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을 만난 사람들(14-191218) ▶ 주변 사람을 살리고 세우려면(요한복음 8:1~11)!

가봉의 “랑바레네는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무덥고, 독사와 악어가 들끓는 악명 높은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초, 슈바이처가 의료 봉사를 통한 선교사역을 시작하면서, 랑바레네는 완전히 새로운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당시 “슈바이처는 불과 26세의 청년이었지만, 이미 철학과 신학, 음악 박사 학위가” 있었습니다. 슈바이처는 “아프리카를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헌신했지만, 현실은 정말 어렵고 힘든 일상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에 “혹자는 슈바이처에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야만인을 위해 이런 곳에 오다니 당신은 정말 바보예요!” 말했습니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그럴 수도 있지만, 천국에서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답했습니다. 죄인인 “인간이 누군가를 세우고 살리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많은 “시간과 노력, 희생과 헌신, 어쩌면 내 소중한 것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누군가를 세우고 살리는 헌신에 하늘의 복으로 응답”하십니다.

주님께서 “성전에서 말씀을 전하는 중,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당시를 “상상해 보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무척이나 의기양양했을 것이고, 여인은 고개도 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두가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야 한다! 소리쳤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율법을 지킨다는 미명으로, 주님을 모함하려는 악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간음한 여인도 자비 없이 심판하고 정죄”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주님과 간음한 여인! 둘 다 넘어뜨리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의도를 알았지만,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악한 태도와 너무도” 달랐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간음한 여인과 유대 종교지도자들, 모두를 세워주며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한 것이다.” 바울은 “고후 10:8절에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달란트의 목적이 있음을” 말합니다.

핵심은 “주님께 받은 것으로 무너뜨리지 말고, 세우고 살려야 함을 도전”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알량한 무엇인가라도 있으면, 이를 가지고 허세 부리고, 위세를” 떱니다. 타인을 “세워주지 못하고, 정죄하고 비판하여 모두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받은 은혜로 타인을 세우고 살릴 때! 나를 더 힘있게” 쓰십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더 나아지려고, 더 복된 삶, 행복을 누리기 위함에” 있습니다. 이전보다 “내 삶이 더 살아나고, 더 든든하게 세워지는 것을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실제로 “주님도 죄인인 인간을 세워주고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까지”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백성으로서, 한결같이 세워주고, 살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타인을 살리고 세우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1. 살리고 세우려면 악한 역할로 쓰임 받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간음한 여인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보면, 다른 듯하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요한은 “간음한 여인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그 인생의 배경에 관해서” 침묵합니다. 우리는 “다만! 여인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이처럼 육신의 정욕에 빠졌구나! 추측할 뿐”입니다. 문제는 “힘들고 어렵다고, 모두가 육신의 정욕! 간음이란 범죄에 빠지지!” 않습니다. 실제로 “막달라 마리아, 룻과 드보라도 힘들었지만, 다른 인생을” 살았습니다.

또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경건한 모습으로, 선하고 덕스럽게 성경에 나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그들은 고발하고 정죄하는 역할로” 나옵니다. 그들은 “많은 장점이 있었지만, 선하고 복된 장점보다, 주님께 시비 걸고 미혹하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생각할수록 “간음한 여인과 유대 종교지도자들 모두 선하고 복되게 쓰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악한 모습, 하지 않아도 되는 일로 인해 등장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살다 보면 “인간마다 주변에 선하게 쓰일 수 있고, 악하게 쓰일 수도” 있습니다. 실례로 “베드로와 유다가 범죄 했지만, 하나는 선하게 하나는 악하게” 쓰였습니다. 물론 “인간은 누구나 선하고 복된 일, 세우고 살리는 일에 쓰임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선한 역할보다 악한 역할로 쓰임 받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문제는 “주님은 한 번도 나를 악하게 쓰려고! 타인을 넘어뜨리려고 세우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내가 말씀에 서지 못하고, 영적으로 잠들어서, 나도 모르게 악한 일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때로 “쓸데없는 자기 의로움, 평소 안 부리던 고집 때문에, 악한 역할을 감당하고” 맙니다. 또한, “불필요한 명분을 지킨다고, 억울하다고, 악한 일에 쓰임 받기도” 합니다. 문제는 “주의 백성이 악한 일에 쓰임 받으면, 훗날 뼈아픈 후회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악한 “일에 쓰임 받으면, 내 인생도 불편하고 주변 모두가 괴롭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어서, 살리고 세우는 일이 아니면, 뒤로 물러서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혹자는 “억울해서 보복하고 싶다고 하지만, 주님은 롬 12: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다시 강조하지만 “살면서 억울하고 힘들어도! 내가 직접 나서지 말고, 모든 것을 공의로운 하나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내가 직접 나서서,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내 손으로 “넘어뜨리고 아프게 하는 것은, 십자가 복음과 배치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도! 넘어뜨리고 보복하는 일에 절대로 동조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과 “세 제자가 겟세마네에 있을 때, 유다가 로마 군인을 이끌고” 왔습니다. 베드로가 “칼로 반항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이에 주님은 마 26:5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여기서 “군단, 레기온은 로마의 군제로, 한 군단은 보병 6000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러니 “주님 말씀대로 열두 군단이면, 천사가 무려 72,000명이 된다는 말”입니다. 당시 “주님은 충분히 유다와 로마 군인에게 안 붙잡힐 수” 있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오히려 통쾌하게 그들을 넘어뜨리고 시원하게 보복할 수도” 있었습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성경의 이야기, 인류 구원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능력을 과시하기보다, 하나님께 모든 아픔을” 맡기셨습니다. 말씀과 “불 일치하는 일, 넘어뜨리고 피해를 주는 일에 일부러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세우고 “살리는 일, 용서와 사랑은 생명과 은혜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반면에 “보복과 징계는 또 다른 보복과 징계를 유발하고, 마침내 모두를 넘어뜨리고” 맙니다.

실제로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이 아프면, 잠깐은 시원해도, 그 사람이 무너지면 내 마음도 무거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 주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억울하고” 답답하세요? 하나님께서 “이를 다 알고 계시기에, 끝까지 내가 선하게 쓰임 받도록 기도하며 절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악한 일에 가담하고 동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선한 일에 앞장서서, 주변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승리가 있기” 원합니다.

2. 살리고 세우려면 내가 먼저 나를 엄격하게 점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7절에서 “주님은 흥분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참으로 기막힌 말씀을” 합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주님은 “간음이 큰 죄지만, 같은 죄인인 너희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마침내 “많은 사람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자신을 점검해 보니, 더는 돌을 들 수 없었고, 모두가 간음한 여인이 있던 자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유일하게 여인을 정죄할 수 있었던 주님도, 여인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말씀했습니다. 간음한 여인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자신을 깊이 점검하라는 도전”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만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주님을 만나기 전! 자신을 엄격하게 점검할 수 있었다면, 많은 사람 앞에서 이처럼 망신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깊이 점검할수록, 당당하기보다 두렵고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내가 “나를 볼 때 말 못 할 범죄와 악함, 위선과 거짓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영혼이 자신을 점검하지 않고, 기분 내키는 대로, 마구 타인을 정죄하며” 책망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타인을 지적한 후, 내가 더 나아져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나를 보면 부끄럽고, 후회와 한탄만 더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LA에서 “사역할 때, 교회와 집의 거리가 조금” 멀었습니다. 한 번은 “아내가, 집에 열쇠를 두고 문을 잠그고 나왔다며! 전화가” 왔습니다. 당시 “할 일이 많았고, 집에 갔다가 다시 교회로 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이와 함께 힘들어할 아내를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투덜대며 귀가했고, 아내에게 다음부터 조심하라며! 불평을”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아내가 먼저 교회로 나간 후! 제가 늦게 출근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내처럼, 집에 자동차 열쇠를 두고 나왔던 것”입니다. 아내에게 “전화하니, 이미 교회에 도착했지만, 빨리 오겠다고! 기다리라!” 말했습니다. 얼마 전 “저는 엄청 투덜거렸지만, 아내는 조금도 짜증 내지 않고 집으로 와” 주었습니다. 부족한 “인간은 자신이 비판한 일을 자신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비판하고 책망하기 전에, 먼저 나를 엄격하게 점검해야!” 합니다. 특히 “나를 더 엄격하게 점검할수록, 아니! 내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관대할수록! 더 많은 영혼을 세우고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점검할 때, 더 중요한 것은 그 기준인데! 나를 점검하되, 내가 정한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나를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나를 점검하고 훈련할 때! 나와 주변 모두를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내 기준으로 나를 점검하면, 조금의 유익이 있겠지만, 그 결과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내 선택과 결정이 하나님 말씀에 맞는 것인가? 물어야!” 합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주님 기준으로 나를 점검해야!” 합니다. 출 32장에서 “아론의 어리석음으로 선민 이스라엘이 타락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 “모세는 시내 산에서 40일간 금식하며 하나님 말씀! 율법을 듣고 받는 중”이었습니다.

당시 “모세는 말씀으로 자신의 삶과 비전을 더 깊게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형제요 동역자인 아론은 말씀이 아닌 애굽 문화를 현실에 적용하고” 말았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모두를 넘어뜨리고, 자신도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나를 점검하려면 다시 말씀 앞에 서야 하고, 기도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이유는 “내가 정한 기준보다, 강단을 통해 선포되는 말씀으로 나를 점검해야! 훨씬 더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기도 중 “성령님의 음성으로 나를 더 엄격하게 점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쁘고 “분주한 연말이지만, 말씀으로 나를 점검하는 영혼은 절대로 넘어지지!” 않습니다. 다시 “일어날 수 있고, 주변을 살릴 수 있고, 다시 은혜의 자리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 말씀으로 나를 점검해서 살리고 세우는 삶이 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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