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을 만난 사람들(15-200108) ▶ 앉아있음에서 주의 동역자로(마가복음 10:46~52)!
나가노 목사가 “가나사와 지방에서 교회를 개척했는데, 5년 만에 한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너무 “반가웠고, 예배 후 함께 식사하는 데, 청년이 갑자기 각혈을” 합니다. 순간 “나가노 목사는 어떻게 할까? 쫓아낼까? 갈등하다가 피를 닦고 상을 다시” 차려왔습니다. 당시 “각혈을 한 청년은 일본 유명 정치인의 사생아였고, 어렵게 복음을” 영접했습니다. 그 후! “신학교에 입학했는데, 결핵으로 신학교와 출석하던 교회로부터 버려지고” 말았습니다.
청년은 “기독교의 사랑은 거짓이다! 큰 상처로 자살을 결심했는데, 누군가 가나사와 지역 나가노 목사를 소개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식사 중 각혈을 했고, 나가노 목사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식사를” 차려왔습니다. 순간 “청년은 다시 주님을 만나는 은혜! 깊은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고, 훗날! 일본의 성자로 불리던 가가와 도효히코 목사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모두 넘어지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그 삶이 철저하게 바뀌고” 달라집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하나님 은혜를 체험한 영혼보다, 영적으로 주저앉아 있는 영혼이 더” 많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은 주저앉아 있던 인생이 주님의 동역자로 세워지고, 받은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의 “바디매오는 소경이자 걸인이었고, 길거리에 주저앉아 살아가던 영혼”이었습니다. 게다가 “바디매오는 소리치는 것으로도! 주변 모두에게 꾸짖음을 들을 정도로” 무시당했습니다. 당시 “누구도 바디매오의 아픔과 상처, 서러움을 몰랐고,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서 세상을 보게 되었고, 주저앉아 있다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마침내 “본문 52절에서,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말씀합니다. 바디매오는 “주저앉아 있다가 일어섰고, 주님을 따르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도 “바디매오처럼, 보이는 문제, 보이지 않는 문제로 힘들 때가 정말” 많습니다.
혹자는 “당당하고 자신감이 있어 보였지만, 영적으로 보면 움츠러들고 주저앉아!” 있습니다. 혹자는 “겉으로 왜소하고 작지만, 영적으로는 주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기도” 합니다. 문제는 “세상 누구도 움츠러들고 주저앉아 있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어나서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함으로 이 땅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세상에서 “회복은 내 의지로 노력하면 어느 정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상처와 시험에서 일어나는 영적 회복은 하나님을 따르는 삶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부족해도 “우리가 짧은 인생을 살아가기에, 주저앉아 있지 말고 주님을 따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주님을 따르는 동역자는 그냥 되지 않고, 이에 상응하는 결단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에 “우리가 주저앉아 있음에서 주님을 따르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1. 우리가 주저앉아 있음에서 주님을 따르려면, 나의 부족함을 온전히 맡김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47절에서, “길에 있던 바디매오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는 “바디매오가 어디서, 어떻게 주님에 관해 들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주님에 관해 들었고, 이분만이 나를 치유할 수 있다! 이 분을 놓치면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절박함으로 주님을 불렀던 것”입니다. 심지어 “바디매오는 겉옷까지 내버리고, 주님께 뛰어” 나갔습니다.
당시 “주님께서 바디매오가 소리치자 욕먹는 것을 보고, 사람들의 배척과 무시를 잘” 알았습니다. 바디매오를 “보시고, 그가 얼마나 힘들고 어렵게 살았는지! 잘” 아셨습니다. 바디매오의 “절박한 눈빛에서, 자신의 약함을 온전히 맡기는 믿음도 충분히 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바디매오를 일으켜 세우셨던 것”입니다. 현대는 “자기 PR 시대이기에, 약점은 철저히 숨기고, 나를 나타내는 장점만 보이려” 합니다.
심방 중! “많은 조부모가 전화기를 자꾸 보여주려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저런 “말로 내 손주가 탁월하다! 천재라고, 이쁘다고 자랑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약함을 감추려 하고, 심지어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께 내 약함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고백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아시기에, 시 68:19절에서, 날마다 우리 짐을 함께 져 주시겠다!” 말씀하십니다.
주님도 “마 11: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를 초청하고, 그 약함을 책임져” 주십니다. 신앙생활은 “이처럼 내 약함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 주시는 강함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의도적으로 센 척하고, 강한 척하며 살아야 하지만, 기독교인은 하나님 앞에서 내 약함을 철저하게 인정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맡김이 “믿음이고, 얼마나 맡기는가? 이로 인해 내 영적 수준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려면 철저하고 온전하게 맡겨야!” 합니다. 오늘의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되, 어정쩡하고 대충 맡기며 살아감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 전쟁 때! 여리고는 난공불락의 성이었지만, 기생 라합의 도움으로 무난히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라합은 자신의 선택이 실패하면, 가족 모두 다 몰살될 수 있음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전부” 맡겼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이고 기생이었던 라합이 자기 약점을 온전히 맡김을 기쁨으로” 받으셨습니다. 마침내 “라합을 살리셨고, 그 이름이 메시아의 조상이 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철저하게 맡기지 못함은 내가 의지하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아예 없으면, 내 부족함을 철저하게 인정하면, 장단점을 모두 맡길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어설프게 가진 것, 온전하지 않은 어설픈 지식과 경험이 하나님께 온전히 맡김을” 막습니다. 그러나 “맡겨야 살 수 있고, 내 부족함이 채워짐을 기억해야!” 합니다. 경남 양산에 가면 “정연철 목사가 개척부터 섬긴 삼양 교회가” 있습니다. 개척 때! “정 목사는 힘들고 어려워서! 곳곳에 물질적인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실례로 “몇 교회로부터 몇만 원씩 지원을 받았는데, 한번은, 어떤 교회에 직접 지원비를 받으러” 갔습니다. 담당자가 “잠시 기다리라! 말하고, 무려 6시간 만에 몇만 원 돈을” 주었습니다. 참담한 “마음으로 교회로 돌아오는 데, 하나님께서 네가 전심으로 6시간 기도하면 내게 네게 몇만 원만 주겠니? 사람이 아니라 나만 보고 목회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정 목사는 “그때부터 과감하게 모든 지원을 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목회하여 더 큰 부흥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부족해도! “하나님만 의지하는 이유는, 하나님만 나를 세우고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힘들고 어려울 때! 무엇이라도 하려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본능”입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울수록, 내 약함을 인정하고 더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히 맡기는 영혼을 위해, 앞서가시고 직접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족한 내 삶과 교회가 하나님을 따르는 동역자로 항상 승리하기” 원합니다.
2. 우리가 주저앉아 있음에서 주님을 따르려면, 어려움에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갑자기 큰소리로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48절에서, 사람들은 그런 바디매오에게 잠잠하라!” 꾸짖었습니다. 당시 “바디매오의 큰 소리가 모두에게 불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주변의 꾸짖음에도, 더 큰 소리, 더 간절함으로 주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언제 주님께서 모두에게 시끄럽다고 욕먹던 바디매오를 부르셨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은 “바디매오가 주변의 꾸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주님을 불렀을 때! 치유가 시작되었음을” 말씀합니다. 만일 “바디매오가 사람들의 꾸짖음에 침묵했다면, 본문의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가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찾고 불렀기에, 주저앉아 있다가 일어났고, 눈을 떴고, 마침내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당시 바디매오가 주님을 따라서 예루살렘까지 올라갔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는 순간까지 함께 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음성과 마귀의 미혹을 함께 들으며” 살아갑니다. 마귀는 “내 믿음과 구원을 흔들고, 매사를 쉽게 포기하라고 좌절과 낙담으로” 다가옵니다. 반면에 “성령님은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라! 격려하며” 다가오십니다. 베드로가 “나는 절대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으니, 그 부끄러움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런데도 “베드로는 다시 사도 베드로로 힘있게 세워져서 사역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당시 악한 마귀가 베드로를 얼마나 정죄하고” 비웃었을까요? “너 같은 것이 뭘 하겠다고 그래! 또 큰소리치고 또 허세만 부리려고?”
반면에 “베드로의 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베드로에게” 다가가셨을까요? “힘내라! 포기하지 마라! 내가 그래서 너를 위해 중보 할 거야! 다시 일어나라!” 베드로가 “과연 어떤 음성을 듣고, 주저앉아 있음에서 일어나 회복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다시 일어서려면! 범죄가 있어도 포기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야 하고,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물론 “악한 것, 마귀와 내 자아의 주장은 빨리! 철저히 포기할수록 더” 좋습니다.
문제는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 절대로 포기하면 안 되는 것을 너무 쉽게 포기”합니다. 옛말에 “쉽게 달구어진 쇠가 쉽게 식는다!” 말합니다. 불행히도 “현대 신앙인 다수가 어려움에 직면하면 은혜도 쉽게 받고, 포기도 너무” 쉽습니다. 쉽게 “포기해서, 원망과 후회, 한탄으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저앉아 있지 않고 주님의 동역자로 헌신하려면, 하나님 기뻐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고 믿음으로 이겨나가야!” 합니다.
과거 “캘리포니아 금광 개발이 한창일 때! 한 남성이 전 재산을 투자해서 광산을” 샀습니다. 그는 “열심히 땅을 파 내려갔지만, 안타깝게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큰 낙심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황금 찾는 것을 포기하고, 타인에게 광산을 헐값에” 매각했습니다. 얼마 후! “새 광산 주인은 과거 인부들이 파던 그곳부터 다시 더 깊이 파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불과 15 Cm을 더 파자, 엄청난 양의 황금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금광을 팔았던 전 주인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땅을 치고” 후회했을까요? 실제로 “불과 15 Cm 면, 어쩌면 하루도 아닌 반나절만 더 팠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삶에서 너무 쉽게 단정 짓고, 너무 쉽게 포기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실제로 “내 예상과 다르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마침내 손을 놓고 마는 지경이”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쉽고 빠른 포기에는 성공의 길이 막힐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주저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라!” 격려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음성보다, 세상과 상황, 내 자아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기에 쉽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움에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힘들어도 “바디매오처럼, 다시 소리 지르며 더 굳게 주님 붙잡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지금 주저앉아 있다면 다시 일어나, 주님을 따르는 신실한 동역자가 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