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을 만난 사람들(09-191113) ▶ 절망을 넘어서 평안으로(마가복음 5:25~34)!

1982년 “7세의 션 버틀리가 뇌암으로 보스턴의 모 병원에서 투병 중에” 있었습니다. 당시 “션은 회생 불가 판정을 받았지만,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런타자 데이브 스태플턴의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이에 “션의 아버지는 스태플턴에게 션을 방문해서 격려해 줄 것을 간곡하게” 청했습니다. 편지를 “받은 스태플턴은 병원을 방문했고, 투병 중인 션에게 근사한 약속을” 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 멋진 홈런을 날려 줄게! 그러니 희망을 잃지 말아라!”

션은 “자신의 우상을 보고 감격했고, 스태플턴은 다음날 경기에서, 약속대로 홈런을” 쳤습니다. 션은 “병상에서 환호했고, 놀랍게도 5개월 후! 소년의 뇌에 있던 암세포가 모두” 사라졌습니다.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말했습니다. 하지만 “현대인 대부분이 절망을 경험하며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어쩌면! “모두가 나름대로 각자의 절망에 빠져서 아파하고 힘들어하기에! 하늘의 소망이 더 절실히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혈루증은 “여성이 계속 하혈하는 병으로, 율법은 이를 부정하다!” 말합니다. 본문의 “혈루증 여인은 12년 동안 병을 이기려고 가진 물질까지도 다 썼지만 아무런 효험이 없었고, 오히려 더” 나빠졌습니다. 특히 “부정하게 여겨진 혈루증 여인이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서 무리 가운데 있음이 큰 죄”였습니다. 동시에 “남성의 옷을 일부러 붙잡은 것도 목숨을 건 시도”였습니다. 말 그대로 “절망이 가득한 삶이 주님을 만남으로 참 평안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평안! 에이레네는 샬롬과 동의어로 온전한 회복과 치유를” 뜻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절망을 원치 않지만! 순간순간 다가오는 절망에 무기력하게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실례로 “내 뜻대로 안 되고, 최선을 다했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절망합니다. 이처럼 “절망은 우리 마음과 영혼, 육체까지 병들게 하는 악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절망에서 평안을 주시기 위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께서 “절망 중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 평안을 주시려고,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고귀한 은혜를 받았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소망을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지!” 못합니다. 특히 “기독교인은 충분히 절망을 이기고 평안할 수 있지만, 참 평안에서 점점 멀어지는 삶을” 살아갑니다.

안타깝게도! “절망을 이길 이유, 방법, 은혜가 있지만, 여전히 절망에 빠져” 살아갑니다. 주님도 “우리가 절망을 넘어 평안하기 원하시고, 우리도 평안하길 원한다면, 절망을 이기고 평안할 수 있는 바른 방법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의 “혈루증 여인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절망을 이기고 평안할 수 있을지!” 살펴봅시다.

1. 절망을 넘어서 평안하려면! 우리 삶의 방향이 항상 주님을 향해야 합니다.

본문 27절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말씀합니다. 병으로 “절망에 빠진 여인이 주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얼마나 두근거림으로 예수께” 다가왔을까요? 혹시 “누가 알아볼까 두려웠겠지만! 얼마나 예수께” 집중했을까요? 자신의 “병이 부정했기에! 걸음마다 얼마나 조심스럽게 주님께” 다가갔을까요? 그렇게 “주께 다가갔다, 사람에게 밀리고, 또 다가갔다 밀리기를 몇 차례 반복했을지도” 모릅니다.

생각할수록! “여인의 모든 청각과 시각, 온 신경은 오직 주님께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혈루증 여인의 소망은 오직 주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삶의 방향이 온전히 주님을 향했을 때! 지긋지긋한 절망을 넘어 평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삶에서! 보고 듣는 것, 보아야 할 것과 들어야 할 것, 가야 할 곳도 적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처럼 보고 듣고 갈 곳이 많지만! 이민자인 오늘 우리 삶에 참 평안함이” 없습니다.

때로 “무엇인가 깊이 채워진 것 같지만, 다시 생각하면, 마음의 허전함이 너무도” 큽니다. 출애굽 1세대는 “다른 어떤 세대보다 하나님의 일하심, 살아계심을 가장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들은 “10가지 재앙을 직접 보았고 홍해가 갈라진 것도 직접” 보았습니다. 허허벌판인 “광야에서, 밤낮으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하는 주님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많은 것을 보고 들었지만, 그 마음에 항상 큰 허전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잠깐 물만 없어도! 먹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너무도 자주 “애굽이 나았어! 애굽으로 돌아가자! 모세를 힘들게” 했습니다. 이유는 “그들 삶의 방향이 가나안이 아니라, 애굽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삶의 “방향이 그릇되게 설정되었기에, 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삶의 방향이 잘못 설정된 세대는, 광야에서 모두 비참하게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우리 중! 누구도 자신 있게 출애굽 세대를 비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절망을 이기고 참 평안을 누리기 원한다면, 나부터 삶의 방향이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우리가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살지만! 삶의 방향에 따라 현재와 미래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현대인의 “삶은 참으로 복잡해서 여기저기 가야 할 곳도 많고, 너무 바쁘고” 분주합니다. 때로 “내 능력 밖으로! 여기저기 체면치레로 쫓아다니다 보면, 지치고” 힘들어집니다.

많은 “영혼이 그렇게 바쁘게 살다가, 혈루증 여인처럼 모든 것을 다 잃은 후! 주님 주시는 평안의 소중함을” 압니다. 물론 “우리 삶을 갑자기 바꾸는 것이 어렵지만, 우리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게! 불필요한 것을 내려놓고, 주님만 향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곳저곳 “두리번거리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기에도! 우리 인생이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절망을 “넘어 소망으로 살기 원하면, 내 삶에 불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내 삶에서 버려지는 시간, 에너지, 삶의 여백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데! 중요하다고 오판해서, 낭비한 세월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쁠수록!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 삶은 더더욱 세상이 아닌 주님만 향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퀴리 부인은 “노벨상은 물론 프랑스의 레종드뇌르 훈장까지 받은 세계적 석학”이었습니다. 당시 “퀴리 부인은 어떤 기자와 인터뷰 중, 전혀 뜻밖의 말을” 했습니다.

“과학자가 무슨 훈장이 필요해요? 연구소 시설이 개선되어 남편과 제가 연구에 더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퀴리 부인은 “다른 것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삶을 집중했던 것”입니다. 지금 “내 삶의 방향은 어디로 향하고 있고, 무엇에 고정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여전히 절망 중에 살아감은 삶의 방향이 하나님보다 세상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안 봐도 되고, “안 들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지금 향하는 그것이 내게 참 평안을 주지 못하면, 과감하게 멈추고 돌아서야!” 합니다. 기독교인에게 “꼭 필요한 삶의 방향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우리가 “일하는 곳, 가정, 인간관계에서도 우리 삶의 방향이 항상 주님께 고정되어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주께서 우리 절망을 은혜로 치유하시고, 하늘의 평안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우리 “삶의 방향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 고정되어, 절망을 넘어 참 평안을 누리기” 원합니다.

2. 절망을 넘어서 평안하려면! 우리가 주님만 나를 평안으로 이끌 수 있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본문 28절은 “혈루증 여인의 삶을 절망에서 평안으로 이끌어 준 중요한 원인을” 말씀합니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원어에서! “여인이 붙잡았던 것은 주님의 겉옷이 아니라, 옷 가장자리를 스친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병이 불결했기에! 주님의 옷 가장자리만 스쳐도 낫는다는 확신으로 주님께 다가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인의 혈루증은 주님의 옷자락을 만져서 치유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옷자락만 스쳐도 나을 수 있다는 여인의 간절한 믿음 때문에 치유된 것”입니다. 본문 29절은 “바로 이 믿음 때문에, 여인은 몸이 느낄 정도로 병이 깨끗이 치유” 받았습니다. 주님도 “본문 34절에서, 여인이 절망에서 평안을 얻은 이유를, 여인의 믿음에서” 찾았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이 땅의 모든 어려움과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최고 명약이자 최고의 은사”입니다.

동시에 “믿음만이 이 땅을 넘어 천국까지 누릴 행복을 보장할 유일한 약속”입니다. 실례로 “우리에게 충성이 귀하지만, 믿음이 있는 충성이 귀하고” 복됩니다. 기도가 “귀하지만,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절망을 넘어 평안을 얻게” 합니다. 이처럼 “헌신과 수고, 봉사와 예배! 모든 것도 믿음으로 드려야 진정한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족해도! “하나님만 내 구주로 영접하는 확신이 삶의 절망을 넉넉히 이기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처럼 소중한 믿음이 점점 희미해지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은 “하나님은 옳다. 되게 하신다. 가능하다! 가장 선하게 이끄신다! 의심하지 않고 온전하게 신뢰하고 따라가는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영적 은사”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이성을 뛰어넘고, 관점을 바꿔주고,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도” 바꿉니다. 한편으로 “어쩌면 믿음은 맹목적으로 보이고, 비논리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논리적이라면! 이는 세상의 이론과 철학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논리 안에 있는 믿음은 절대로 절망에서 온전한 평안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절망을 넘어 평안하기 원한다면! 어정쩡한 믿음이 아니라 확신이 필요”합니다.

수 2:21절은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말씀합니다. 당시 “여리고는 이스라엘의 공격 앞에서, 모두가 두려워하고,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는 중! “라합이 이스라엘의 사자를 영접했고, 그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가족 모두를 살려 달라!” 청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사자는 자신들을 여리고에 고발하지 말고, 창문에 붉은 줄을 매면! 전쟁이 일어났을 때 모든 가족을 살려주겠다!” 약속했습니다. 놀랍게도 “라합은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창문에 붉은 줄을 달아” 맸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여리고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신이었고, 그 확신으로 절망과 두려움을 온전히 이길 수” 있었습니다. 절망을 “넘어 평안에 이르는 믿음은, 중간에 선 믿음이 아니라 온전한 확신이어야!” 합니다.

미국 “남북 전쟁 때! 남군은 회색, 북군은 청색으로, 서로 옷이” 달랐습니다. 한 번은 “강도들이 전쟁터를 지나며! 남군과 북군, 모두로부터 살기 위해 묘안을” 냈습니다. 구체적으로 “상의는 북군의 청색 옷, 하의는 남군의 회색 옷을” 입었습니다. 강도들은 “이러면 북군과 남군 모두, 자기편으로 알고 공격하지 않겠다!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북군은 강도 떼의 회색을 보고 하체를, 남군은 청색의 상체를 집중적으로” 공격했습니다.

반복하지만 “오늘의 문제는 이도 저도 아닌 중간에 있으면서 잘 믿고 산다는 착각이” 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정쩡한 믿음, 흔들리는 믿음, 중간 지대에 선 믿음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 옷자락만 만져도 나는 낫는다!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확신을 흠향하시고, 확신에 임재하시고, 확신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이 “하나님을 향한 확신으로, 절망을 넘어 참 평안을 누리는 승리가 있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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