 있다면서 코람 문도, 세상 앞에서 하나님과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세상에서 나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며 살아간다면, 이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삶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정직하다 평가받아도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지 못하면, 역시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기독교인은 코람 데오 신앙과 코람 문도의 삶이 균형을 이루어야!” 갑니다. 바울은 “본문 5절에서, ‘주께서 가까우시다!’ 말하며, 염려와 두려움에 빠진 빌립보 교회를 따뜻하게” 격려합니다.

바울은 “주님의 재림을 언급하며, 가깝다! 원어 엥귀스는, 시간상으로 역사의 끝, 심판의 때가 가깝게 임박했음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엥귀스는 공간적으로도 가까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당시 빌립보 교회가 처한 다양한 문제를 알았기에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적으로 가까이 있음을 강조하며 ‘힘을 내라!’ 위로했던 것”입니다.

본문 6~7절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말씀합니다. 팬더믹을 “겪으며, 많은 기독교인이 이 말씀에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고, 다시 일어설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지금 삶에서 겪는 아픔과 어려움을 이겨내려면 세상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내려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코람 데오의 믿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와 가까이 있기에 내가 어떻게 악한 세상을 살아갈까? 코람 문도에 대한 답과 자세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주님을 더 가깝게 따라가며, 오늘의 위기를 능히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코람 데오와 코람 문도의 균형을 이루며, 어떻게 주님을 가까이하며 살아갈지!” 살펴봅시다.

1.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기에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본문 5절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말씀합니다. 바울은 “주께서 시간과 공간적으로 가까이 다가오셨기에, 모든 이에게 관용을 보여야 한다!” 말합니다. 관용 “에피에이스케는 어떤 대상에게 우월함을 나타내지 않는 부드러움, 인내하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바울이 “이처럼 관용을 강조함은, 당시 많은 사람이 주께서 가까이 계심을 모르고 죄에 빠져서 서로 관용하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우월함을 나타내지 않고, 우리와 똑같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겪는 모든 아픔과 상처, 배신과 박해, 모든 연약함을 우리와 똑같이” 체험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자 하나님의 관용으로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었기에,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사에 타인보다 낫고 우월하게 보이려고, 인내와 용서 없는 삶, 관용과 너무도 먼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관용은 “복수형 명사로, 누군가 옆에 있어야 가능한 관계적 용어”입니다. 오늘의 “문제는 우리가 주님의 관용으로 구원받고, 코람 데오를 고백하지만, 코람 군도! 세상에서 실제 삶은 관용 없는 삶을 살아갈 때가 더” 많습니다. 베드로가 “형제의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할지 묻자, 주께서 만 달란트 빚진 자로” 답했습니다.

어떤 “종이 왕에게 만 달란트의 빚을 지고, 갚을 수 없어서 관용을” 구했습니다. 참고로 “한 달란트는 육천 데나리온으로, 청년이 육천일을 일해야 벌 수 있는 거금으로, 이는 인력으로는 도저히 깊을 수 없는 액수를” 뜻합니다. 그러나 “왕은 종의 간곡한 엎드림에 관용으로 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왕은 엄청난 관용으로 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관용 없이 대했음을” 들었습니다.

분노한 “왕은 만 달란트를 다 갚으라고 명하며 관용 없는 자를 옥에” 가둡니다. 이처럼 “우리도 탕감받은 빚이 너무도 크기에, 죄인인 나부터 타인에게 반드시, 어쩌면 무조건 관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가 받은 관용이 크지만, 타인에게는 관용보다 너무도 엄격하게” 다가갑니다. 값없이 “받은 관용의 은혜를 잊었기에, 매사에 타인의 문제점을 찾아 지적하기에 빠르고, 항상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죄 성이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용 없는 엄격함은 나를 망칠 수 있고, 게다가 타인에게 상처 주고, 하나님의 영광마저 가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코람 데오, 주님의 가까이 계심을 인정한다면, 코람 군도! 세상 앞에서 반드시 관용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최근 “한국에서 빈센조와 모범택시라는 드라마가 엄청난 화제”입니다. 한국인 “마피아가 악으로 악을 심판하는 내용의 빈센조는 Netflix 방영 순위에서 6위에 오를 정도로 그 인기가” 많았습니다.

모범택시는 “사회 부조리를 경찰보다 빨리 찾아가서 직접 복수하는 내용”입니다. 두 “드라마의 공통점은 악에 관용 없이, 악에는 더 큰 악으로 복수하며” 무너뜨립니다. 또한 “법과 경찰은 너무도 부패하고 무능해서, 관용 없는 복수가 선으로 포장되고” 있습니다. 세상은 “두 드라마의 관용 없는 복수를 통해, 통쾌함과 대리만족을 느끼기에 엄청나게” 열광합니다. 마침내 “두 드라마는 관용은 어리석고 그릇된 개념이다 은연중에 조롱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하나님 명령인 용서와 관용이 너무도 어리석고 무능한 개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겨라!” 말씀합니다. 주님도 “관용으로 악을 이기셨고, 관용으로 세상을 바꾸셨고, 관용으로 죄인인 내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관용 없는 세상 풍조에 물들지 말고, 주님께서 강조한 관용을 배우고, 코람 군도! 악한 세상 앞에서 더 관용을 베풀며 살아가야!” 합니다.

누구보다 “바로 나부터 주의 관용으로 살았기에, 나부터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 배우자와 자녀, 부모와 형제자매에게 관용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주께서 “같은 교회를 섬기도록 우리를 묶어주셨기에, 우리가 서로에게 먼저 관용으로 다가가서 더욱 가까워지고, 주님과도 더 가까워져서, 주의 나라 확장을 위해 동역해야!” 합니다. 한주도 “코람 데오 신앙이 코람 군도로, 악한 세상에서 주님의 관용으로 무장되어 주님을 더 온전히 따라가기” 원합니다.

2.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기에 믿음을 지키며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본문 7절은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말씀합니다. 세상에서 “염려와 어려움이 많아도,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줍니다. 지킨다! “프루레세이는 ‘망보다, 감시하다. 지킨다.’라는 뜻의 군대용어”입니다. 해석하면, “군인이 성읍의 안전을 위해 자기 위치를 잘 지켜서 벗어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자기 의무를 다하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주께서 가까이 계심을 확신한다면, 내가 내 마음과 생각, 심지어 믿음도 지킬 수 있다!” 선언합니다. 오늘 “우리가 염려하며 평강을 잃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주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말씀을 확신하면서 믿음을 지키면, 염려를 이기고 평안함마저 넉넉히 지킬 수”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받은 믿음을 잘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만일 “믿음을 지키지 못하면,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영적 공든 탑이 무너지고, 마침내 주님은 물론 구원에서조차 멀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을 보면, 우리 믿음을 빼앗기 위한 도전이 너무도” 많습니다. 실례로 “전화기와 컴퓨터, 방송과 각종 길거리 광고, SNS까지 마치 우는 사자가 삼킬 자를 찾듯. 무섭게 우리를 공격해” 옵니다. 게다가 “탈현대주의는 우리가 살면서 보고 듣는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과 멀어지도록” 미혹합니다.

성경에서 “적그리스도란 단어는 요한1서와 요한2서에 총 4번이” 나옵니다. 요한은 “예수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을 부인하면 적그리스도이다!”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신약의 사 복음서, 바울 서신에는 적그리스도란 말이” 없을까요? 이유는 “사 복음서와 바울 서신이 기록될 때까지, 초대교회 성도는 그래도 믿음을 지켰지만, 1세기 말! 요한 서신이 쓰일 때는 영적으로 미혹되어, 사도가 전해준 복음과 믿음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1세기 말 초대교회는 헬레니즘과 이원론에 공격으로 믿음을 지키지 못해서, 적그리스도의 미혹에 무기력하게” 넘어졌습니다. 이처럼 “적그리스도란 말은 믿음이 변질되어 지키지 못했음을 증거 하는 단어”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적그리스도란 말이 더 유행함은 그만큼 우리가 더 믿음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을 지키기보다, 자기만 인정하는 경건함, 자기 의로움에 빠져 살아갈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과 더 가까이하며 코람 군도, 악한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은 “절대로 그냥 지켜지지 않고, 영적으로 선한 싸움,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러야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믿음을 잃으면, 이 땅과 내세까지 전부를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물질과 명예, 권력과 자존심보다 믿음을 지킬 수 있다면, 우리는 넘어져도 얼마든지 다시 일어나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린드버그는 “프로펠러가 하나밖에 없는 단발 비행기로 대서양을 최초로 횡단하여서 세계적인 영웅이” 되었습니다. 한번은 “린드버그가 파리를 방문했는데, 세계적 담배 회사가 린드버그에게 담배 광고 모델이 되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린드버그 씨! 담배를 손에 들거나 입에 물고 있는 사진 한 장만 찍어주면 5만 불을 드리겠습니다.” 당시 “1930년대 상황에서 이는 파격적인 액수였지만, 린드버그는 수많은 사람 앞에서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는 세례 받은 교인입니다. 담배를 손에 쥘 수 없습니다.” 린드버그는 “삶의 우선순위를 철저하게 하나님께 두었기에, 담배 회사의 파격적인 제안에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당시 “파리 신문에 이 일이 대서특필되었고, 많은 사람이 감동하여서 자신의 믿음을 살피며, 린드버그처럼 믿음을 지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을 지키는 삶은 믿음을 잃어버린 수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이끄는 힘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믿음을 지키며 경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코람 군도! 세상의 엄청난 공격과 박해에도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지금 “내가 어렵고 힘든 이유는, 믿음을 잃고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믿음을 회복해야!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을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한주도 “악한 세상에서 코람 군도, 믿음을 지키며 주님을 가깝게 따라가며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