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을 만난 사람들(20-200212) ▶ 주님을 만나야 누릴 수 있는 특권(요 21:15~17)!

세상에는 “특별한 존재보다 평범한 사람, 평범 이하의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한국인은 “자기 IQ를 최소한 120~130으로 생각하지만, 실제 평균 IQ는 106″입니다. 많은 “부모가 자기 아이가 특별한 천재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우리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 찬양을 부를 때. 많은 사람이 속으로 원하는 가사는” 다르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당신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를 보면, “인간은 누구에게나 자신이 특별하게 대접받기 원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사모해야 할 특권은 사람이 부여하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권, 하나님을 만남으로 주시는 특권을 더 사모해야!” 합니다. 진짜 “특별함, 진정한 특권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영혼만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어부로 돌아간 제자 중, 유독 베드로에게 세 번 반복하여”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당시!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 앞에서 얼마나” 무안했을까요? 입술로 “주님을 사랑한다! 고백했지만, 세 번이나 주님을 배반했기에, 많이 민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베드로를 지목하여 부르신 목적은 무안을 주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넘어진 베드로를 다시 세우고, 평생 간직해야 할 사명, 영적 특권을 주시기 위함이 목적”이었습니다.

다른 “제자 앞에서! 유독 ‘내 양을 치라!’ 말씀하셔서, 베드로가 저지른 죄에 대한 용서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주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당시 부족하고 연약했지만, 이처럼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특권을 체험했고, 이 특권을 잘 유지하여, 사도 베드로로 평생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특권은 “어떤 신분이나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특별히 가지는 권한”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 중! 내가 예수를 주로 고백할 수 있음이 특권임을” 아십니까?

주님께서 “죄인인 내게 먼저 다가와서, 나를 자녀 삼아주심이 특권임을” 아십니까? 죄인인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선물로 받음이 특권임을” 아십니까? 성경은 “성령께서 이미 내 심령에 내재하셔서, 나와 함께하심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내가 누릴 특권과 헌신할 이유를 항상 말씀하며” 동행하십니다. 그러나 “대다수 기독교인이 주님을 만나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너무도 많지만, 이를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내가 매일 범죄 하고 넘어져도! 항상 너는 내 자녀야! 말씀하고, 때마다 일마다 우리와 동행하셔도, 내가 이를 믿지 못하고, 세상에 빠져” 살아갑니다. 하나님 주신 “특권을 모르기에, 이를 활용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하나님 주신 특권을 누리려면, 무엇보다, 가장 먼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베드로를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만난 영혼이 누릴 특권이 과연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 주님을 만나야 받은 사명대로 살아가는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미 베드로를 두 번 만나고, 갈릴리 바다에서 세 번째” 만나셨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큰 상처를 받아서,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로 다시 일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번째 만남을 통해 베드로는 큰 특권을” 누립니다. 주님께서 “세 번 베드로에게 묻고 답하는 중! 이렇게 세 번이나 명령”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당시 “베드로는 주님의 양을 칠 상황도 아니었고, 이를 감당할 영적 능력도”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면서 다시 사명을 받았고, 그 사명이 베드로의 삶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본문이 있기까지, 베드로는 주님께 받은 사명대로 살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일부러 콕 집어서 베드로를 만나주신 은혜로 다시 사명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사명은 “아직 내가 살아 있는 이유이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삶의 숙제”입니다. 사명은 “사람마다 다양하고 일정하지 않기에, 사명이 크다! 작다!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실제로 “아직 내가 살아 있다면, 아직 내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내가 사명을 다 감당했다면, 주님은 나를 이 땅에서 불러가실 것”입니다. “주님! 내일 저를 이 땅에서 필요로 하면 내일 아침 이 잠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시고, 천국에서 저를 필요로 하면 내일 아침 천국에서 눈뜨게 하소서!” 이는 “이재철 목사의 반복되는 기도내용”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뿐인 인생이 사명 자답게 살려면, 영적으로 계속 성장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주님 주신 사명을 듣고, 죄송하고, 자신감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를 통해서, 베드로는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며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명 받고, 사명 자로 살아가기까지, 베드로는 계속 영적으로 성장했던 것”입니다. 기도 중에 “성장했고, 말씀 중에 성장했고, 영적으로 더 깊어지며” 성장했습니다. 성장했기에, “3000명, 5000명을 주님 백성으로 변화시키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성장했기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죽었던 도르가를 다시” 살렸습니다.

성장했기에 “백부장 고넬료를 변화시켜 주님의 양으로! 다른 삶을 살게” 도와주었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성장하지 않고, 여전히 위축되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우리가 “주님께 받은 사명! 우리 가슴을 뜨겁게 하는 사명을 완수하려면, 계속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장보다 퇴보하고, 정체되어서, 더는 성장하려 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많은 신앙인이 더 좋아졌다는 고백보다, 부족하고 연약함을 회개할 때가 더” 많습니다.

영국 출신의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대륙을 변화시킨 위대한 선교사”였습니다. 한 번은 “16년의 사역을 마치고, 영국에 귀국했을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리빙스턴은 무려 27번째 걸린 말라리아에서 회복 중이어서,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사역 중, 사자에게 물린 어깨와 팔은 그저 몸에 붙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전한 설교는 참으로 큰 도전을” 줍니다.

“부족한 나를 아프리카로 불러 주심에 항상 감사하며 사역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제가 많은 희생을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희생이 아니라, 하나님 주신 특권을 누리는 중입니다.” 리빙스턴도 “사람인데, 사역 중, 그 어려움과 환난에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겠어요? 그러나 “리빙스턴은 조금도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 주신 사명을 특권으로 여기고 헌신한 이유가” 있습니다. 리빙스턴이 “해가 갈수록! 더 성장하며 깊어졌고, 더 자라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내게 주신 사명이 힘들고 버겁다면,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내 상황과 처지가 어떠한가? 이보다 지금 내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힘들다면 “영적으로 더 성장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 만남을 더 굳게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 주신 사명이 더 굳건해져서, 어떤 어려움과 환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부족해도 “영적으로 계속 성장해서, 하나님 만나고 받은 사명으로, 날마다 승리하기” 원합니다.

2. 주님을 만나야 주님을 더 사랑하며 살아가는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다시 갈릴리로 가서 어부가 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만큼 “주님을 뵐 면목이 없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암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처럼 약해졌지만, 분명한 것은, 그래도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고기 잡는 중 ‘주님이다!’ 한 마디에 옷을 입고 바다에 뛰어들 정도”였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다시 콕 집어서 베드로를 만나주신 후,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당시 “베드로가 이 질문을 받고, 주님을 사랑함에 관해 얼마나 깊게” 생각했을까요? 실제로 “주님을 더 깊이 사랑했기에, 주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주님께 세 번 사랑을 고백하면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더 깊어졌고, 사도 베드로가 되는 첫걸음을 뗄 수” 있었습니다. 성도는 “누구나 주님을 사랑하고, 특히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 믿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주님이 원하는 사랑은 단순한 사랑, 입술의 고백으로 드리는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다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더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진심으로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세요? 우리가 “그렇다, 고백하지만, 현실적으로, 주님을 사랑함이 최우선이 아닐 때가 더” 많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을 더 사랑한다는 사실에 자신 없다면, 우리가 꼭 확인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내가 정말 인격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는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영혼은 그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삶의 최우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주님을 만났다면, 지금 내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더더욱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은 “과거형과 미래형도 중요하지만, 지금 현재형이 가장” 중요합니다.

에스겔은 “의인이 과거에 선한 일을 아무리 많이 해도, 지금 악한 삶을 살아가면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 경고합니다. 반면에 “과거의 악인이 지금 회개하고 의롭게 살아가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말합니다. 정말 “주님을 만난 영혼은,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내게 주신 일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함이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금 “만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어진 교회 일에 최선을 다함이 하나님을 지금 사랑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나중에도! 상황과 처지가 나아져도, 여전히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모리아 산에서 바치라!”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서 “이삭은 말 그대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존귀한 독자를 다 태워서 드리는 번제로 드리라!” 명령하셨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충분히 갈등할 수 있었고, 하나님 요청을 연기할 수 있었고, 거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 주신 말씀 지금 그대로” 순종합니다. 주저하지 않았고, “하나님 사랑함을 지금 표현해서, 오히려 이삭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그는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 “2020-02-06! 전 세계적으로 28,280명이 코로나바이러스 확진 판정을” 받았습니다.

질병의 99.09%가 “중국에서 비롯되어서, 중국 확진자는 무려 28.023명에” 달했습니다. 당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사망자가 무려 565명에 이를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01-30! CNN은 미국에서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가 8,200명이다!” 보도했습니다. 미국에서 “독감 감염자가 1,500만으로! 최근 10년 동안 가장 극심한 재앙”이었습니다. 오늘날 “너무도 많은 위기와 아픔, 질병과 천재지변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중에 하겠다. 좋아지면 하겠다. 미루고 연기할 시간이”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 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지금 더 충성해야 하고, 지금 더 헌신해야!” 합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가족, 동역자, 구역 식구를 이전보다 더 사랑하며 아껴야!” 합니다. 나중이 “아닌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한소망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처럼 “지금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과 만남이 더 온전해질 수 있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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