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성경 퀴즈로 말씀을 시작하려 하는데, 성경에서 의기소침으로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탄원한 세 사람이” 누구일까요? 정답은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요나”입니다. 모세는 “과중한 업무로 힘들어서, 엘리야는 이세벨의 공격이 두려워서, 요나는 니느웨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자, 죽여 달라! 하나님께” 청했습니다. 저명한 “사회학자 버트램 브라운은 미국에서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감성적 질병으로, 사기저하, 의기소침을” 꼽았습니다.
심중에 “‘나는 할 수 없어! 어려워,’ 미국은 이런 사기저하와 의기소침을 치료하기 위해 연간 50억 달러 이상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기저하, 의기소침은 남이 아닌 바로 우리 이야기”입니다. 이민자로 “한때는 성공과 번영을 꿈꾸며 이국땅에 왔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육신의 연약함,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관계 단절로 인한 사기저하, 의기소침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팬더믹을 겪으며, 의기소침과 사기저하는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 예배자의 자세마저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상황과 처지가 각자 다를 뿐, 누구나 나름대로 깊은 밤을 통과하며” 살아갑니다. 비록 “새벽이 다가옴을 알지만, 깊은 밤을 통과하는 현실이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공생애 “마지막 밤! 주님은 십자가 사건이 다가올수록 두려움이 더” 커졌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런 주님의 상황을 전혀 깨닫지 못했고, 심지어 ‘누가 큰지’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유다는 “이미 돈을 받고, 주님을 팔 기회만 찾고 있었고, 제자들은 주께서 당신을 팔 자를 말씀했지만, 이를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본문 30절은 “이런 아픔이 깊은 밤에 있었다.” 강조합니다. 당시 “주님은 인생 중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밤을 맞아서 이를 통과하셔야!”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깊고 어두운 밤을 싫어하고, 가능하면 깊은 밤을 만나지 않기” 원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도 자력으로 어둡고 깊은 밤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 깊고 어두운 밤을 이겨낼 수 있다면, 어느 누가 깊은 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아파하겠어요? 어둡고 “깊은 밤은 오직 하나님 은혜와 말씀으로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 “세상은 봄이 되어 새싹이 돋아나고 있는데, 우리가 지금 통과 중인 깊고 어두운 밤을 어떻게 극복하고 내일을 열어갈지!” 살펴봅시다.
1. 비록 깊은 밤을 맞았지만, 영적으로 깨어서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갑자기 말씀하자, 모두가 깜짝 놀라서, ‘그가 누군지’ 물었고, 주님은 본문 26절에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주님은 “너무도 분명히 ‘유다가 팔 거야!’ 답했지만, 본문 28절은 당시 제자들의 상황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당시 “모든 제자가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있었기에,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고, 깊은 밤을 맞은 주님의 아픔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 어느 누가 자신 있게 본문의 제자를 책망할 수” 있겠어요? 현대 교회와 “기독교인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함은 영적으로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불행히도 “오늘 우리는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지도 모르고, 영적으로 잠들어 있음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도 모르고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람이 잠들어 있을 때를 생각하면, 영적으로 잠들어 있음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잠들면 못 보고 못 듣고, 말 못 하고, 의사 표현도 못 하고, 분별력도 없고, 상황 파악도” 못합니다. 잠들면 “예배와 찬양, 기도와 헌신은 물론 관계 형성도 불가능해서, 숨만 쉴 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 맙니다.
잠들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죽은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 보고 듣고 말하고, 분별력과 상황 파악도 하고, 예배와 찬양 드릴 수 있고, 기도와 헌신도 가능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능력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대 밤이 깊고 어둡지만, 교회와 기독교인은 반드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영혼만 깊은 밤을 통과해서 영생과 구원을 놓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고기는 “잠잘 때, 움직일 때, 죽을 때도 눈을 뜨고” 있습니다. 우리는 “‘물고기는 원래 그래!’ 생각하지만, 이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참으로” 큽니다. 초대교회 때 “많은 기독교인이 핍박을 피해 시체를 매장하던 로마의 지하동굴, 카타콤으로” 피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장례 장소를 신성시해서, 지하동굴에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기독교인은 카타콤의 벽면에 물고기 그름을 새겨 놓고, 무려 300년간 신앙을” 지켰습니다.
특히 “물고기에 익투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헬라어 첫 글자를 새겨” 넣었습니다. 물고기는 “깊고 어두운 지하동굴이지만, 힘들고 고된 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를 신뢰하며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인은 항상 깨어 있어야 어둡고 깊은 밤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이 “항상 깨어서 밤을 통과해야, 겉 사람은 후패해도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영생에서 멀어지고, 오직 깨어 있는 영혼만 천국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롬 13:12~14절을 읽어보기” 원합니다.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바울은 “밤은 인간을 술에 취해 방탕하게 하고, 음란과 호색에 빠지게 하고, 다투고 시기하게 하기에, 밤이 깊을수록 더더욱 빛의 갑옷,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자!” 강권합니다. 여기서 “빛의 갑옷,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영적으로 깨어 있으려면, 더더욱 말씀으로 무장하라는 도전”입니다. 인간은 “흙으로 빚음을 받고 하나님의 생기로 만들어졌지만, 그 시작은 하나님 말씀으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말씀으로 무장되면, 아무리 깊은 밤이라도 실족하지 않고,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최근 “밤이 여전히 깊지만, 백신 접종이 늘어가기에, 이제 다시 성경을 펴고, 예배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밤이 “깊을수록 의기소침보다 다시 말씀 앞에 서서 하나님의 위로와 메시지, 격려와 어루만짐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주도 영적으로 깨어서, 주님을 더 신실하게 따라가서, 깊은 밤에도 넘어지지 않고 승리하기” 원합니다.
2. 비록 깊은 밤을 맞았지만, 서로 합력하며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말씀하자, 제자들의 반응이 본문 22절에” 나옵니다.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당시 “제자들은 서로를 의심하면서, 이미 서로 합력함이 깨져” 있었습니다. 같은 “시간, 눅 22:24절은, 또 그들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말씀합니다. 당시 “주님은 가장 깊고 힘든 밤을 보내고 있었는데, 제자들은 영적으로 잠들었고, 게다가 합력마저 깨져” 있었습니다.
합력을 “잃었기에, 주님이 체포된 후, 제자들은 각자 살겠다고” 도망쳤습니다. 합력을 “잃었기에, 제자들은 급격히 사기저하, 의기소침으로 깊은 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이 부족하고 연약해서 깊은 밤에 빠져 아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과 성령님의 은혜가 가까이 있고, 섬길 교회와 예배자리, 동역자도 적지!” 않습니다. 어쩌면 “과거 어느 때보다 풍성한 은혜와 영적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깊은 밤에 빠져 살아가는 이유는, 주 안에서 합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보수와 진보가 대결하듯, 현대 교회도 사소한 일로 인한 갈등과 다툼이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사소한 “문제지만, 자존심과 과거의 상처 때문에 서로 합력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비록 부족하고 연약해도, 합력하여 선을 추구할 수 있다면, 깊은 밤을 더 쉽게, 더 빨리, 더 안전하게 통과하며, 더 힘있게 주님을 따라가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합력을 원한다면, 서로 달라도 같은 점, 공통점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남성이 실직 후, 어쩔 수 없이 도둑이 되어 남의 집 담을” 넘었습니다. 그러다 “주인과 마주치자, 도둑이 권총을 겨누며 ‘손들어!’ 소리치자, 집주인이 한쪽 팔만” 올렸습니다. 도둑이 “‘양손 다 들어!’ 소리치자, 주인이 ‘지금 내가 신경통 때문에 한 손을 못 든다!'” 답했습니다. “어! 그래요? 나도 신경통 때문에 일을 잃고 도둑질을 하는 것인데!”
마침내 “도둑과 주인은, 마치 친한 친구처럼 신경통이란 공통주제로 밤새 대화 후, 서로 ‘또 만나자!’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이는 “미국의 유명한 단편 소설가인 오 헨리의 ‘강도와 신경통’의 내용”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서로 다르지만, 공통점을 찾아서 서로를 이해하려 하면, 깊이 소통하며 합력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기독교인이란 가장 큰 공통점보다 사소한 차이점을 보고 시험과 상처에 빠지기에, 우리의 밤은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삼상 20:42절은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말씀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모든 것이 달랐지만, 서로 합력해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핵심은 “다윗과 요나단이 같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 하나님께서 다윗과 요나단 두 사람의 중심에 좌정하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왕자와 목동이었지만, 왕족과 시골 촌뜨기로 달랐지만, 20세 이상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모두의 평가는 물론 영향력도 매우 달랐지만, 그들 중간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좌정하고” 계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이 겪는 깊고 어두운 밤, 사기저하와 의기소침은 팬더믹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과 성경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불행히도 “같은 교회에서 같이 예배를 드려도 성도들 중간에 하나님이 없고, 오히려 자기 의로움과 편견, 고정관념, 상처와 시험이 더 많음이 문제”입니다. 각자가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께서 중간에 계시길 원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처럼 서로 등을 돌리고 있으면서, 다툼과 분쟁을 끝내지 못하면서,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정말 깊고 어두운 밤을 통과할 수 있을지 심각하게 자문해야!” 합니다.
깊은 밤에 “더 합력하려면, 모든 가정의 가족 사이에, 교회의 성도들 중간에 하나님께서 계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서로를 향해 등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 “복음은 죄인 사이에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서 합력하도록 강권하신 은혜”입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중간에 모시고, 합력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한주도 “하나님을 중간에 모시고 합력하여 주님을 따라감으로, 깊은 밤을 극복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