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죽이란 “대나무는 씨를 뿌린 후, 한동안 정성껏 물을 주며 가꾸어도 싹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약 5년이 지나면, 손가락 크기의 죽순이 돋아나고, 그 후 거의 매일 80 Cm씩 자라서, 무려 30m에 달하는 거목이” 됩니다. 학자들은 “모죽이 사방으로 그 뿌리를 깊이 내리는 시간 때문에 성장이 느린 것이다!” 말합니다. 이처럼 “처음에는 성장이 더디지만,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린 모죽은 크게 자라서 많은 동식물을 살리는 숲을” 이룹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아지고 자라길 원하고, 하나님도 우리가 날마다 성장하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영적 양극화 현상이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혹자는 “자라지 못하고 정체를 넘어 점점 위축되어” 갑니다. 반면에 “혹자는 어려운 중에도 믿음의 뿌리를 바르게 내려서 점점 더” 자라갑니다. 문제는 “지금 내가 영적으로 자라지 않으면 코로나-19를 이길 수 없고, 힘들어도 성장해야 더 나은 미래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은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겨자씨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면 약 5m의 거목이” 됩니다. 마침내 “작은 겨자씨가 많은 생명체를 살리는 큰 숲을” 이룹니다. 주님은 “이를 통해, 우리가 겨자씨처럼 작은 모습 그대로 살지 말아야 한다! 작지만 자라서 더 많은 영혼을 살리고 세워야 한다!” 도전합니다. 우리가 “겨자씨처럼 작고 약하지만, 코로나-19로 힘들고 어렵지만, 자라가야 천국의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1992년을 기점으로 점점 축소되고 있는데, 특히 주일학교의 급격한 감소, 청년층의 교회 이탈과 노년층의 증가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문제는 “그나마 기독교인조차 그 신앙이 자라기보다 정체되어가고” 있습니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교회는 성장은 고사하고, 현상유지만 해도 감지덕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자라려는 시도와 노력보다, 코로나-19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교회로서 제구실하고, 성도가 성도로서 제구실하면 충분히 성장하고 자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고난을 통해 더 자랄 수 있지만, 안 된다는 자포자기, 패배의식이 우리 성장을”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보다 바로 내가, 영적으로 더 자라고 성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뜻에 맞게 자라고 성장할지!” 살펴봅시다.

1. 우리 삶이 하나님께 더 깊이 뿌리를 내려야 자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씨 뿌리는 비유와 겨자씨 비유를 함께 생각해보면, 작은 겨자씨가 땅에 뿌려진 후, 새가 그 씨를 먹을 수 있고, 햇빛에 말라 버릴 수도” 있습니다. 만일 “가시밭에 뿌려졌다면, 겨자씨는 기운이 막혀 자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작은 겨자씨가 자라기까지 좋은 땅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만, 또 한 가지! 그 뿌리를 땅에 깊숙이 내려야!” 합니다. 뿌리가 “깊을수록, 추위와 비바람을 견딜 수 있고, 계속 자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믿음이 자라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잘못된 곳에 뿌리를 내리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힘들다고 하나님이 아닌 눈앞의 것, 있다가 없어질 것에 삶의 뿌리를” 내립니다. 어렵고 “힘들다고 내 자존심과 기분, 내 의로움과 이익에 뿌리를 깊이” 내립니다. 마침내 “잘못된 뿌리를 내려서, 많은 분이 ‘더 많이 줄걸, 더 사랑할 걸, 더 양보할걸, 더 베풀고 살걸, 더 헌신할걸!’ -걸, -걸, -걸 아쉬움과 후회로 한 번뿐인 삶을 허무하게” 마칩니다.

오늘 “우리가 무기력하고 연약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와 달란트를 주셨고, 좋은 사람을 많이 붙여 주셨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뿌리내리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앙인이 반석인 하나님이 아닌 모래처럼 사라질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기에, 작은 시험과 상처에도 그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겨자씨처럼 작아도, 하나님께 깊이 삶의 뿌리를 내리면, 더 크게 자라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요 4:14 절에서, 세상에 뿌리내리고 살았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부족해도 “하나님께 깊이 뿌리내리면, 하나님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영적 목마름 없이 이 땅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작은 겨자씨가 아니라, 버려지고 썩은 씨앗과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 마리아는 삶의 뿌리를 주님께 내리고, 날마다 그 뿌리가” 깊어졌습니다. 사람들이 “부정한 여인이라고 욕하고 손가락질해도, 생각지 않은 어려움과 환난이 있어도, 깊은 영적 뿌리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고달프고 힘들었지만, 더 깊이 하나님께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날마다 은혜로 자라고 성숙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뿌리 깊은 신앙, 자라고 성숙해져 가는 신앙으로,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첫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께 뿌리내리지 않을 뿐 아니라, 뿌리를 내려도, 너무 얕게 내리고 살아감에”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영적 뿌리가 얕기에! 자라지 못하고, 오락가락하고, 쌓았다 부수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뿌리가 “얕기에! 복음의 능력도 체험하지 못하고, 매일 교회 마당만 밟는 신앙에 머물러서” 살아갑니다.

뿌리가 “얕기에 은혜와 점점 멀어지고, 마침내 긍정보다 부정적인 삶의 태도가 더” 많아집니다. 우리는 “지금 내 삶의 뿌리를 하나님과 세상 중 어디에 내리고 있는가? 하나님께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살아가는가? 물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겪는 삶의 고난은 내 능력과 상황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삶의 뿌리를 잘못된 곳에 얕게 내리고 살아감이 진짜 문제”입니다. 폴란드에는 “유럽의 아마존으로 불리는 비아워비에자란 울창한 숲이” 있습니다.

비아워비에자에는 “다양한 동식물의 서식지로, 엄청난 크기의 거목이” 즐비합니다. 그런데 “엄청나게 큰 거목이 작은 풍랑과 비바람에 쉽게” 넘어집니다. 이유는 “그곳 토양이 너무 비옥해서, 나무가 뿌리를 깊게 내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엄청난 크기의 거목도 뿌리가 얕으면 작은 풍파에도 넘어지고” 맙니다. 코로나-19가 “힘들수록, 내가 하나님께 뿌리내리고 살아가는지, 그 뿌리 내림이 얼마나 깊은지!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깊이 뿌리 내린 삶은 매사에 하나님이 가장 중요한 선택과 결정의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께 “깊이 뿌린 내린 삶은 세상 철학보다, 하나님 말씀을 더 확신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가장 소중한 최우선이고, 하나님 음성대로 순종하려는 결단이” 있습니다. 매사에 “하나님께서 가라 하면 가고, 멈추라고 하면” 멈춥니다. 한주도 “코로나-19가 힘들고 어렵지만,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려서, 날마다 성장해가기” 원합니다.

2. 더 많은 영혼을 살리고 세우며 살아갈 때, 더 크게 자랄 수 있습니다.

본문 32절은 “작은 겨자씨가 자라면, 나중에 새가 깃들 정도로 큰 거목이 될 것이다.” 말씀합니다. 비록 “처음에는 심히 작고 보잘것없는 겨자씨지만, 자라고 성장하면 수많은 동식물에 큰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겨자는 음식에 쓰이는 향신료, 항암물질로도” 유명합니다. 이처럼 “작은 겨자씨가 자라면 많은 곳에 선하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정말 자라고 성장하기 원한다면, 자라고 성장하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릭 워렌은 “우리 인생을 세 가지로 구분하여” 말합니다. “무가치한 것에 인생을 소모하는 낭비형 인생, 오직 나만의 즐거움과 안락을 위해 살아가는 소비형 인생. 하나님 나라를 위해, 누군가를 살리고 세우는 투자형 인생!” 오늘 “우리 중에도 투자하는 인생보다, 소중한 삶을 낭비하고 소비하며 살아가는 영혼이 더” 많습니다. 어려운 “현실이지만, 내가 누군가를 살리고 세우려고 노력한다면, 나는 더 자랄 수 있고, 아니! 계속 자라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는 주변을 살리고 세우려는 생각보다, 나부터 살아야 한다는 이기적 사고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마음으로 살리고 세우려 하면, 나와 주변 모두가 함께 자라갈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 판 돈 일부를 숨겨서 한 날에” 죽었습니다. 당시 “땅 판 돈 일부를 드렸다면, 이는 분명히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을 숨긴 이유는 교회보다, 일단 나부터 살자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부부는 물론 교회 공동체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당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모두를 살리고 세우려 했다면, 자신과 교회 모두 더 성장했을 것”입니다. 살리고 “세우려는 마음만 있었다면, 부부가 죽지 않고, 더 많은 일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자라감은 삶의 목적이 항상 살리고 세우려 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리고 세우기보다, 비판과 정죄에 훨씬 더” 빠릅니다. 신학자 “벵겔은 비판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판에 필요한 3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는 명확한 지식, 둘째는 사랑, 셋째는 필요성이다. 이 중 하나라도 모자라면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코로나-19로 힘들수록, 비판보다 품어주고 이해하며, 세워주고 살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비판과 “정죄는 얻을 것이 없고, 나와 주변 모두의 성장을 막기 때문”입니다.

부족해도 “살리고 세우려 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원하시는 일을” 합니다. 1955년 “오리건주 어떤 마을회관에서, 한국전쟁으로 인한 고아들의 참상을 알리고, 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홍보 영화가” 상영되었습니다. 당시 “이 영화를 관람한 노부부의 마음에 큰 갈등이” 생겼습니다. 기독교인이었던 “노부부는 상황과 처지가 여의치 않아서 한국의 고아들을 잊으려 했는데, 하나님의 감동이 끊이지 않았고, 마침내 간절하게 기도하게” 시작했습니다.

기도 끝에 “노후를 위해 준비했던 농장을 처분했고, 그 돈을 가지고 한국에 가서 고아 8명을 양자로 데리고” 왔습니다. 놀랍게도! “이 소식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곳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답지했고, 한국의 고아를 양자 삼는 가정이 점점 더” 늘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살리고 세우려는 홀트 부부를 통해서, 홀트 아동 복지회를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당시 “살리고 세우려는 열정을 통해 홀트 부부의 믿음과 삶이 날마다 더 자라고 깊어졌을 것”입니다.

또한 “살리고 세우려는 열정을 통해, 수많은 사람이 살아나고 세워졌을 것”입니다. 코로나-19가 “힘들수록, 오히려 주변을 살리고 세우려는 열정이 더 절실히”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지역교회 돕기 바자회가 있는데, 이를 위해 주중에 많은 여 선교회 회원들의 수고와 헌신이” 있었습니다. 어려워도! “우리 모두 이 사역에 동참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혹자는 “우리도 힘들고 어려운데 왜 굳이!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변의 “많은 교회가 예배드릴 공간도 잃어버리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교회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해 아파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도 힘들지만, 주변을 살리고 세워야, 그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에도 “성장하려면, 움켜쥐기보다 손을 펴서 살리고 세우는 삶이 필요” 합니다. 그렇게 “살리고 세우는 삶을 살아서, 나는 물론 한소망 교회가 더 성장하고 자라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