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6-18! “한국은 월드컵 16강 전에서 세계적 강팀이었던 이탈리아를” 만났습니다. 당시 “프란체스코 토티는 한국전은 1골만 넣으면 충분히 이긴다며 한국 축구를” 조롱했습니다. 특히 “전반에 크리스티안 파누치가 설기현의 옷을 잡아채서 천금 같은 페널티 킥을 얻었지만, 안타깝게도, 안정환이 이를 실축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관중의 엄청난 비난과 야유가 쏟아졌지만, 히딩크 감독은 안정환을 바꾸지 않고 끝까지 믿고 기다려” 주었습니다.
마침내 “연장전에, 안정환은 기적 같은 헤딩골을 터뜨렸고, 한국은 8강에” 진출했습니다. 당시 “히딩크가 끝까지 선수를 믿고 기다림이 힘이자 승리의 요인”이었습니다. 현대인은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고, 빨리빨리 성급한 결과만” 재촉합니다. 세상이 “속도를 강조하고, 기다려서 얻는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게다가 “우리는 꼭 기다려야 할 것보다, 기다리지 말아야 할 것, 안 기다려도 되는 것을 기다리며 살아갈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기다림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소망으로 더 나아짐을 기대하는 신앙”입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13개 서신서 중 가장 늦게 기록되었고, 당시 바울은 로마에서 투옥 중이었고, 대화재로 기독교인을 향한 박해가 점점 더 가중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많은 동역자가 바울을 떠나서 외로움이 깊었고, 드로아에 놓고 온 겉옷이 필요할 정도로 추위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영적 아들 디모데가 오기를 더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당시 “바울은 박해가 약해지길 기다렸을 것이고, 천국에서 받을 의의 면류관을 기다렸고, 디모데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되는 데, 대림절에는 손님을 기다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연말이 “다가올수록! 우리가 집중해서 기다려야 할 대상은 세속적 누군가, 무엇인가가 아니고,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물론 “대림절을 맞으며, 우리 각자가 기다리는 것이 서로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오늘 우리는 모두 팬더믹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다시 마음껏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기다리고, 성도들이 만나기를 기다리고, 선교지에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시간을” 기다립니다. 연말일수록 “우리는 흐트러짐 없이 내 신앙과 삶을 가꾸며 주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2020년 “대림절 첫 주일!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기다리며 살아가야 할지!” 살펴봅시다.
1. 대림절은 일시적 회복이 아니라, 온전한 회복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당시 “바울은 나이가 들어 육체적으로 약해져서, 두꺼운 겉옷이 필요할 정도로 추위에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디모데가 더 보고 싶었고, 그래서 디모데가 속히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이 진심으로 기다린 것은 훗날 천국에서 하나님께서 주실 의의 면류관”이었습니다. 당시 “바울에게 디모데와 의의 면류관 둘 다 중요했지만, 하나는 일시적 기다림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영원을 향한 기다림”이었습니다.
바울은 “어렵고 힘들었지만, 영적인 아들 디모데의 방문보다 오히려 평생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살아왔기에, 의의 면류관을 더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바울이 “로마의 차디찬 감옥, 외로움과 육체적 연약함을 이기게 한 힘은 바로 천국에 대한 기다림”이었습니다. 올해 “3월 중순 이후! 교회는 온라인 체제로 바뀌어 지금까지 예배가 정상화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시 “많은 분이 몇 달 고생하면 괜찮을 줄 알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습니다.
2020년! “우리는 모두 경제적 어려움, 육체적 건강에 대한 두려움과 단절로 인해 힘든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누구나 지금의 재앙이 속히 종식되고, 다시 정상적인 삶, 열심히 일하며 바쁜 삶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고대합니다. 문제는 “세계적인 팬더믹이 끝나길 기다리지만, 이는 철저하게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기다림일 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의의 면류관, 영원을 향한 기다림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야!” 합니다.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처럼,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것은 온전한 것과 절대로 비교할 수 없고, 이는 기다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일본에서 친구 대행 서비스 사업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실례로 “놀이공원에 같이 갈 친구, 함께 쇼핑할 친구, 함께 식사할 친구, 같이 운동할 친구, 속상한 일을 하소연하고 털어놓을 친구를 대여해 주는 사업”이었습니다. 가격이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이 사업이 일본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잠깐 함께할 사람을 기다리면서 소소한 기쁨도 있겠지만, 이는 그저 미봉책일 뿐”입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 각자도 기다림이 있지만, 의의 면류관을 구하는 본질적인 기다림보다, 눈앞의 고통과 재앙이 끝나길 기다리고, 삶의 어려움이 해결되기를 기다리는 모습! 일시적 제한적 기다림이 더” 큽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기다려야 할 것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영원하고 온전한 천국과 의의 면류관, 하나님 상급”입니다.
대림절은 “성자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심과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세속적 “기다림이 아니라, 복음과 하나님 약속을 기다리며, 나를 영적으로 가꾸어가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주님의 오심과 재림을 기다려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부족해도 “우리가 영적 본질을 기다려야 우리 삶이 든든해지고, 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기다리며 굳건해져야! 삶의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렵고 힘들수록! 나부터, 나만이라도, 일시적이고 세속적인 것보다 복음의 본질을 기다리며, 지금의 아픔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요 4:14 절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말씀합니다. 당시 “사마리아 여인의 삶은 피폐했고 너무도 세속적”이었습니다. 여인이 “있다가 없어질 것, 이 땅의 한시적인 것을 찾고 기다리며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주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샘물, 정말 찾고 취해야 할 복음! 꼭 기다려야 할 본질이 무엇이고 누구인지, 여인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일시적이고 가시적인 것만 기다리며 살아갈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심지어 “아닌 줄 알고, 틀린 줄 알면서 고집부리며 헛된 것만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2020년 “참으로 어둡고 힘든 터널을 지나고 있기에, 우리가 누구를 무엇을 기다려야 할지 바르게 정립해야, 지금의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지금 내가 가진 기다림이 성경과 맞는가? 일시적이고 제한적인가? 깊이 자문해야!” 합니다. 2020년 “대림절, 우리가 진심으로 찾아야 할 본질을 기다리며 승리하기” 원합니다.
2. 대림절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노년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본문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비록 “지금은 추위에 떠는 초라한 노인이지만, 바울은 천국에서 의의 면류관을 꼭 받을 수 있다는 확신으로, 차디찬 옥중에서 날마다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여기서 “선하다! 칼론은 ‘건전하다. 복음에 맞다.’라는 의미로, 이는 바울의 노년기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쉽지 않았지만, 매일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을 지켰고, 걸어가지 않고 달려갔으며, 간절함으로 의의 면류관을”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영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길을 걸어서, 디모데와 주변 모두가 반드시 닮아야 할 믿음의 본을” 남겼습니다. 2020년은 “불안과 두려움, 무기력과 답답함이 참으로 큰 한 해”입니다. 경제적 “어려움의 가중으로 인한 불안감과 두려움이 증폭되었고, 매일 갇혀 있는 무기력과 답답함이 너무도” 컸습니다.
그러는 중! “선한 싸움은 고사하고, 하루하루를 버텨 내기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림절 첫 주일! 바울은 우리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며 구주 예수의 오심을 기다려라!” 도전합니다. 최근 “백신의 개발로 재앙의 끝이 조금씩 보이기에, 다시 복음에 맞는 삶을 회복하고, 신실하고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선한 싸움을 “싸울 때, 지금의 두려움과 불안, 무기력과 답답함을 이겨내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과거의 상처에 계속 붙잡혀서 두려움과 불안, 답답함과 무기력에 빠져 있다면, 어떻게 하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겠어요? 오스카 와일드의 “지옥의 단편이란 글에는 주정뱅이, 매춘부, 그리고 불량배가” 등장합니다. 주님께서 “주정뱅이에게 ‘왜 이렇게 살아가니?’ 묻자, 주정뱅이가 이렇게” 답합니다. “당신이 장애인인 나를 고치셨는데, 아무도 내게 일거리를 주지 않아서, 너무 화가 나서 술을 마시며 이처럼 주정뱅이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매춘부에게 ‘왜 이렇게 살아가니?’ 묻자, 여인이” 답합니다. “당신이 제게 새로운 삶을 주셨지만, 너무 외롭고 고독해서 다시 밤거리로 나왔어요!” 주님께서 “불량배에게 같은 질문을 하자, 불량배가” 답합니다. “당신이 소경인 나를 보게 하셨는데, 세상이 온통 악했어요! 그래서 화풀이하다 보니 이렇게 불량배가 되었습니다.”
같은 “시간과 상황, 장소에 있어도 불평과 원망, 핑계만 찾는다면, 절대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반면에 “그래도 다시 일어나려는 영혼, 달려가려는 영혼, 영원을 추구하려는 영혼만이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더는 나태하고 주저앉아 있을 수 없기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성탄과 “재림은 그냥 멀뚱히 바라볼 것이 아니라, 확신과 사모함으로 기다려야 할 은혜”입니다.
주인이 “세 종의 능력에 맞게 하나, 둘 다섯 달란트를” 줍니다. 이에 “둘과 다섯 달란트 받은 영혼은 주인이 돌아오기까지 매일 선한 싸움을 싸우며 처음 받은 것의 두 배를 남겼고, 마침내 주인에게 큰 칭찬을” 들었습니다. 반면에 “한 달란트 받은 영혼은 무기력하게 돈을 땅에 묻어두고 선한 싸움 없이 살아서 큰 책망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 청년이 약 17년간 일하며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가질 수 있는 거액”입니다. 이는 “비록 지금 내 삶이 힘들고 어렵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가 절대로 작지 않음을” 말씀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다시 일어나서 선한 싸움을 싸우고, 걷지 않고 달려가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도전하십니다. 문제는 “충분히 할 수 있고, 승리에 대한 보장도 있지만, 내가 선한 싸움에 출정하려는 의지가” 없습니다.
대림절은 “지나온 삶을 회개하고, 다시 새롭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거룩한 성탄을 믿음으로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이전보다 “더 나아지고 성장하기를 원하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소망의 절기”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힘을 내야 하고, 이전보다 더 하나님을 깊고 온전히 신뢰하며, 구주 예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한주도 “악한 세상에서 다시 일어나서 달려가고, 선한 싸움을 싸우며 구주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며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