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을 만난 사람들(19-200205) ▶ 주님과 만남이 주는 은혜(눅 24:13~34)!

영국 “어떤 마을에서 귀족 아들이 물놀이 중, ‘살려 달라!'” 소리쳤습니다. 다행히 “이를 들은 어떤 농부 아들이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해냈습니다. 둘은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고, 대화 중, 귀족 아들은 농부 아들이 의사가 되고 싶지만,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귀족 아들은 아버지를 졸라서, 농부 아들이 의학을 공부하도록” 도왔습니다. 훗날! “농부의 아들은 훌륭한 의사가 되어 신약, 페니실린을 개발”하였습니다.

반면에 “귀족 아들은 정치에 입문했는데, 당시 불치병으로 불리던 폐렴에 걸리고” 맙니다. 그런데 “농부 아들이 개발한 페니실린을 복용하여 깨끗이 나을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농부 아들은 알렉산드로 플레밍이고, 귀족 아들은 윈스턴 처칠”입니다. 당시 “처칠과 플레밍의 만남은 참으로 귀하고 복된 만남이었고, 서로를 살리는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처럼 귀하고 복된 만남도 있지만, 만나지 말아야 할 악연도”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일장일단이 있지만, 주님과 만남은 언제나 온전하고, 가장 큰 축복이자 은혜”입니다. 주님과 “만남만이 내 삶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주민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속박에서 구원할 것이란 기대감으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님을 열렬히 찬양하며”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기력하게 체포되어, 힘 한 번 못 써보고, 온갖 수모를 받고, 십자가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평소 “이적과 기사를 행하던 분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 실망이 얼마나” 컸겠어요? 본문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크게 실망해서, ‘이제 다 끝났다!’ 생각하고 낙향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낙망했던 둘이 주님을 만난 후, 모든 상황이 바뀌고” 역전되었습니다. 마침내 “두 제자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주어진 사역에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주님과 만남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르고 살아감에” 있습니다.

많은 “미국인 중, 주님과 인격적 만남이 없으면서도,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소개”합니다. 세속적으로 “살아서 주일 성수도 하지 않으면서, 기독교인이라 자부하며” 삽니다. 문제는 “많은 이민교회와 이민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이민교회가 능력을 잃어가는 이유는 복음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체험한 영혼이 점점 줄어감에” 있습니다. 내가 “알건 모르건, 주님과 만남은 이 땅과 영생을 책임져 주는 가장 큰 은혜”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만남을 잃었기에, 형식적이고 습관적 신앙에 빠지고” 맙니다. 마침내 “능력과 사명도 망각하고, 해야 할 일보다, 하지 말아야 할 분쟁과 다툼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반드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만남이 왜 필요한지, 어떻게 만남이 가능한지!” 살펴봅시다.

1. 절망에서 소망으로 살 수 있기에,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본문 16~17절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눈이 가려졌고, 슬픈 빛을 띠고 수심이 가득한 채 낙향했다!” 말씀합니다. 두 제자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속량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몇몇 “여인에게 주님의 부활을 들었지만, 둘은 이조차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본문 31절에서, 깊은 좌절과 절망에 빠졌고, 눈이 가려져 있던 두 제자가 주님을 만난 후! 비로소 눈이 밝아져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본문 32절에서, “낙담과 좌절로 무너졌던 믿음이 말씀으로 다시 뜨겁게 되는 변화도” 있었습니다. 마침내 “둘은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사도들과 다시 동역을” 시작했습니다. 본문 34절에서, “주님께서 과연 살아나셨다! 완전한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좌절과 절망보다, 소망과 기쁨으로 이 땅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생각할수록, “절망에 빠진 사람은 주어진 사역에 헌신할 수 없고, 악영향이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소망을 품고 살아가면, 긍정적으로 바뀌고, 매사를 적극적으로, 진취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문제는 “절망에서 소망으로 바뀌는 것은 내 의지와 결단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죄인인 내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절망이 소망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주께서 내게 먼저 다가오셨기에, 나도 주님께 다가가야 인격적 만남이 가능”합니다. 만일 “두 제자가 주님 말씀을 듣고, ‘귀찮으니 저리 가라! 거부했다면” 어땠을까요?

만일 “두 제자가 절망 때문에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면” 어땠을까요? 다행히 “주님은 둘을 방관하지 않고, 변화되기까지 동행하고” 가르쳤습니다. 본문 29절에서, “둘이 ‘더 있어 달라!’ 매달릴 때, 주님은 이를 마다하지 않고” 동행하셨습니다. 이처럼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려면, 나와 주님과의 영적 거리가 더 가까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말로만 주님과 가까워지기 원하고, 실상은 정반대일 경우가 더” 많습니다.

바쁘고 “분주해서, 다양한 핑계와 변명으로, 주님과 가까워질 기회를 스스로” 외면합니다. 주님은 “항상 내 마음 문을 두드리지만, 우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주님과 인격적 만남이 약해지면, 인간은 누구나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절대로 부인하지 않겠다! 장담했지만, 그 밤에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베드로 “관점으로 보면, 너무도 기막히고 한심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이 얼마나” 컸을까요?

보통 사람이라면 “주님을 멀리 떠나서 다시 볼 수 없도록 은둔하거나, 주님을 완전히 떠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다시 마가의 다락방으로, 주님께 다시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참된 회개로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갔을 때, 사도 베드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 43:25절은 “회개하며 주님께 가까이 다가오는 모든 영혼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문제는 “용서와 회복! 주님과 인격적 만남도 있지만, 나부터 주님께 가까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어떤 “남성이 회사에서 해고되어 힘들어하며 아내에게” 말합니다. “나는 죽고 싶어! 모든 노력을 다했지만,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이에 “아내가, 한 가지 안 한 것이 있어요! 당신은 아직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어요!” 말했습니다.

남성은 “아내의 말대로 기도를 시작했고, 서서히 상처와 분노를 극복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업 아이템까지 얻어서, 하나님께 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출장을 가면 좋은 호텔이 없습니다. 깨끗하고 적당한 가격의 호텔을 짓고 싶습니다.” 이 남성의 “이름은 케몬스 윌슨이고, 새롭게 지어진 호텔은 홀리데이 인이” 되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다시 주님을 찾아야 하고, 주님을 신뢰하며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분명히 “내가 체험하지 못한 은혜, 예비하신 은혜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절망에 빠져 주님을 멀리하고, 더 큰 절망에 빠지는 악순환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려울수록 주님을 찾으면, 눈이 열리고, 절망을 이기고 소망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항상 “주님을 가까이해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승리가 있기” 원합니다.

2. 영적인 깨달음이 깊어지기에,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두 제자는 “본문 19절에서, 주님이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였다!” 고백합니다. 두 제자는 “주님을 따른 제자였지만, 여전히 주님을 선지자 중 하나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주님은 그 두 제자를 미련하고 말씀을 더디 믿는 자들이다!” 책망하셨습니다. 답답하셨던 “주님은 본문 26절에서, 모세와 선지자의 글로 그리스도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마침내 “미련하고 더딘 두 제자의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고,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만일 “두 제자가 주님을 못 만났다면! 만일 주님께서 다른 제자들을 찾아가셨다면, 이 둘의 인생은” 어땠을까요? 주님을 “못 만났다면, 둘은 주님을 따른 세월을 허송세월로 아파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미련하고 더딘 영혼들이 주님을 만나서, 그들은 깊은 영적 깨달음을 체험했고, 과거의 좌절과 아픔을 이기고, 새롭게! 힘있게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지식적, 체험적으로 더 깊이 깨달아야! 영적으로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깊어짐은 내 편견과 고정관념을 버리고, 말씀으로 나를 다시 채워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깊어짐은 하나님 말씀이 더 깊게 깨달아지는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깊이 깨달으면, 복음이 들리고, 영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든든해질 수” 있습니다. 또한 “악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과 자세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을 깨닫는 능력! 이를 지혜의 말씀, 성령의 은사로” 정의합니다.

인간은 “누구라도,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잃으면, 영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최고 품질의 성경을 품에 지니고 다니지만, 말씀에 너무도” 무지합니다. 말씀을 “모르면서도 성경을 읽으려 하지 않고, 말씀을 듣고 접할 기회를 스스로” 멀리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깨달으려면, 주시는 말씀마다 잘 들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나름대로 말씀을 사모하지만, 말씀에 대한 집중력이 너무도” 부족합니다.

불과 “30분 설교, 1시간의 예배도 집중하지 못하고, 온갖 잡생각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눈은 “목사를 보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빼앗겨서, 말씀을 듣지만, 깨달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집중해서 말씀을 잘 들어야 깨달음이 있고, 주님과 만남이 더 인격적으로 깊어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집사가 설교 시간만 되면 졸아서, 목사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에 “집사님이,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되면, 제가 안심되어서 그래요!” 답했습니다.

목사가 “이해하지 못해서, 더 설명을 요구하자, 집사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목사님 설교가 교리에 맞고, 이단의 주장도 아니고, 좋은 말씀만 하는데, 제가 신경 쓸 필요가 있나요? 그래서 제가 안심을 하니, 더 잠이 오는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을 깨닫기 원한다면, 주시는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의 종을 통해, 지금 내게 필요한 말씀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 이야기로 말씀을 들으면,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말씀을 주의 깊게 잘 들어야 깨달음이 있고,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전 10장은 “이방인 중 최초로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임하는 사건을” 말씀합니다.

고넬료는 “백부장이고, 경건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던 구제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이처럼 신실했지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고, 성령의 임재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고넬료가 베드로를 청해서 하나님 말씀을 잘 들으면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행전 10:25절을 보면, “백부장 고넬료가 갈릴리 촌부였던 베드로에게 엎드려” 절합니다. 이유는 “고넬료가 그만큼 하나님 말씀을 사모했고, 말씀에 갈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상상해 보면, “이런 고넬료가 하나님 말씀을 얼마나 사모함으로, 얼마나 간절함으로 잘” 들었을까요? 마침내 “말씀을 잘 들음으로, 이방인 중 최초로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롬 10:17절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말씀합니다. 우리가 “항상 내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을 사모함으로 잘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깊이 깨닫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은혜가 있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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