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곤충 중에서 벌이 가장 부지런하다고” 합니다. 벌은 “약 100g의 꿀을 얻기 위해 무려 만 이천 개의 꽂을 찾아” 다닙니다. 벌은 “꿀을 얻으려고, 하루 평균 400개의 꽃을 찾아가고, 많게는 12Km 거리를 날아다니기도” 합니다. 벌은 “그 수명이 그렇게 길지 않지만, 평생 지구 세 바퀴를 돌 정도로 왕성하고 힘있게 활동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먹는 소량의 꿀도, 수많은 벌이 힘쓰고 애쓴 결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물인 “벌도 이처럼 애쓰고 힘쓰며 살아가는데, 하나님 형상으로 만들어진 우리는 한 번뿐인 인생을 ‘얼마나 힘쓰며 살아가는지, 어떤 일에 얼마나 힘쓰며 살아가는지!’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날 “세상이 교회와 기독교인을 비판하는 이유는, 정말 힘써야 할 일보다, 힘쓰지 말아야 하고, 힘쓰면 안 되는 일에 힘쓰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생각할수록 “이는 너무도 무익한 시간 낭비이며, 나와 주변 사람, 하나님도 힘들게 하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크레테인은 “바울과 디도를 통해 복음을 받았지만, 여전히 쓸데없는 변론과 족보 이야기, 분쟁과 다툼, 이단 등 무익하고 헛된 일에 빠져” 살았습니다. 크레테인은 “힘쓰지 말아야 하고, 힘쓰면 안 되는 일에 힘쓰며, 시간 낭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조심하여 선한 일에 힘쓰며 살아가라!” 도전합니다. 선하다. “칼로스는 도덕적인 선함과 외적 아름다움을 함께 말하는데, 당시 크레테인의 삶이 이처럼 선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크레테인이 힘써야 할 선한 일이 무엇인지 교훈하기 원했던 것”입니다. 팬더믹이 “계속 이어지면서, 우리는 정말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점점 잊어버리고 잃어가면서, 점점 무기력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혹자는 주 안에서 힘써야 할 일을 힘쓰며 살아가지만, 혹자는 무기력과 위축에 빠져 답답하게” 살아갑니다.
문제는 “한 번뿐인 인생을 힘쓰며 살아가야 하는데, ‘과연 정말 힘써야 할 일, 선한 일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또한 “무기력과 위축에 깊이 빠져 있다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무엇에 힘써야 할지!’ 답을 찾아야!” 합니다. 앞으로 “팬더믹 후 새로운 상황이 전개될 것이기에, 지금 내가 선한 일에 힘쓰지 않으면, 정작 팬더믹이 끝나도 선한 일에 힘쓰며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해 힘쓰는 삶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 선한 일에 힘써야 하기에,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선한 일에 힘쓰는 것은 아름답고 유익하지만, 무익하고 헛된 일은 피해야 한다.” 말합니다. 특히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 분쟁과 다툼, 이단을 피해야 한다!” 강조합니다. 여기서 “어리석다! 모로스는 ‘지혜 없는, 쓸데없는, 무용지물인, 경건하지 않은’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당시 크레테인이 힘썼던 변론과 족보 이야기, 분쟁과 다툼, 이단은 모두 땅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어리석다! 강하게” 책망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피하다, 원어를 보면, 이처럼 어리석은 것에서 돌아서다, 어울릴 필요가 없다!” 명했습니다. 오늘날 “탈현대주의는 피해야 할 것과 피하지 말아야 할 것의 기준을, 완전히 틀리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상은 “주변 사람과 하나님은 상관없고, 그저 내게 좋고 유익하면, 편하면, 피할 것이 아니라 마음대로 해도 된다!”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과 성령의 교훈이 아니면 피하라고 말씀하지만, 이 교훈이 점점 무색해져” 갑니다.
이처럼 “피해야 할 것의 기준이 무너지기에, 힘쓰며 살아가는 삶의 방향도 점점 무너져가는 것”입니다. 마침내 “선악의 분별도 못 하고, 피해야 할 것을 좇다가 계속 허송세월하는 삶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저희 “아들이 앞으로 하고 싶은 일, 꼭 해야 할 일을 잘 선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서, 제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일, 네가 좋아하는 일, 네가 잘 할 수 있는 일” 여기서 “하나님께 영광을 가장 먼저 강조한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면 사람에게도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나도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다면, 절대로 피하지 말고 힘써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의 유익보다 내가 좋아하고 잘 하는 일, 내게 유익이 되는 것이 최우선의 기준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항상 나! 나를 먼저 생각하기에, 피해야 할 것을 좇고서도 ‘괜찮다! 문제없다!’ 합리화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주님을 팔려고 할 때, 하나님의 영광과 자기 생각 중 무엇이” 먼저였을까요? 당시 “유다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제 발로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팔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으로 군사를 이끌고 와서, ‘주님이 누구인지!’ 입맞춤까지 하며, 주님을 팔기 위해” 힘썼습니다.
유다는 “최후의 만찬 중, 주께서 ‘누군가 나를 팔 것이다.’ 말씀할 때, 다시 생각해서 유혹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나와, 대적자에게 가는 중에도 또 생각해서 유혹을 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피할 것을 피하지 않았고, 힘쓰지 말아야 할 일에 힘써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많은 분이 “나는 쉽게 넘어가지 않아! 나는 달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교만과 착각을 버리고, 악이고 아니라면, 반드시 이를 피해야!” 합니다.
어떤 “청년이 유흥가에 가면서, ‘기독교인은 어디든 갈 수 있다!’ 말하자, 목사가 이렇게” 조언합니다. “‘그래, 네 자유니까 갈 수 있지!’ 그러면서 이런 예화를 들려” 주었습니다. “어떤 여성이 흰옷을 입고 탄광에 갈 수 있지만, 아무도 흰옷을 입고 갱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 이유는 사람이 흰옷을 입고 갱도에 들어갈 수 있지만, 누구도 흰옷 그대로 갱도를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니고 틀린 것을 피하는 것은 절대로 패배가” 아닙니다.
실제로 “악을 피해서, 악을 체험하지 않고, 그 대신 오히려 선한 일에 더 힘쓸 수 있다면, 그 삶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에 힘쓰려면, 항상 하나님 말씀이 선택과 분별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과 안 맞는 거짓이라면, 편법과 불법이면, 하나님 방법이 아니라면, 주변이 힘들어하면, 이를 멈추고 피해야!” 합니다. 특히 “기독교인은 무엇보다 성령께서 아니다, 그만하라, 틀렸다 말씀하는 것은 멈추거나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영혼은 매번 무의미하고 열매 없는 일, 무가치하고 비생산적인 일에만 힘쓰며, 시간 낭비하며” 살아갑니다. 성령님과 가족, “주변 모두가 아니라고 하는데, 끝까지 피하지 않고 고집부리며 행하는 것은 절대로 선한 삶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영혼은 피할 것을 피하고, 오히려 정말 힘써야 할 일에 온 힘을 쓰며” 살아갑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피할 것을 피하고, 하나님 기뻐하는 일에 힘써서, 항상 영적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
2. 선한 일에 힘써야 하기에,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10절은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말씀합니다. 당시 “바울과 디도가 크레테에 복음을 전했지만, 이미 이단도 들어와” 있었습니다. 이단은 “언제나 교묘하게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고, 바른 교훈에 쉽게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크레테인에게 이단을 멀리하고 교제하지 말라!” 명했습니다. 실제로 “이단은 인간적인 언변과 지식으로 이길 수 없기에, 오히려 하나님의 일하심에 맡기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단을 피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맡긴 후, 크레테인은 하나님 백성답게 선한 일에 힘쓰며 살아가야 함을 도전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이단이 우후죽순처럼 발생해서, 이단에 대한 신학적 규명이 정말 쉽지!” 않습니다. 이단은 “복음을 잘못 이해하고, 복음을 왜곡하여 주장하고, 자기들 주장만 진리로 믿는 영적으로 넘어진 집단”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름대로 열정적인 신앙인이 이단에 빠지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게다가 “이단은 거짓 교리를 열심히 공부하며 추종하고, 포교를 위해 물질과 시간을 아끼지!” 않습니다. 이처럼 “이단은 거짓에도 열정적인데, 기독교인은 너무도 나태하고” 게으릅니다. 영적 “전쟁에서, 바른 교훈과 가르침으로 이단을 바꾸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에 “우리도 이단을 한두 번 권하고, 그 후는 기도하며 그 영혼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처럼 “할 수 없는 일에 힘쓰기보다, 정말 힘써야 할 일에 힘쓰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린이는 “뛰놀고 게임도 하며 커야 하는데, 만일 기름값과 생활비 문제로 잠 못 자고 걱정한다면, 그 아이는 빨리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합니다. 오늘날 “첨단 과학이 발전해도, 환경과 자연재해, 경제 불황과 인권 문제, 실업 문제와 국제 분쟁 등,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근본적인 답을 내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문제는 하나님 또는 전문가에게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고, 꼭 필요한 일, 하나님 기뻐하는 일에 힘쓰며 살아가야!” 합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귀향 중, 에서가 400명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에 많이” 놀랐습니다. 20년 전, “형을 속였기에, 형이 어떻게 나올지! 너무도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에 “야곱은 재산을 절반으로 나누어 절반을 잃으면, 절반으로 재기할 계획을” 세웁니다. 좋은 “짐승을 골라 세 번이나 형의 마음을 돌리려고 뇌물까지 보냈지만, 마음에 평안함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야곱은 다 내려놓고, 홀로 얍복 강에서 하나님과 독대하며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자신이 “힘써도 안 되는 것을 다 내려놓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하나님께 기도하며 다 맡김으로, 형의 공격과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팬더믹은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하던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를 깊이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 다 맡겨야!” 합니다.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하나님께 미루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혜로운 영혼은 매사에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인정하고, 전부를 온전히” 맡깁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영혼은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데, 혼자 해 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다가” 넘어집니다. 수상 구조원은 “누군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려도 절대로 바로 구하지!” 않습니다. 본능적으로, “물에 빠진 사람은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무엇인가를 붙잡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수상 구조원이 “아무리 수영을 잘 해도 필사적으로 붙잡으려는 사람을 구해오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상 보조원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거의 녹초가 되기까지!” 기다립니다. 마침내 “물에 빠진 사람이 숨이 차고 기진맥진해서 물에 가라앉을 바로 그때, 물에 들어가서, 사람을” 건져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도, 우리가 할 수 없으면서 자기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보려 발버둥을 치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울 때, 나부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내 인생과 미래를 맡기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시간, 사람, 방법으로 일하기에, 내 삶이 달라지고, 살아날 수” 있습니다. 팬더믹을 “겪으며, 우리가 할 수 없고 피해야 할 것 때문에 고민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 맡기고, 할 수 있는 것에 헌신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순절인데 “한주도 바른 분별력으로, 하나님께 맡길 것을 맡기고, 선한 일에 충성하며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