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을 만난 사람들(10-191120) ▶ 달리다굼의 은혜를 누리려면(마가복음 5:35~43)!

2011년 “어떤 국가에서 불과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을 소개하려” 합니다. 하루에 “새로 태어나는 신생아가 9,077명, 그중 사생아가 1,288명”입니다. 하루에 “5,962쌍이 결혼하고 1,968쌍이 이혼” 합니다. 하루에 “청소년 2,740명이 가출하고, 69,493명이 성병에 걸리고, 2,740명이 임신”합니다. 하루에 “8분마다 강간, 27분마다 살인, 78초마다 강도, 10초마다 절도사건이” 있습니다. 이는 “청교도 신앙으로 시작된 오늘 미국의 민낯”입니다.

최근 “갤럽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미국인이 80%에서 10년 만에 65%로 줄었다!” 보고했습니다. 안타깝지만! “국가와 사회, 개인에 이르기까지, 다시 영적으로 살아나는 회복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문제는 “다시 살아나는 회복의 은혜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만 주실 수” 있습니다. 동시에! “회복되려면! 내가 해야 할 노력과 헌신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이로가 “12살 딸이 죽어가자, 주님께 딸을 살려달라고” 찾아왔습니다.

주님은 “야이로의 부탁대로 그 집을 향하는 중! 소녀가 이미 죽었다는 비보를” 듣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은 아이를 다시 살렸고, 당시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본문 42절에” 나옵니다.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여기서 “놀라다! 이는 단순한 놀람이 아니라, 엄청나게 놀랐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당시 “누가 봐도 소녀가 죽은 것을 확인했는데,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 대부분이 소녀의 회복을 보고 놀랐지만, 야이로의 반응과 감정은 이들과 달랐을 것”입니다. 딸의 “회복을 보고, 주님이 하나님 아들이고, 생명의 주인임을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야이로는 놀람을 넘어, 주님을 경외하고 믿는 은혜까지 나아갔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주께서 임하시는 곳은 항상 불완전이 완전으로” 바뀌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고, 병자가 치유되고, 상처받은 영혼이 소망으로” 회복되었습니다.

히 13:8절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 말씀합니다. 문제는 “주님은 지금도 이처럼 회복의 은혜를 주지만, 모두가 이를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 이유는 죽을 수밖에 없는 내가 영생을 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목적은 이전보다 나아짐이 아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회복되는 은혜에” 있습니다. 첨단 “시대를 살아도! 달리다굼! 우리 삶이 회복되고 치유되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내 문제, “가정의 다양한 문제는 주님의 임재로 온전히 회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신앙인이 주님 주시는 회복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삽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영혼은 모두 예외 없이! 주님 주시는 회복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달리다굼! 어떻게 회복의 은혜를 누릴 수 있을지!” 살펴봅시다.

1. 달라디굼의 은혜를 누리려면, 세상보다 주님의 말씀을 더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당시 “주님은 12년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치유하시며! 야이로 집으로 가는 길이” 늦어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본문 35절에서, 야이로의 하인들은 이미 12살 아이가 죽었다. 주님께서 가실 필요가 없다!” 말씀합니다. 이는 “회당장 집에서, 소녀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 전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야이로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당시 “주님은 야이로 딸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셨습니다. 게다가 “많은 목격자가 아이가 죽은 것을 보았기에, 모두가 주님의 말을 듣고 비웃고 조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야이로는 죽은 딸을 직접 보고 온 하인들의 말보다, 안 보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더” 믿었습니다. 당시 “야이로는 자기 집으로 더디게 움직인 주님을 원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목격자보다, 주님의 말씀을 더 믿었기에, 딸의 회복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야이로가 하인들의 말을 듣고, 주님께 ‘그만 돌아가 달라!’ 말했다면” 어땠을까요?

현대인은 “수많은 정보 속에 살아가지만, 상황과 처지에 따라 신뢰하는 말과 내용이” 달라집니다. 게다가 “우리가 접하는 정보가 틀린 경우도 참으로” 많습니다. 또한 “무책임하게, ‘아니면 말고!’ 식으로 헛된 정보를 유포하기도” 합니다. 건강식품도 “한때 무엇이 좋다! 유행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건강의 적이 되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 말씀만 옳고 온전해서, 나를 천국으로 이끌어가는 유일한 나침반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조차! 하나님 말씀을 온전하게 신뢰하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심지어 “구시대의 유물로, 고리타분한 잔소리로 말씀을 치부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래도 나를 세워주고, 나를 회복하게 할 능력은 오직 하나님 말씀뿐”입니다. 갈 2:8절은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말씀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두 사도는 엄청난 능력과 카리스마로, 하나님 나라 확장에” 헌신했습니다. 둘 다 “예수님처럼,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고, 병자를 치유하고, 이적까지” 행했습니다.

그러나 “둘의 공통점은 과거 주님을 외면하고 주님을 박해한 죄가” 컸습니다. 당시 “죄인이었던 두 사도가 회복된 기초는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회개를 통해 주신 하나님 말씀을 확신하며, 주님을 세 번 부인한 죄에서” 회복되었습니다. 바울은 “무려 13년 고향에서 칩거했지만, 말씀을 확신하며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온전히 신뢰함이 두 사도와 야이로의 딸을 회복하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회복의 “은혜는 내가 말씀을 확신하는 깊이와 철저하게” 비례합니다. 시 119:105절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다.” 말씀합니다. 말씀만이 “회복이 필요한 내 인생에서 등불과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많은 신앙인이 이를 알면서도 삶의 해답인 말씀을 멀리” 합니다. 남아공 “어떤 인쇄업체가 시카고에서 값비싼 인쇄기 한 대를 수입”했습니다.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쇄기가 고장 나서 작동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시카고 본사에 전화로 도움을 청했지만, 도저히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시카고에 전문가 파송을 부탁했는데, 남아공 사람이 출장 온 청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젊은 “청년이 도저히 못 미더워서, 인쇄회사는 노련한 사람을 보내 달라!” 재요청했습니다. 이에 “시카고 회사는, 당신들이 본 그 청년이 그 인쇄기를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 사람만 기계를 고칠 수 있으니, 그 사람의 지시에 그대로 따르세요!” 답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말씀인 성경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복을 원한다면, 다른 무엇보다 다시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통해 하나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과 사람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하나님 방법대로 회복될 줄” 믿습니다. 힘든 “이민 생활에서 항상 말씀을 신뢰하여 삶의 곳곳에서 달리다굼의 은혜가 있기” 원합니다.

2. 달리다굼의 은혜를 누리려면,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죽은 아이가 살아나기까지, 야이로가 들은 이야기는 모두 부정적이고 비관적”이었습니다. 야이로는 “딸의 죽음 소식을 듣고, 주님께 ‘그만 돌아가라! 다 끝났다!’ 말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주님은 속히 야이로 딸을 보러 가야 하는데, 현실은” 달랐습니다. 본문 37절에서, “급한 중! 병자에게 함께 갈 영혼과 그렇지 않은 영혼을” 구분합니다. 야이로 입장에서 “혈루증 여인으로 인해 지연된 시간을 생각하면 얼마나” 아쉬웠을까요?

“그 부정한 여인만 아니었으면, 주님이 좀 더 일찍 왔어도! 내 딸은 안 죽었을 거야!” 게다가 “본문 40절에서, 많은 영혼이 주님께서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고 잔다!’ 말씀하시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주님의 말을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당시 사람들은 주님만이 아니라 야이로까지 조롱하고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야이로는 그렇게 많은 장애물이 있었지만, 주님을 모시고 죽은 딸이 있는 곳까지” 갔습니다.

그렇게 “흔들리지 않고 주님과 끝까지 동행한 야이로는 죽은 딸이 살아가는 회복을” 체험했습니다. 만일 “야이로가 중간에 포기하고, 상처받고, 슬픔에 빠졌다면” 어땠을까요? 딸의 “죽음 소식을 듣고, 주님을 외면하고 먼저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면” 어땠을까요?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의 한결같음, 불변하심을 강조하는 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우리도 한결같고 불변하는 하나님처럼, 내 믿음이 한결같고 불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 신앙은 너무 변덕이 많고, 시험과 상처로 인해 오락가락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하는 시험과 상처보다, 주님께 받은 은혜가 더 크고 깊으면, 우리 신앙은 절대로 흔들릴 수”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주일예배마다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서 졸고 있는 할머니 한 분 때문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아들에게 특별 지시를” 했습니다. “할머니가 졸면, 옆에 있다가 할머니를 툭 쳐서 깨워야 한다! 알았지?”

다음 주일 “목사님께서 설교를 시작하는 데! 그날도 아들이 옆에 앉아 있는데도 할머니가 여전히” 졸았습니다. 설교 후 “목사님이 아들을 불러서, 왜 할머니를 안 깨웠니?” 책망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아빠는 말만 했는데, 할머니는 조는 것을 내버려 두면 1,000원을 주겠다고 해서요!” 답했답니다. 우리도 “삶에서 겪는 고난이 내가 받는 은혜보다 크면, 변덕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마침내 “우리 신앙생활은 이런저런 핑계로 인해 회복의 기회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변덕스러운 신앙에 절대로 회복의 은혜를 주실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힘들고 어려운 중에도! 한결같고 변함없는 믿음에 회복의 은혜를” 주십니다. 요 11장에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사로가 죽은 후! 늦게 오신 주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항의하고 불평할 수 있었지만, 주님과 변함없이” 동행했습니다. 심지어 “주님이 늦게 오셔서 죽었다고 생각했던 오빠의 무덤까지” 동행했습니다. 이처럼 “두 자매가 회복을 체험한 이유는 상처와 낙담보다 받은 은혜가 더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끝까지 주님과 동행한 결과! 두 자매는 성경에 위대한 이름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서 “죽은 지 나흘이 지난 오빠가 다시 살아나는 체험도 할 수” 있었습니다. 한결같지 않은 믿음은 “내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고, 더 큰 은혜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반면에 “한결같이 믿음을 지킨 영혼은 더 온전한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주인이고 내 창조주이기에! 항상 한결같은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천연기념물 53호 “진돗개는 사냥개로 많이 쓰이지만, 군용견과 경찰견으로 쓸 수” 없습니다. 이유는 “진돗개는 주인을 한 번 정하면, 절대로 주인을 바꾸지 않는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독일산 셰퍼드는 최고의 군용견이자, 경찰견으로” 쓰입니다. 이유는 “셰퍼드는 주인이 바뀌어도, 불과 며칠 안에 잘 적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누군가에게 개만도 못한 인간이라 하지만, 진돗개가 들으면 상당이 기분이 나쁠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참으로 많은 은혜를 주셨지만, 우리가 이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너무 자주 변해서, 주님 주시는 회복의 은혜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힘들어도 “끝까지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영혼에게 온전한 회복이” 있습니다. 끝까지 “동행하는 믿음이 넘어진 나를 일으켜 세워주고, 새 힘을 공급해” 줍니다. 항상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며 동행함으로 주님 주시는 달리다굼의 은혜로 승리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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