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을 만난 사람들(07-191030) ▶ 베데스다 못가와 같은 세상이지만(요한복음 5:2~9).
신학생 때! “많은 분이 학생을 신라 시대 골품제도로 구분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결혼 후 “양가가 모두 목사 가정이면, 신라 최고의 골품인 성골로” 불렀습니다. 만일 “양가 중 한쪽은 목사, 한쪽은 장로 가정이면, 다음 계급인 진골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양가 모두 이도 저도 아니면 육두품으로 불렀는데, 참고로 저는 육두품”입니다. 안타깝게도! “목사를 양성하는 신학교에서도, 보이지 않는 벽과 차등, 경쟁이 참으로” 큽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벽과 차등은 물론이고, 졸업 후 사역지를 찾는 경쟁도 참으로 치열”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치열한 경쟁은 신학교는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신학교는 세상의 축소판이고 세상은 더 극심한 약육강식 경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베데스다 못! “이는 본래 자비의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많은 병자가 서로 먼저 우물에 들어가려는 치열한 경쟁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병자라면 누구나 먼저 못에 들어가면 병이 치유된다고 믿었기에! 죽기 살기로 경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6절에서! 주님은 그 많은 병자 중! 유독 38년 된 병자에게” 주목하셨습니다. 당시 “38년 된 병자의 삶은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무려 “38년간 아팠다면, 평생 아팠다는 말이고, 치유도 거의 불가능했음을 뜻하지!” 않았겠어요? 게다가 “누구도, 38년 된 병자가 베데스다 못에 먼저 들어가도록 돕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유대인이 안식일의 선행을 문제 삼을 것이다! 아셨지만, 이 영혼을 긍휼히 여기셔서, 직접 찾아가셔서” 만나주셨습니다. 마침내 “경쟁에 밀려서 절망 중 살아가던 영혼이 주님을 만나서! 온전한 회복을 경험”했습니다. 오늘도 “세상은 베데스다 못처럼 먼저 성공하려고, 먼저 잘 살려는 약육강식의 경쟁이” 치열합니다.
그래서 “주변에 사람은 많지만, 정말 믿고 의지할 영혼은 많지!” 않습니다. 심중에!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하지만, 나 역시 나를 위해서! 내 위주로” 살아갑니다. 이에! “우리는 좋고 괜찮다는 말보다, 죽겠다. 힘들다는 말을 더 많이” 씁니다. 자주 “힘들어 죽겠다. 외로워 죽겠다. 아파 죽겠다! 절망에 대해 더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치열한 경쟁 속에 살지만, 절망보다 내게 먼저 다가오시는 주님을 붙들고 믿음과 소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비록 “이민자의 삶이 하루하루 치열하지만! 성령님께서 임하는 곳에 은혜와 치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약육강식 경쟁의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더 바른 영적 태도로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을 통해 “베데스다 못가와 같은 경쟁 사회를 살아도 어떻게 주님을 만난 영혼답게 살아갈지!” 살펴봅시다.
1. 베데스다 못가와 같은 세상이지만, 더 나아지려는 소망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베데스다 못가에는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자, 혈기 마른 사람 등이” 누워있었습니다. 누워있다! “원어를 보면, 미 완료 동사가 쓰여서! 기간은 알 수 없지만, 계속 누워있었음을” 뜻합니다. 그들 중 “무려 38년간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기 원하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유독 38년 된 환자에게 다가가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었습니다. 이에 “그 환자는, ‘낫기 원하는데, 나를 베데스다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다!'” 답합니다.
이는 “정말 낫기를 원하는데! 항상 늦어서 이렇게 38년이나 절망 중에 살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38년! “참으로 긴 세월이지만, 이 환자는 여전히 치유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충분히 절망하고, 포기할 만도 한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안 된다! 가망 없다고 해도, 여전히 치유를 원해서 38년째 못가에 누워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이 환자가 중간에 절망으로 포기했다면, 이 이야기는 성경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이민자의 “삶은 참으로 버겁고 힘들어서! 하루하루 안간힘을 써서 버티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소망을 품고 살 것인가? 절망으로 포기할 것인가? 이는 내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많은 “영혼이 세상의 계산법으로 자기 삶을 측정해서, 스스로 미리 답을 정할 때가” 많습니다. 마침내! “나는 안 된다고! 소망을 품는 것 자체를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빨리 포기하는 것이 지혜라고, 자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있고, 길도 있는데 포기하고 절망함은 불 신앙”입니다. 실제로 “세상에는 절망과 포기가 많지만, 주님 안에는 소망과 치유만 있을 뿐”입니다. 빌 4:13절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말씀합니다. 비록 “베데스다 못처럼 약육강식의 경쟁이 치열하지만, 믿음으로 소망을 잃지 말라는 도전”입니다. 부족해도 “소망을 품으면, 나를 먼저 찾아오시는 주님께서 넘어진 나를 일으켜 세우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절망은 나도 넘어뜨리고, 나를 위해 일하는 주님의 능력까지” 막아버립니다. 그러나 “소망은 나를 다시 일으키고, 주님과 동행하도록 힘과 능력을” 줍니다. 소망은 “더 나은 내일을 꿈꾸고, 내일을 향해 흔들리지 말고 전진하도록 힘을”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이 아닌 소망을 품고! 주께서 나와 내 자녀, 교회를 위해 일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렸지만, 소망을 붙잡았기에, 주께서 그 미래를 열어” 주셨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망명 중에도, 소망을 붙잡았기에, 주께서 그를 위대한 왕으로” 이끄셨습니다. 넘어진 “베드로가 소망을 붙잡았기에, 주님은 다시 거룩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다메섹에 “칩거 중인 바울이 소망을 붙잡았기에, 다시 힘있게 쓰임” 받았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일하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소망을 잃어버림에” 있습니다.
아무리 “부족해도! 주님은 소망을 붙잡고 사는 영혼을 끝까지” 책임집니다. 어떤 “청년이 항상 웃음으로 꽃을 파는 할머니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삶이 힘들어 보이는데! 할머니 얼굴에는 걱정과 근심이 전혀 없어 보여요! 비결이 뭐예요?” 이에 “할머니는, 내게도 고통과 어려움이 많지만, 나는 3일의 비밀을 가지고 살아요!” 답했습니다. 3일의 비밀은 “문제가 생기면, 3일 간 주께서 해결해 주신다는 소망으로 기다리는 지혜를” 뜻합니다.
마치 “주님께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3일이면 충분히 어떤 문제와 어려움도 회복된다는 믿음, 3일을 소망으로 살면, 어려운 문제는 해결돼요!” 고백했습니다. 우리 “삶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어도! 부활의 주님처럼 한결같은 소망을 품고 살아가야!” 합시다. 절대로 “절망하지 말고, 주님 주신 소망과 인내로 살아가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소망을 잃고 조급하면, 외부 상황보다 나 자신이 나를 절망으로 몰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일하심! 내 편이 되어줌을 믿고, 절대로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유는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간 고생한 영혼을 치유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약육강식 경쟁으로 치열하다면 그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세요! 다만 “나는 주님께서 일하심, 소망을 붙잡고, 경쟁 사회에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베데스다 못가처럼 치열한 세상을 살지만, 날마다 은혜와 소망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
2. 베데스다 못가와 같은 세상이지만, 주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8절에서 “주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말씀합니다. 당시 “38년 된 환자는, 어쩌면 거의 평생을 베데스다 못가에 누워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쩌면 근육이 뭉쳐서 거동도 자유롭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38년 된 병자는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명령한 주님을 전혀” 몰랐습니다. 실제로 “요 5:11 절에서, 유대인이 ‘누가 너를 낫게 했느냐?’ 물었을 때! 답변도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병자는 38년을 너무 아팠고, 전혀 모르는 주님께서 일어나 걸어라!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38년 된 병자는 이 모든 문제를 다 극복하고, 주님의 명령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당시 “병자가 ‘당신이 누군데 이런 말을 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외면할 수 있었지만, 주님 명령에 순종함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해도! 주신 말씀에 순종함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일하심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말씀으로 절망을 이기지만, 불순종하면 절망의 삶을 그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순종을 자주 듣지만, 순종이 없기에! 다시 반복하여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계산이 빨라서, 무엇인가 될 것 같으면, 기쁨으로” 순종합니다. 그러나 “계산이 서지 않으면, 손해가 예상되면, 불순종을” 선택합니다.
우리가 “약육강식의 경쟁 시대를 살아가지만, 더 순종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내 “생각과 선택은 온전하지 않지만, 주님 말씀은 항상 옳고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내 힘으로 행한 일에 문제가 많았지만, 말씀에 순종하면 승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소망으로 승리하기 원하면, 말씀에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무조건! 반드시! 어떤 경우에도! 단정적인 단어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일은 단정적 단어를 쓸 수 없지만! 하나님 말씀에는 단정적 단어가 가장” 맞습니다. 실제로 “영적 승리는 말씀에 대하여 단정적으로! 무 조건적으로 순종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눅 5:5 절은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말씀합니다.
당시 “베테랑 어부였던 베드로는 밤새 최선을 다해 고기를 잡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밤새 “수고했기에,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짜증도 적지 않았겠기에, 빨리 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다시 그물을 내리라! 깊은 데로 가라!'” 말씀합니다. 놀랍게도! “베드로가 주님 말씀하신 그대로! 자기 상식과 생각을 내려놓고 순종했을 때! 이적이” 일어납니다. 당시 “베드로의 순종은 무 조건적인 순종”이었습니다.
눅 5:6절은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말씀합니다. 무 조건적 “순종이 죽어가는 베드로의 인생을 살렸고, 사도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결국 “무 조건적 순종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방법대로 열어가시는 길이” 있습니다. 현대과학이 “첨단이라도! 하나님 말씀과 명령이 더 정확하고 온전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물며 “연약한 내가 생각하고 계산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비교가” 되겠습니까?
어떤 “소년이 부모의 말을 안 듣고, 혼자 깊은 산에 갔다가,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자, 소년은 너무도 두렵고” 막막했습니다. 그렇게 “두려워서 떨고 있는데, 다행히 동네 아저씨를 만났고, ‘집에까지 따라오라고!'” 앞장섰습니다. 당시 “이 소년이 동네 아저씨의 말에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순종했을까요?
말을 “안 듣던 소년에서, 아저씨 말에는 무조건 순종하는 아이가 되지” 않았겠어요? 시 119:105절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다.” 말씀합니다. 우리가 “약육강식의 경쟁 사회를 살아가지만, 빛과 등이 되신 주님 말씀에 무조건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38년 된 병자가 누린 은혜! 베드로가 순종해서 받은 은혜를, 나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려울수록! “주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해서! 소망 중에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