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을 만난 사람들(18-200129) ▶ 십자가 위 두 강도를 통한 도전(누가복음 23:39~43)!

반면교사! “타인의 나쁘고 부정적인 면을 통해 배운다. 이는 마오쩌둥이 처음 쓴 말”입니다. 우리는 “반면교사와 유사하게, 누군가를 거울로 삼는다. 귀감이란 단어도 잘” 압니다. 여기서 “반면교사와 귀감, 둘 다 타인에게 배운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차이점은 귀감이 선한 면을 통해 배운다면, 반면교사는 부정적 면을 통해 배우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누군가의 좋은 면은 배우려 하지만, 부정적인 것을 통해서는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영혼은 악한 것은 물론이고, 선한 것을 통해서도 항상 배우며” 성장합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영혼은 선함은 나와 다르다고 거부하고, 악함은 아니라며 배울 기회를 스스로” 외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정과 긍정을 함께 보여주는 이유가” 있습니다. 반면교사이건 “귀감이건, 부정과 긍정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려서, 오후 3시경에” 운명하셨습니다.

당시 “주님은 십자가에서 두 강도를 만났고, 그중 하나를” 구원하셨습니다. 반면에 “다른 한 명은 끝까지 고집과 완악함에 빠져서, 주님을 부인한 채, 죄악 중에 이 땅의 삶을 다하고” 말았습니다. 완악한 강도는 “고통 중!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주님을” 비방했습니다. 반면에 “다른 강도는 완악한 강도를 책망하고, 본문 27절에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간청하며 주님을” 붙잡았습니다.

마침내 “한 명은 구원받을 마지막 기회를 붙잡았지만, 다른 한 명은 마지막 기회를 완악함 때문에 허망하게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두 강도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신 이유가” 있습니다. 비록 “상반된 상황이지만, 두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고 도전받아야 할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생각지 않은 특이한 일이 발생하면, 이를 우연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 관점에서 우연은 없고, 모든 일에 필연만 있을 뿐”입니다.

과거 “우리 삶을 보면, 주님께서 나를 위해 일하신 필연적 경륜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사건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에 있습니다. 혹자는 “정말 중요한 일을 우연이라고 평가절하해서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혹자는 주님의 일하심을 필연으로 받아들여서, 더 많이 배우고 성장해” 갑니다.

오늘 “이 시간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사건과 방법을 통해, 내가 배우고 얻어야 할 도전과 말씀을” 주십니다. 지혜로운 “영혼은 이 도전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지만, 어리석은 영혼은 이를 붙잡지 못하고, 오히려 성장과 점점” 멀어집니다. 본문의 “두 강도를 통해, 각자에게 무엇을 배워야 할지! 주님의 음성 듣기” 원합니다.

1. 우리는 버림받은 강도를 통해, 완악하지 말아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본문 39절은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말씀합니다. 당시 “이 강도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소리쳤을까요? 십자가형은 “반역자, 사회 최하층을 죽이는 가장 잔인한 형법”이었습니다. 엄청난 “고통 때문에, 당시 로마법은 십자가에서 누군가에게 아무리 극심하게 욕하고 저주해도 눈감아” 주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당시 십자가에 달린 주님과 두 강도의 고통이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강도는 엄청난 고통 때문에 주님께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지 못하고, 소리치며 원망했던 것”입니다. 이 강도는 “범죄로 십자가에 달렸지만, 죄에 대한 회개와 참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 완악함 때문에, 마지막으로 구원받을 기회조차 놓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애굽 왕 바로가 강퍅하다. 이 말을 반복하여” 말합니다. 강퍅하다 “국어사전은 성격이 까다롭고 고집이 세다! 완악함과 유사한 단어로” 말합니다.

완악하다. “고집스럽고 모질다. 어쩌면 강퍅함보다 더 나쁜 모습”입니다. 문제는 “사람이 완악하면 절대로 하나님 은혜를 받을 수 없고, 당연히 천국 백성으로 인정받을 수도” 없습니다. 완악하면 “말씀을 거부하고 내 고집만 주장하기에, 모두에게 해악이” 됩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 중! 많은 영혼이 완악함 때문에 받을 은혜에서 점점 멀어져!” 갑니다. 더 큰 “문제는 본문의 행악자는 주님이 누구인지 몰라서, 엄청나게 큰 완악함에” 빠졌습니다.

반면에 “오늘 우리는 나름대로 주님을 안다면서, 예배드린다면서, 찬양한다면서 완악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완악함을 이기려면, 영적으로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마 27:44절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말씀합니다. 마태는 “강도 두 명이 주님을 같이 욕했다. 말하지만, 누가는 한 명은 낙원에 들어갔다.” 말합니다. 성경 학자들은 “이를 시간적 차이를 가지고 해석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두 강도가 함께 욕했지만, 한 강도는 이내 회개했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영적으로 성장해서 주님을 인정하고, 마침내 낙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보면 “완악한 영혼과 회개한 영혼이 받는 은혜가 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배우고 도전받고 자라가려면, 절대로 완악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은 “완악한 강도를 통해, 우리가 완악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낮아져야 함을 배워라!” 도전합니다.

그럴 때! “내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자라서, 영생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 “처음 천사를 만났을 때! 참으로 완악했고, 부정적이고 비관적”이었습니다. 천사가 “너를 택했다! 말해도, 하나님의 택함이 있는데, 왜 이스라엘이! 왜 내가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지!” 항변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 천사를 두 번이나 시험할 정도로” 완악했습니다. 만일 “기드온이 계속 완악하고 여전히 부정적이고 비관적이었다면, 이런 승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완악함을 버리고, 은혜받고 성장했기에, 기드온은 영적 거장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회개를 통해 성장하고 발전하지 못하면, 누구라도 완악함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어떤 경우에도 완악함을 버려야 하고, 그래야 배우고 성장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1994년 “한국은 지존파 사건 때문에 엄청난 충격에” 빠졌었습니다. 살기등등해서 “인육을 먹었다. 야타족을 못 죽여서 한이다! 인간이기를”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교회 이재명 집사와 동역자들이 지존파를 긍휼히 여겼고,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사랑의 손길을 내밀자, 몇 달 만에 지존파가 서서히 완악함을 벗었고, 마침내 복음을 영접”했습니다. 비록 “엄청난 범죄로 인해서 사형이 집행되었지만, 완악함을 버리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 이후! 이 땅의 삶을 다했다고” 합니다. 죄인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완악함을 넘어 영적으로 자라갔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는 영적으로 자라지 않고, 매일 영적인 답보를” 반복합니다. 영적으로 “자라면 할 일이 많고 부담스럽다고, 은혜를 거부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완악함을 버리고 영적으로 자라가야! 천국 백성으로 꼭 가져야 할 덕목과 은혜, 삶의 모습을 배우며 성장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지금도 완악해야 살 수 있다!” 속삭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완악함을 버리고, 하나님 은혜로 항상 배우고 도전받으며, 더 크게 쓰임 받기” 원합니다.

2. 우리는 구원받은 강도를 통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가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본문 24절은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말씀합니다. 처음 십자가에 달렸을 때! “강도 둘 다 주님을 비방했지만, 한 명은 완악함을 버리고 주님께 자신을” 의탁했습니다. 특히 “한 강도가 변화된 이유를, 본문 24절은,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말씀합니다. 두 강도 모두 “꼼짝없이 십자가에서 생을 마감하고,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한 강도는 이 사실을 깨닫고, 엄청난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비록 “죄인이었지만, 이제 얼마 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야 함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더 커졌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완악한 강도는 십자가의 엄청난 고통으로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지만, 구원받은 강도는 큰 두려움을 가져서 낙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씀이 무려 365번 나온다고” 합니다.

이유는 “연약한 인간이 이 땅을 살아갈 때, 매일 두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악한 마귀의 공격과 미혹이 있고, 생각지 않은 사건 사고가 너무 잦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세상의 공격에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해야!”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하나님 경외는 절대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은 공포와 무서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훗날 “인간은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 서야 하기에, 그 앞에 서기까지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을 온전히 확신해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완악한 강도는 끝까지 주님을 비방하고 욕했는데, 그 이유는 주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구원받은 강도는 완악함을 회개하고, 주님만이 죄인인 자신을 낙원으로 이끄실 분으로”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비방했던 사실을 두려워하며, 더 간절히 주님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온전히 믿었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마침내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죄인인 “인간이 믿음을 잃어버리면, 절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길 때,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항상 하나님과” 함께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가는 곳마다 승리했고,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밧세바 사건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인간적 욕정에 눈이 멀어,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간음했고, 그 남편을 무고하게 죽였고, 그러고도 아무런 가책조차”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다윗도 믿음을 잃었을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예수만 내 구주임을 확신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하나님을 신뢰함과 두려워함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영적 명제”입니다. 옥한흠 “목사는 많은 존경을 받은 목회자”였습니다. 생전에 “옥한흠 목사가 습관처럼 한 말을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함과 확신이 참으로” 컸습니다.

“나는 사례비를 받아 가면서 일하는 사람이고, 그들은 헌금을 내면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이러다가 주님 앞에 서면 내가 설 자리가 어디일까?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마저 든다.” 항상 “자신은 누군가에게 대접을 잘 받아서, 하나님 앞에서 상급이 없을 수도 있다!” 두려워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믿음을 지켰기에, 옥 목사님의 삶이 여느 목회자와 달랐던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이런 생각과 고백이 없기에, 세상이 더 악해지고” 있습니다.

아니! “목회자는 물론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한 확신과 두려움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분명히 “범죄 했지만, 회개하고 사과할 줄 모르고” 살아갑니다. 마침내 “배우고, 도전받지 못하고, 더 나은 모습으로 자라지 못하고, 매번 제자리걸음만 하며” 살아갑니다. 살면서 “무엇보다! 예수는 반드시 온전히 믿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한다.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도전받으며 승리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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