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을 만난 사람들(08-191106) ▶ 체험적 신앙을 가지려면(누가복음 7:11~17).
함께 “길을 가던 세 사람이 뱀을 보았는데, 첫째 사람은 조금 놀랐지만 침착하게 멀리” 피했습니다. 둘째 사람은 “과거 뱀에 물린 상처 때문에, 비명을 치며 줄행랑을” 칩니다. 셋째 사람은 “땅꾼이어서! 뱀의 종류가 무엇인지 보고, 손으로 뱀을” 잡았습니다. 이를 보면 “어떤 상황에 대한 반응은 사람이 겪은 체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을 체험했는가! 이는 현재와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삶에서 “성장은 배움과 학습을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경험과 체험을 통한 배움이 더” 확실합니다. 이는 “죄인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례로 “교회 마당만 밟는 영혼과 주님을 체험적으로 만난 영혼의 신앙생활이 어떻게” 같겠어요? 말만 “하는 신앙생활과 직접 고생하며 은혜를 체험한 영혼의 신앙생활이 같을 수” 없습니다. 결국 “영적 성장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일하심, 나를 사랑하심을 직접 체험함에서 시작”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나인 성에서 이미 죽었던 과부의 독자를” 살리셨습니다. 과거 “주님은 야이로 딸과 나사로를 살리셨기에, 이 청년은 세 번째 살린 경우가” 됩니다. 구약의 경우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자를 살렸지만, 이는 본문과 무려 900년 시차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16절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말씀합니다. 본문에서 “주님 주변에 세 부류의 사람들, 제자와 무리, 나인 성 과부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주의 은혜를 누가 가장 깊이” 체험했을까요? 제자와 “많은 무리도 죽은 자가 살아남을 보고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하나님 은혜를 가장 깊게 체험한 영혼은 나인 성 과부”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은혜를 보고 듣기보다, 오히려 내 것으로 깊이 체험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영혼이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보고 듣지만, 깊은 영적 체험이 너무도” 부족합니다. 과거 “우리 선조들은 성경에 기록된 능력을 직접 체험하며 신앙생활” 했습니다. 선교지에서도 “주께서 상식을 깨고 일하심을 직접 체험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존재하는 은혜를 직접 체험하는 영혼이 점점” 줄어갑니다.
하나님께서 “변하거나, 성경의 교훈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 영적 태도에 문제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고 은혜받으려면, 보고 들음을 넘어 영적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체험은 “성경의 이야기,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내 삶에 들어와서, 내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체험! 간증은 악한 세상에서 내 믿음을 굳게 붙들어주는 힘이” 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체험적 신앙을 가지려면 무엇을 기억해야 할지!” 살펴봅시다.
1. 우리가 체험적 신앙을 가지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픔을 아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주님의 일행과 장례 행렬이 우연히! 들어가고 나가는 중 만나게” 됩니다. 당시 “나인 성 과부는 독자를 잃은 상실감으로, 어쩌면 아무것도, 누구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과부가 독자를 잃고, 또한 자신의 기구한 처지를 생각하고 얼마나 서럽게” 울었겠어요? 그런데 “주께서 먼저 그런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울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특히 “불쌍히 여기다! 원어는 창자가 뒤틀리듯 함께 아파하는 모습을” 뜻합니다.
주님은 “과부의 아픔을 보시고, 창자가 뒤틀리듯 아파하시며 먼저 다가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14절에서, 관에 손을 대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말씀합니다. 율법은 “죽은 자를 만지면 부정하다! 여겨서, 시신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주님도 “이를 잘 아셨지만, 과부를 보고 너무 마음이 아파서, 율법까지 깨며 다가가셨던 것”입니다. 과부는 “누구보다, 자신의 아픔을 깊이 아시는 주님의 은혜를 체험함이 큰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어른들이 “우리 자녀에게, 과거에 겪은 6.25와 보릿고개를 말하면 그 반응이” 어떨까요? 많은 경우 “피자 먹으면 된다. 물이 없으면 음료수를 마시면 된다! 기막힌 말을 할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과거 어른 세대의 아픔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상상도 못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누군가 내 아픔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함부로 말할 때! 큰 상처가” 됩니다. 반면에 “내가 당하는 아픔을 공감하고, 같이 아파할 때!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제한적 존재이기에! 내 아픔을 전부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알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 주님은 내 창조주시기에! 나의 모든 사정과 아픔, 눈물과 기도 제목까지 하나도 빼지 않고 낱낱이” 아십니다. 또한, “주님은 만왕의 왕이지만, 낮고 낮은 구유에 오셔서! 가난한 자와 부한 자, 천민과 귀족, 모두의 아픔을 가장 잘 아시는 분”입니다. 게다가 “주님은 그 아픔을 불쌍히 여기고, 친히 나를 도우시려 십자가까지!” 지셨습니다.
우리가 “체험적 신앙을 가지려면, 주께서 내 모든 아픔을 다 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주께서 내 아픔을 다 알기에! 절대로 낙심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영혼이 나를 아는 주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지” 못합니다. 말은 “주께서 나를 가장 잘 아신다 인정해도! 실제 삶은 반대로 살아갈 때가 더” 많습니다.
신앙생활은 “어떤 경우에도! 주께서 나를 가장 잘 아시고 도우심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학생 때! “어떤 교수님이 예배 시간에 하신 말씀이 참 많이” 아팠습니다. 설교 중! “바르게 목회하려면! 반드시 세 가지 중보 기도 그룹이 필요한데! 첫째! 생명 걸고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중보 기도자! 부모와 배우자를” 언급했습니다.
둘째! “시간을 정해서, 나를 위해 기도할 수십 명이 필요하다!” 말했습니다. 셋째! “기도할 때마다, 나를 빼놓지 않고 기도하는 그룹 백 명은 넘어야 한다!” 말했습니다. 당시 “저는 불신 가정에서 신학교에 입학했기에! 세 가지 중 어느 중보 기도 그룹도” 없었습니다. 불신 “가정에서 믿음의 개척자였기에! 그 말씀은 제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날 “예배 후! 모두가 예배당을 빠져나간 후! 혼자 남아서 참 많이 울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정말 어렵게 신학교에 왔는데! 저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그때 “주님께서 제게 주신 답변이 지금도 제 귀에” 쟁쟁합니다. “내가 있잖아! 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니!” 그 후 “저는 불신 가정에서 목회자가 되었다는 열등감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내 아픔을 가장 잘 아시고, 이해하시고, 나를 가장 따뜻하게 위로해 주시는 분”입니다. 문제는 “이 체험을 한 영혼보다, 영적 체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영혼이 더” 많습니다.
영적 “성장은 내 아픔과 내 기쁨도 아시는 주님! 나와 동행하는 주님을 만나는 깊이와” 비례합니다. 또한 “내 아픔을 아는 주의 사랑을 체험하면, 악한 세상에서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내 아픔을 아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얼마나 깊이” 체험하셨나요? 힘들다고 “나와 함께 하는 하나님을 외면함은 가장 큰불 신앙”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어떤 경우에도, 내 아픔을 아는 주님을 깊이 체험해서 항상 승리하기” 원합니다.
2. 우리가 체험적 신앙을 가지려면 하나님께서 내 삶을 회복시킬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 12절은 “죽은 자가 과부의 독자이다! 많은 이가 장례 행렬에 함께 있었다!” 말씀합니다. 당시 “장례 행렬에 함께한 많은 사람이 독자가 이미 죽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과부에게 울지 말라! 말씀하고 관에 손대며, 본문 4절에서” 말씀합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마침내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게” 되었습니다. 의사인 “누가는 죽었던 영혼이, 아네카디센! 일어나서 똑바로 앉았다!” 말했습니다.
이는 “주께서 애달프게 울었던 과부의 아픔, 장례 행렬의 아픔을 온전히 치유하셨음을” 말합니다. 실제로 “죽었던 독자를 살리셔서! 일어나 앉았고, 말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이처럼 놀라운 은혜를 직접 체험한 과부의 신앙은 더 깊어졌을 것”입니다. 또한 “죽었다가 살아난 이 청년이 체험한 은혜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삶도 “마치 죽은 독자처럼, 이제는 가망 없다. 끝났다. 좌절하고 절망할 때가” 많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이룬 것도 없고, 게다가 더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사에 자신감을 잃고, 얼굴이 어두워지고, 상처로 소극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내가 정말 없어서 힘들었다는 그것이 채워지면, 내 삶이 더” 나아질까요? 일례로 “물질로 고생한 영혼이, 물질이 차고 넘치게 되면, 모든 문제가 다” 회복될까요?
인간은 “천하보다 귀하기에! 천하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온전한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내 삶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 어려움, 눈물과 절망은 오직 하나님만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루만지심, 회복하게 하심, 긍휼히 여겨주심만이 넘어진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이 회복의 “은혜는 개인은 물론 교회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한 소망교회 “모든 교인은 누구나 교회가 더 나아지고 회복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회복은 일부 중직자와 당회의 희생과 수고로만 되지!” 않습니다. 교회의 “회복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어루만지고, 은혜를 주셔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신앙인조차 하나님의 위로보다 세상의 위로를 더 사모하며” 삽니다. 실제로 “연약한 인간은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누가 문제야! 누구 때문이야! 원망부터” 많아집니다. 그러나 “정말 회복을 원한다면! 사람에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 은혜만 구해야!” 합니다.
죄인인 “인간은 주께서 나를 일으켜 세워준 체험이 깊을수록 누리는 은혜도” 커집니다. 문제는 “모든 영혼이 주님께서 주시는 회복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내 믿음, 평안함, 기쁨과 감사는 모두 하나님께서 내게 회복의 은혜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회복된 체험을 깨닫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기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살기등등함으로 기독교인을 박해했기에! 자신을 죄인 중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주님을 만난 후!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박해자 바울을 버리지 않으시고, 회복의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죄인 중 괴수를 “용서하셨고, 덮어주셨고, 위로와 은혜로,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온전한 회복의 체험이 있었기에, 신실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나도 바울처럼 많은 영혼을 넘어뜨리고 아프게 한 죄인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아십니까?
그런데도 “주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회복시켜 주셨지만, 우리는 이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재철 목사의 “새 신자반!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주께서 가시관을 쓰심은 내가 머리로 지은 죄를 씻어주기 위함이다. 주께서 로마 군인의 채찍으로 가슴을 맞음은 우리 마음의 죄를 씻어주기 위함이다. 주께서 손에 못이 박힌 이유는 내 손이 범죄 한 것을 씻어주기 위함이다. 주께서 두 발에 피를 흘린 이유는 가서는 안 될 곳을 간 내 발의 죄를 씻어주기 위함이다. 주께서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심은 내 모든 죄를 다 씻어주기 위함이다.”
놀랍게도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모든 사역은 죽어가는 나를 살리고, 은혜로 회복시켜 주심에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부족하고 연약해도! 이 회복의 은혜를 체험하면 절대로 영적 곁길로 빠지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삶의 모든 순간마다 주님 주시는 회복의 은혜를 체험해서, 영적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