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형 “수술에 중독된 어떤 여성의 말을 소개하며 말씀을 시작하려” 합니다. “몇 달간 많은 돈을 들여 여러 차례 성형 수술을 했어요! 그 후! 그동안 뚱뚱하고 못생긴 외모로 받았던 상처를 다 이길 수 있었어요!” 심지어 “이 여성은 싫었던 과거의 모든 사진, 삶의 흔적마저 다 없앤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앞으로 네 곳만 더 성형 수술하면 완성됩니다.” 현재 “한국은 최고의 성형 수술 대국인데, 이처럼 성형 수술에 열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속사람보다 “겉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세상이 속사람보다 겉으로 보이는 대로 사람을 평가하고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롭게 되는 힘, 거듭남은 겉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과 은혜로 속사람이 바뀌어야 받을 수 있는 은혜”입니다. 사 40:31절은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말씀합니다.

연약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공급하시는 힘과 은혜로만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이세벨 때문에 “엄청난 중압감에 빠졌던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두 번이나 부르실 때까지, 여전히 굴 안에서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가 다시 일어나도록 새로운 힘을 공급”하셨습니다. 죽겠다고 “떼쓰던 엘리야에게, 해야 할 일, 사명을 주시며, 다시 일으켜 세우셨던 것”입니다.

당시 “사람과 세상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엘리야에서 새 힘을 주셨던 것”입니다. 장경철 목사의 “책, 믿는다는 것의 행복에 이런 말을” 나옵니다. “인생은 부정적인 사건으로 인해 무너지지 않는다. 부정적 사건을 극복하게 만드는 하늘의 공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의 “아픔을 이겨내려면,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힘이” 필요합니다. 핵심은 “위로부터 주시는 은혜는 내가 그 은혜를 사모하는 만큼” 공급됩니다.

우리가 “다시 살아나려면,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려면, 새 힘을 공급받는 비결을 이 땅이 아닌 위로부터! 특히 하나님 말씀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공급하는 새로운 힘만이 내 모든 문제, 미래를 책임져 주기 때문”입니다. 부족해도! “우리가 하늘로부터 새로운 힘을 공급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1. 새로운 힘을 공급받으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본문 9&13절에서,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반복하여” 물으셨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두 번 모두, 절규하며 자신의 아픔을 이렇게” 쏟아놓습니다. “나는 여호와께 특별한 열정이 있었다! 이스라엘이 주의 제단을 헐고 칼로 선지자를 죽였는데 나만 남았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더는 불평하게 내버려 두지 않고, 오히려 먼저” 말씀합니다.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 서라! 네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귀한 도전이” 있습니다. 엄청난 “중압감으로 넘어져 있던 엘리야가 새 힘을 얻은 이유는 자신의 아픔을 쏟아놓았기 때문이 아니라, 위로부터 새롭게 공급되는 하나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다시 새로운 힘을 얻기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 엘리야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기독교인이 “불신자와 다른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통해 새로운 힘을 얻음에” 있습니다.

진짜 “성도와 짝퉁 성도의 가장 큰 차이점은 말씀을 듣는가? 들은 말씀으로 새 힘을 얻는가?”에 있습니다. 바울과 “276명이 유라굴로로 죽어갈 때, 말씀을 듣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가 내 양을 치라! 말씀을 듣고 새롭게 힘을” 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가 성령의 임재로 말씀을 듣고, 새로운 교회를” 세웠습니다. 포로기 때, “선민이 다시 일어난 이유도, 에스라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주님은 요 8:47 절에서,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말씀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듣고 새 힘을 공급받으려면, 말씀을 듣기까지 믿음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본문 11~12절에서 “엘리야가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기까지 참으로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먼저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술 때, 엘리야가 이를 보고 얼마나 두렵고” 놀랐을까요?

게다가 “지진과 불이 연이어 발생했는데, 최근 캘리포니아가 연이은 지진과 산불로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그런데도 “엘리야는 강한 바람으로 산이 갈라져도, 바위가 부서져도, 지진과 불이 있어도, 하나님 음성을 듣기까지, 믿음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렇게 “끝까지 믿음의 자리를 지켰기에, 세미한 하나님 음성을 들었고, 새 힘을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을 듣고 새 힘을 공급받기 원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이 들리기까지, 말씀 듣는 자리를 지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온라인 예배는 더 산만”합니다. 하나님께서 “코로나-19로 힘들어하는 나에게 말씀으로 새 힘을 주시지만, 내가 말씀 듣는 자리를 지키지” 못합니다. 게다가 “변명과 핑계, 엘리야처럼 불평과 원망도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 믿었고, 직분자로 있으면서도 달고 오묘한 말씀, 꿀 송이처럼 단 말씀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믿음의 자리, 말씀 듣는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영혼은 새로운 힘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존 웨슬리는 “평생 42,000여 회 설교하며 14만여 명이 예수를 믿게 했고, 500명의 순회 설교자를” 세웠습니다. 평생 “지구를 12번이나 돌 정도로 곳곳을 누비며 말씀을 전했고, 평생 400여 권의 책을” 썼습니다. 생각해 보면 “88년 삶에서 아픔과 고난도 많았지만, 그래도 웨슬리가 이렇게 평생 설교하며 저술하고, 주를 위해 일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핵심은 “하나님께서 때마다 일마다 새로운 메시지로 채우고 또 채우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웨슬리가 말씀을 받는 자리를 신실하게 지켰기에, 날마다 위로부터 주시는 메시지가 공급되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웨슬리가 말씀을 받는 자리를 신실하게 지켰기에, 깊은 경건으로 수많은 생명을 살리고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집중해서, 자리를 지키며 말씀을 듣기가 어려울 정도로 바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말씀 듣는 시간만큼은 더욱 마음과 뜻, 힘과 정성을 다해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 열정이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씀 듣는 자리를 신실하게 지킬 때, 하나님께서 날마다 새 힘을” 공급하십니다. 그렇게 “공급받은 새 힘이 코로나-19를 이기게 하고, 내 삶과 자녀, 가정과 교회를 바꿀 것”입니다. 한주도 “말씀 듣는 자리를 잘 지켜서 하나님 주시는 새 힘으로 날마다 승리하기” 원합니다.

2. 새로운 힘을 공급받으려면 원망과 불평에 사로잡혀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0&14절은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말씀합니다. 이는 “엘리야가 말씀을 주시는 주님께 두 번 모두 항의하며 쏟아놓은 불평”이었습니다. 어투를 보면, “내가 그렇게 충성하고 헌신했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이렇게 대할 수 있나요? 따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불평과 원망에 사로잡혔던 엘리야는 새 힘은 고사하고, 영적으로 더 좌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망과 “불평은 내 뜻, 내 기대 대로 되지 않아서, 표출되는 인간의 감정”입니다. 문제는 “원망과 불평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나와 주변 모두, 하나님까지 힘들게” 합니다. 실제로 “원망과 불평이 잠깐은 시원하게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가 더 초라해”집니다. 죄인인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쉽게 배우는 것이 불평과 원망임을” 아세요?

불평은 “소질이 없어도, 가르치지 않아도, 너무도 쉽게, 그리고 너무도 잘” 터득합니다. 실제로 “불평을 배우는 데, 지식과 재능, 환경과 물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불평한다고 나아지거나 발전할 수도 없기에, 불평은 말 그대로 백해무익”합니다. 특별히 “민 14:28 절은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입술에 불평과 원망보다, 오히려 기쁨과 감사가 항상 넘쳐나야!” 합니다.

실제로 “불평과 원망에 빠지면 누구도 하나님 주시는 새로운 힘을 공급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평과 원망을 마귀학교의 가장 중요한 필수과목이라!” 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불평과 원망을 이기고 새 힘을 공급받으려면,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본문 15~16절에서 “하나님은 불평과 원망에 빠진 엘리야가 감당해야 할 세 가지 일을” 주십니다. “하사엘을 아람 왕으로! 예후를 북이스라엘 왕으로! 엘리사를 후계자로 세워라!”

하나님은 “불평하고 원망하는 엘리야에게 해야 할 일을 주시고, 그 일을 감당할 힘과 지혜도”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야 할 일을 찾은 후! 엘리야는 비로소 불평과 원망을 이기고 다시 영적으로” 굳건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명령하신 일, 하사엘과 예후, 엘리사를 세움으로, 과거의 불평을 이기고, 완전히 새롭게 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내가 호흡하며 움직일 수 있다면! 예배드릴 수 있다면! 아직 내가 살아야 하고, 곳곳에서 여전히 내가 필요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해야 할 일이 없다면, 할 일을 찾지 못한다면, 나는 영적 수렁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10명의 정탐꾼은 악평했고, 여호수아와 갈렙만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당시 “정탐꾼 10명은 가나안이 분명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만, 그곳 사람들이 너무 강해서, 우리가 할 일이 없고, 무엇인가를 할 수도 없다!” 단정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위축되었고, 모두를 불평과 원망으로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이 강하지만, 할 수 있다! 해야 할 일이 있다!” 주장했습니다. 비록 “둘이었지만, 해야 할 일을 찾고, 해야 할 일에 집중했을 때, 마침내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해야 할 일을 찾지 못한 10명의 정탐꾼, 불평과 원망에 빠진 선민 공동체는 모두 광야를 떠돌다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려고 하면 너무 많고, 요령을 피우면 할 일이 하나도 없는 특징이” 있습니다. 목사도 “놀려고 하면 얼마든지 놀 수 있지만, 그렇게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음을 너무도 잘” 압니다. 반면에 “해야 할 일에 집중하고, 해야 할 일을 찾으며 살아간다면, 불평하고 원망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우리가 “정말 해야 할 일을 하고, 해야 할 일을 찾으면 불평과 원망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부터 불평과 원망만 하는 말꾼이 아니라, 정말 해야 할 일, 하나님 기뻐하는 일을 하는 일꾼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코로나-19가 “힘들지만, 해야 할 일을 찾으며 새 힘을 공급받아서, 불평과 원망을 이겨나가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