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아는 어떤 권사님은 80세가 넘으셨는데, 지금도 물질의 복, 자녀의 복, 건강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데, 그 간증이” 이렇습니다. 초등학교 때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교사가 아이들에게 신앙을 포기하라!” 강요했습니다. 당시 “급우 중 대다수가 교회를 다녔지만, 너무 무서워서 예수를 부인했지만, 이분만 끝까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마침내 “반장 후보에서 탈락했고, 모두에게 예수쟁이라고 많은 핍박과 수모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당시 “철없는 어린애가 세상과 공산주의의 종이 아닌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버거웠겠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비록 어렸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은 작은 믿음을 보시고, 지금까지 평생을 책임져 주셨다는 간증”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 백성이 아닌 세상의 종으로 살아가는 영혼이 참으로” 많습니다. 반면에 “악한 세상에서 신실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영혼은 점점 줄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나부터 세상 종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크레테인은 “바울을 알기 전, 세상 정욕대로 살아서 경건과 무관한 세상의 종”이었습니다. 특히 “바울은 본문 14절에서, 크테테인에게 주신 하나님 사랑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종이었던 여러분에게 당신 전부를 주고, 모든 불법을 속량하셔서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크레테인이 더는 세상의 종이 아닌 하나님 백성으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본서를 썼고, 크레테에 디도를 남겼던 것”입니다. 우리는 “2년간 이어지는 팬더믹으로, 하나님 백성이 가져야 할 영적 정체성을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팬더믹을 “겪으며, 혹자는 힘든 중에도 더 신실해졌지만, 혹자는 더 느슨해지는 양극화 현상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팬더믹 후, ‘느슨해진 내 신앙을 어떻게 회복할까? 어떻게 다시 하나님 백성답게 살까?’ 깊이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또한 “지금 나는 팬더믹을 통과하면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는가? 아니면 세상 정욕에 빠져 세상의 종으로 살아가는가?’ 깊이 자문해야 할 때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세상 종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세상의 종이 아닌 하나님 백성답게 이 땅을 살아갈 수 있을지” 살펴봅시다.
1.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9절은 “종들은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며” 말씀합니다. 생각해 보면 “당시 크레테에는 육신의 종, 노예보다 정욕을 추종하는 세상의 종이 훨씬 더 많았을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크레테인이 더는 세상과 정욕의 종이 아닌 하나님 백성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기 원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기쁘게 하다. 유아레스토스는 마음에 드는 정도를 넘어, 감정적으로 매우 기쁘다는 뜻”입니다.
특히 “유아레스토스는 사람은 물론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경우에도”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종은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 백성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불신자와 다른 기독교인의 가장 큰 특징은,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주변을 보면, 말로는 하나님 백성답게 살기 원한다면서, 보이고 들리는 대로, 세상에 빠져 살아가는 영혼이 더” 많습니다.
게다가 “하나님 백성이라면서, 하나님은 항상 뒷전”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죄를 짓고 악한 일을 해도, 그냥 모른 척하고, 이해하며 넘어가 주셔야 한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말씀으로 창조되었기에, 비록 세상에 빠져 작은 즐거움이 있어도, 이내 마음의 참 평안을 느끼지 못하고, 후회하는 마음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는 고집부리지 말고, 나와 사람, 세상이 아닌 하나님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출애굽 1세대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모두 다 광야에서” 사망했습니다. 당시 “출애굽 1세대는 역사상 가장 많은 하나님의 이적을 직접 체험했지만, 그들은 애굽, 세상의 종으로 살았던 삶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을 다 겪었고, 홍해가 갈라진 후 마른 땅을 걸어서” 건너갔습니다. 척박한 “광야의 반석에서 생수가 흘러나오고,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고,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십계명까지” 받았습니다.
40년간 “옷이 해어지지 않고, 발도 부르트지 않았지만, 그들은 계속 애굽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세상의 종으로 살아서, 매번 애굽으로 돌아가자!” 소리쳤습니다. 출애굽 1세대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보다, 내 입맛과 정욕대로 살았고, 그렇게 세상의 종으로 살다가 광야에서 모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우리도 출애굽 1세대처럼 하나님 백성보다 세상의 종으로 살아갈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가 “내 뜻대로 살아온 결과가 지금의 내 모습이고, 지금 내 모습이 마음에 안 든다면, 더는 고집부리지 말고, 이제부터라도 하나님 기뻐하는 삶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운전 중 “길을 잘못 들어 헤매면, 헤맨 만큼 돌아와야 하는 것처럼, 더 나빠지기 전에, 돌아오는 길이 멀지 않도록, 이제부터라도 하나님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유는 “나와 세상이 기뻐하는 삶에서 하나님 기뻐하는 삶으로 바뀌어야, 상급과 열매가 있기 때문”입니다.
슈바이처는 “철학과 신학, 음악과 의학 등, 네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세계적 석학”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1913년부터, 아프리카에서 가장 덥고, 독사와 악어가 우글거리는 땅, 가장 척박한 땅, 가봉의 랑바레네에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슈바이처는 닭을 키우던 장소를 개조하여 병원을 짓고 의료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슈바이처도 “사람이기에, 힘들고 어려울 때, ‘내가 이런 곳까지 오다니! 나는 정말 바보야!’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변 지인들은 ‘당신은 정말 세상에서 최고의 바보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위로했습니다. 오늘 이 아침! “‘나는 과연 누구를 기쁘게 하며, 지금 주어진 시간과 삶을 살아가는지!’ 자문해” 봅시다. 많은 사람이 “지금도 출세와 성공을 위해, 주변 사람과 세상을 기쁘게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본분은 하나님을 영원토록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백성답게 살면, 세상이 ‘바보 같다, 어리석다.’ 조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도, 힘들고 좌절할 수 있고, 아프고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평가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 먼저임을 잘” 압니다. 여전히 “힘든 터널을 지나고 있지만, 한주도 하나님 백성답게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
2. 하나님 백성답게 살려면, 재림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 13절에서, 우리를 세상의 종이 아닌 하나님 백성 삼으신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다!” 크레테인은 “바울을 만나기 전, 경건하지 않았고, 세상 정욕대로, 세상의 종으로 살았기에, 그들을 향한 평가가 선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크레테인이 세상의 종이 되어 눈앞만 보고, 정욕에 빠져 살아가는 것을 멈추고 정리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하나님 백성답게 소망과 믿음으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기 원하며, 사랑하는 아들 디도를 크레테에 남겨 놓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는 주님의 재림을 초대교회가 만든 허구라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많은 기독교인조차, 재림을 불신하고 나와 무관한 이야기로 치부하고” 살아갑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조차 이처럼 재림과 성경의 교훈을 믿지 않지만, 주님의 재림은 분명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때, 주께서 천사 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특히 “주님의 재림은 우리가 상상하거나 생각하지 않은 때, 홀연히 임할 것”입니다. 1986-08-22 “한밤중, 카메룬의 한 화산에서 유독가스가 유출되어 순식간에 1,700여 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원인은 “카메룬 북서부 니오스호에서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유독가스가 수면을 뚫고 나와서, 잠들어 있는 세 개의 마을을 덮쳤던 것”입니다.
당시 “사고현장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온했고, 가옥과 주변은 그대로인데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누구도 “이처럼 참혹한 사고를 상상조차 못 한 것처럼, 우리 주님의 재림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재림은 “인간이 아무리 반박하고 외면해도, 분명히 성취될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세상의 종으로 준비 없이 재림을 맞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백성으로 믿음과 소망으로 주님을 맞이할 것인가? 그 차이에” 있습니다.
구약은 “주님의 오심을 456회 예언했고,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또한 “신구약에서 주님의 재림을 1,518회 예언하기에, 재림도 분명히 성취될 것”입니다. 인간이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더는 이 땅이 아닌 하늘에 집중하고 살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문제는 “재림이 있고 없고보다, 내가 재림을 믿는가?”에 있습니다. 아무리 “재림이 영광스러워도, 내가 재림을 부인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나는 세상 종으로 삶을 마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재림을 믿고, 재림을 기다리는 삶이 성경의 교훈과 일치해야!” 합니다. 주님은 “마 24:39절에서, 재림을 노아의 홍수와 비교하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주님은 “재림의 때, 혹자는 밭에서 일하고, 혹자는 맷돌을 돌리며 일할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각자가 하나님 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때, 재림이 임할 것이다!” 말씀합니다. 그렇게 “세상 종이 아닌 하나님 백성으로 주어진 일에 열심히 그리고 신실하게 살아온 영혼에게 구원이 있다는 약속”입니다. 오늘날 “시한부 종말론은 학업과 일상까지 모든 것을 다 멈추고, 재산까지 다 처분하고 재림을 기다려야 한다!” 미혹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일상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중, 재림이 있을 것이다!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재림을 기다리는 가장 바른 자세는, 더는 세상의 종이 아닌 하나님 백성으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팬더믹을 “겪으며, 수많은 사람이 힘들고 어렵다고, 자포자기하고 낙담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인 인간은 세상 무게에 눌려 낙담할수록, 하나님 백성이 아닌 세상의 종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더” 커집니다. 물론 “지금은 전후좌우, 동서남북이 다 막혀있는 시대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방이 막혀있어도, 위는 열려 있고, 위에는 우리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나부터 시대가 악하다고, 세상에 미혹되어 넘어지지 말고, 내게 주어진 일에 더 헌신하고 충성하며 팬더믹을 이겨 나가야!” 합니다. 이처럼 “바른 재림 신앙이 나에게 복과 소망이 되고, 지금의 어려움을 이기는 힘이 될 것”입니다. 한주도 “쉽지 않겠지만, 재림 신앙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일에 더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