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을 만난 사람들(06-191023) ▶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인생(마태복음 8:5~13).

87세의 “존 웨슬리가 알렉산더 메이즈에게 쓴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죄가 아니면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는 사람! 하나님이 아니면 원하는 것이 전혀 없는 사람 100명만 주세요! 그런 자라야 지옥의 문을 부술 수 있고, 지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짧은 “내용의 글이지만, 웨슬리의 불타는 열정을 충분히 알 수 있는 명언”입니다. 동시에 “웨슬리가 이 땅에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얼마나 간절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웨슬리의 “명언은 오늘 우리 신앙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죄에 대해 무감각하고, 하나님보다 세상에서 원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받기 원하지만, 정반대로 살아갈 때가 더” 많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인정받는 영혼이 줄어가고,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는 거룩한 욕심이 사라져 감이 오늘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주님은 “본문 10절에서, 백부장의 고백을 듣고 깜짝 놀라며 그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주님은 “본문 10절에서, 성경에서 유일한 표현!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 칭찬하셨습니다. 여기서 “이만한! 토사우텐, 이는 그렇게 큰 믿음, 처음으로 보는 큰 믿음이라는 칭찬”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백부장이 간절히 원한대로! 그 하인의 중풍 병을 즉시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백부장의 믿음은 크게 인정했지만, 선민의 불 신앙을 강하게” 책망하십니다. 선민이라며 “성경대로 오신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박해해서, 십자가로 몰아갔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과 칭찬! ‘정말 잘했다! 탁월해!’ 좋은 말을 듣기” 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인정과 칭찬은 한결같지 않고, 상황과 처지에 따라 자주” 바뀝니다. 얼마 전! “제가 아이에게 게임 하라고 제 전화기를 주니, ‘아빠! 최고!’ 엄지를 척” 들었습니다.

얼마 후 “제가 전화기를 다시 달라 하자, 아이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인정은 한시적이지만, 하나님의 인정하심은” 한결같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인정하면 그 믿음은 진짜이고, 그 믿음 때문에 이 땅의 복과 영생까지 얻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조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인정보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사람들의 인정을 더” 선호합니다. 이는 “주님께 인정받는 삶이 누리는 은혜와 능력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인생은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베풀 수 있고, 영생을 전하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받기 원한다면, 하나님께 인정받는 바른 방법을 바로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의 “백부장 믿음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인정받고 살아갈 수 있을지!” 살펴봅시다.

1. 주변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삶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본문 6절에서 “백부장은, 자신의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한다!”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헬라어에서 종은 노예 또는 하인을 뜻하는 둘로스라는 용어를 많이” 씁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종은 파이스! 다른 의미의 종이란 단어가” 쓰였습니다. 파이스는 “일반 종이 아니라, 백부장의 집안일을 총괄하는 청지기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래도 “종은 종이었는데, 백부장은 그가 중풍으로 괴로워함을 보고, 직접 주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이유는 “백부장이 집안의 청지기도 살뜰하게 챙기고 배려하는 따뜻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본문 7절에서 주님은 종을 고쳐달라는 백부장의 부탁에 흔쾌히 직접 가시겠다!” 답하십니다. 이에 “백부장은 본문 8절에서,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말합니다. 백부장은 “당시 로마 군인으로, 유대인에게 고자세를 가질 수 있는 정복 군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주님께 주여! 부르고, 간절히 도움을” 청했습니다. 게다가 “자기 집으로 가시겠다는 주님을 만류하며, ‘말씀만 하시면 종은 낫습니다!'” 고백했습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이 이방인 집을 방문해서 함께 식사하면 부정하다! 여겨지는 사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백부장도 “이를 알기에! 주님의 불편함을 줄이려고, ‘말씀만 해 달라!’ 부탁했던 것”입니다. 배려는 “나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고, 따뜻함과 푸근함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배려는 “닫힌 마음을 열고,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인은 누군가를 배려하면, 내가 을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여 일부러 배려를” 피합니다. 몇 년 전! “한국에 갔을 때! 어머니와 동네 마트를 다녀오면서 있었던 일”입니다. 출구에서 보니, “어떤 여성이 양손에 짐을 잔뜩 들었기에! 제가 문을 열고서” 기다렸습니다. 집에 오는 중! “어머니가, ‘너 저 여자 아니? 네가 왜 저렇게 해야 하니!’ 의아해” 하셨습니다.

저는 “당시 한국 사회가 미국과 너무 다름을 절감”했습니다. 당시 “그 젊은 여성은 문을 열어 준 제게 ‘감사하다!’ 인사 한번 없이 그냥” 지나쳤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타인을 배려하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고, 익명의 그 여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새 생명을 얻은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를 배려해 주셨기 때문임을” 아세요? 우리가 “내 죄를 홀로 해결할 수 없기에!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배려로 우리를 살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악한 세상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성령님을 보내주시는 배려로 지금도” 살아갑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신앙인조차 배려를 잃어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과 점점” 멀어집니다. 배려는 “절대로 모르는 사람, 멀리 있는 사람에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같은 교회를 섬기면서 서로를 배려한다면, 하나님께 더 크게 인정받을 것”입니다. 또한 “내가 타인에게 배려받고 싶다면, 나도 주님의 마음으로 타인을 배려하며 살아야!” 합니다.

최근 “유럽은 계속되는 불황 때문에 소중한 전통이 살아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Suspended Coffee 제도로, 한 사람이 커피를 사면서 추가로 한잔의 커피 값을 더 내고 가는 전통”입니다. 이는 “아침마다 곤궁함으로 커피 한 잔도 마시기 어려운 사람을 향한 배려와 사랑”입니다. 실제로 “커피가 먹고 싶어도, 돈이 없는 사람이 ‘맡겨 놓은 것 있어요?'” 묻습니다. 이에 “카페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면, 커피 한 잔을 받아서 마시면” 됩니다.

Suspended Coffee는 “주는 자와 받는 자가 만날 수 없지만, 깊은 사랑과 배려가” 있습니다. 한 소망교회에도 “이처럼 조용히, 진심으로 내 주변 동역자를 배려함이 가득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배려는 “물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얼마나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이것으로 결정”됩니다. 황금률인 “마 7:12절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다면, 나부터 먼저! 가까운 사람부터 배려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 주변 동역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배려하는 영혼에게, 하늘의 복을 풍성히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한 소망교회가 항상 서로를 진심으로 배려해서, 하나님께 크게 인정받는 승리가 있기” 원합니다.

2. 주님을 향한 확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본문 8절은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말씀합니다. 백부장은 “유대의 정복자로 왔기에, 어쩌면 주님에게 명령하여 집으로 데리고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주님 앞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고, 오히려 진심으로 부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이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이방인이었지만, 주께서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낫는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은 “주께서 움직일 필요 없이, 말씀만으로 종을 치유할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이에 “주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 격찬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 13절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말씀합니다. 당시 “선민의 불신과 달랐던 백부장의 확신이 자신과 종을 살렸던 것”입니다.

현대 “신앙인의 문제는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그 믿음이 확신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해 주면 믿겠다!’ 조건적으로 믿을 때가 더” 많습니다. 또한 “먼저 하나님께 뭔가를 받고서, 은혜라고 인정하면, 믿어주겠다는 태도도” 있습니다. 이유는 “그만큼 간절함이 없고, 하나님 외에 의지할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애틀랜타에서 공부할 때! 어떤 인도 목사님의 고백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Jesus is my favorite God!” 우리 “믿음도, 하나님만 확신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도 믿는 신앙으로 점점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충 믿는 믿음, 조건적 믿음, 이기적인 믿음, 어정쩡한 믿음은 절대로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은 자녀를 포기하고,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생각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엘리에셀이 아니라, 네 몸에서 난 자가 네 상속자이다!” 말씀합니다. 그리고 “창 15:5절은,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자식 하나도 없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식을 주겠다!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창 15:6절은,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말씀합니다. 현실적으로 “당시 아브라함은 하늘의 별은 고사하고, 자식 하나 없었지만, 그래도 자식을 주겠다는 하나님 말씀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의 확신을 의롭다 하셨고, 그 믿음과 인생, 후손까지 인정해” 주셨습니다. 확신은 “인간의 생각은 완전히 배제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성경에서 교훈하는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사람과 세상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확신”입니다. “그대 자신을 믿어보라! 내가 죄인이기에 실망할 때가 많을 것이다. 친구를 믿어보라! 모든 면에 온전하지 않은 그 친구와 헤어질 것이다. 그대의 명성을 믿어보라! 훗날 그 명예는 변질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어보라! 그대는 현세와 내세에 후회함이 없을 것이다.” 과거 “130년 전! 무디가 선포한 이 말씀은 당시와 오늘도 그대로 적용될 소중한 도전”입니다.

이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믿음이 더 나아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인간은 한결같이 하나님만 믿어야 할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은 할 수 있다! 해 주겠다! 말씀해도! 내가 이를” 거부합니다. 여전히 “우리는 나를 믿고, 친구를 믿고, 있다 사라질 명예와 물질만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내가 확신해야 할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주님만이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고, 한결같이 나를 배려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이 “내게 온전한 은혜를 주시고, 나를 천국까지 이끌어가실 유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믿음이 오락가락하지 않고, 어정쩡하지 않고, 온전한 확신이 있길” 소원합니다. 그래서 “그 확신으로 남은 우리 삶이 하나님께 더 크게 인정받는 승리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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