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을 만난 사람들(05-191016) ▶ 매일의 삶이 쉽지 않지만(막 3:1~6)!
한 남성이 “숲을 지나는 중 사자를 만나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다가 주변 우물에 급히 뛰어” 들었습니다. 다행히 “나뭇가지를 붙잡았지만, 위에는 사자가 있고, 아래는 독사들이 우글거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눈앞에 꿀이 보여서, 맛을 보니 너무” 달았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나뭇가지에 매달려서 점점 힘이 빠져 가는데, 생쥐가 매달린 나뭇가지를 갉아 먹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이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톨스토이의 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를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 인생이 이러면 어떻게 사나!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생이고, 우리 이민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쉽지 않고 버거워서, 다 내려놓고 도망가고 싶을 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주께서 나를 지금 이곳에! 이렇게 살아가게 하신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승리는 “이처럼 매일의 삶이 쉽지 않지만, 삶의 이유를 발견하고, 다시 일어나는 영혼의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과거에 방문했던 회당을 다시 방문하셔서! 손 마른 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특히 “본문은 손 마른 자가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환자에게 먼저 다가오셨음을” 강조합니다. 손 마른 자! “여기서 손, 케이르는 팔 또는 손가락으로도 사용”됩니다. 그리고 “마르다! 이는 물이 마르다. 식물이 시들다!”의 뜻입니다. 유대 전승은 “이 사람이 석공이었는데, 손을 다쳐서 구걸로 연명하는 기구한 인생이 되었다.” 말합니다.
당연히! “손 마른 자의 삶은 정상적일 수 없었고, 참으로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마음의 상처도 컸을 것이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차별로 인한 아픔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행히! “주님을 만나서 치유 받은 후! 쉽지 않은 삶이 회복되는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삶의 터전은 세계의 수도인 뉴욕 주변이기에, 그 삶이 더 어렵고” 버겁습니다. 걸음부터 “빨라야 할 정도로 바쁘고, 물가도 비싸고, 교통 혼잡도” 극심합니다.
한 분이 “맨해튼에서 피자를 주문하며 조금 지체되자, 점원이 ‘Next!'” 말했답니다. 혹자는 “과거 맨해튼에서 어떻게 그렇게 일하며 살았는지! 정말 쉽지 않았다!” 고백했습니다. 게다가 “곳곳에서 발생하는 사건 사고는 우리 삶을 더 위축되게” 합니다. 그런데 “내가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을 나보다, 내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더 자세히 아심을” 아십니까? 매일의 “삶에서, 주님의 은혜가 내가 당하는 고난보다 작으면, 그 삶은 더 힘들어” 집니다.
반면에 “내 삶의 무게보다 주님의 은혜가 더 크면 넉넉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이처럼 어려운 중에도! 더 크게 채우는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쉽지 않은 삶을 산 손 마른 자에게 은혜 주신 하나님이 바로 내 하나님”입니다. 비록 “매일의 삶이 쉽지 않지만, 주께서 주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 매일의 삶이 쉽지 않지만, 주님은 나를 주목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 3절은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에 일어서라.” 말씀합니다. 생각해 보면 “손 마른 사람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늘 그 자리에서 어렵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손 마른 자를 회당 중앙에 세우심으로, 그를 향한 다양한 시선들이 등장”합니다. 당시 “회당 안에는 손 마른 자가 어떻게 되는지! 그저 관망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또한 “주님을 책잡으려고 주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바리새인도” 있었습니다.
끝으로 “매일 쉽지 않은 삶을 살던 손 마른 자를 긍휼로 보시는 주님의 시각도” 있었습니다. 당시 “손 마른 자를 향한 다양한 시각이 있었지만, 주님의 시선과 주목하심이 그를” 살렸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다른 회당에 갈 수 있었지만, 손 마른 자를” 주목하셨습니다. 모두가 “외면하던 영혼을 중앙에 세우셨고, 주목하셨고, 쉽지 않은 삶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사 41:10절은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참으로 많은 위로와 힘을” 줍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내가 두려워하고 놀라는 일이 무엇인지 아신다!” 말씀합니다. 그래서 “나를 굳세게 하고, 도와주고, 당신의 의로운 오른팔로 붙잡아 주신다!” 약속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부족한 내 삶 전부를 모두 다 주목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주목하심은 “그저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고, 내 문제를 같이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부족한 “나를 사랑하셔서! 많은 사람 중에 나를 주목하고, 실제로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자녀가 “공연하면, 평소 뒤에 앉던 부모도 앞으로 나와서, 열심히 사진을” 찍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그런 날은 꼭 뒤로 가는데! 과거 어떤 분이 제게 준 핀잔 때문”입니다. “저기요! 덩치도 큰 분이 사진도 안 찍으면서 앞에 앉으시면 어떻게 해요? 좀 비켜 주실래요?.”
듣고 보니! “기분은 심히 나빴지만, 아주 많이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반드시 공연 때마다, 뒤로” 갑니다. 공연 때마다 “부모는 자녀가 잘 하던, 못 하던 오직 자기 자녀에게만 주목”합니다. 그런데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도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를 항상 주목”하십니다. 부모는 “자녀의 실수를 안타깝게 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주목하시고, 실제로 도우시고, 구원하시기에! 힘들어도 다시 용기를 내야!” 합니다.
다시 “일어나야 하고, 다시 소망 중에 위기와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실제로 “쉽지 않은 이민자의 삶은 절대로 혼자서 헤쳐나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목하심, 나를 도우심이 있어야, 버거운 이민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쉽지 않은 매일의 삶이지만! 나를 주목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감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17세에 노예로 팔린 요셉의 삶이 형통했다!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친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았고, 억울하게 성범죄에 연루되어 투옥되었고, 술 맡은 관원을 도와주었지만 배신당하는 삶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생각할수록! “이런 삶이 어떻게 형통할 수 있고, 누가 이런 삶을 형통하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마침내, 요셉은 승리했고, 애굽에서 총리로 많은 영혼을 살리는 데 쓰임” 받았습니다.
요셉이 “탁월하고 용모가 아름다워서 쓰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현실은 “쉽지 않았지만! 꿈으로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요셉을 변함없이” 주목하셨습니다. 그리고 “때마다 일마다 막아주시고, 열어주셔서, 그 삶을 형통함으로” 이끄셨습니다. 우리는 “쉽지 않은 요셉의 삶을 형통하게 하신 하나님이 바로 내 하나님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민자의 “삶은 하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바쁘고, 매일 버거운 삶”입니다. 누구에게 “말 못 할 낙담과 상처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불꽃 같은 눈으로 나를 주목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항상 “도우시고, 세워주시고, 새 힘을 주심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비록 이민자의 삶이 쉽지 않아도! 하나님의 주목하심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은혜로 다시 일어나서! 주의 나라 확장을 위해 더 큰 헌신이 있기” 원합니다.
2. 매일의 삶이 쉽지 않지만, 주님은 생명을 걸고서라도 나를 지키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 2절에서 “바리새인이 주님을 고발하기 위해 주님의 모든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주시하다! “파라테레오는 면밀하게 지켜보다, 보초를 세워 감시하다!”란 뜻입니다.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가 우연히 회당을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이를 아시고도! 본문 5절에서, 네 손을 내밀라! 손 마른 자를” 치유하셨습니다. 당시 “주님은 안식일에 악보다 선을! 죽임보다 생명을 살리는 사역이 먼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쉽지 않게 살았던 손 마른 자를 치유한 결과를 본문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주님은 “당신을 해치고 죽이려는 악한 계획을 아셨지만, 손 마른 자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정상적인 “생활을 못 해서, 매일의 삶이 쉽지 않은 영혼을 긍휼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이 상황을 모른 체하셨다면, 주님께서 안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위험을 알면서도 생명을 걸고! 손 마른 자를 치유해 주셨던 것”입니다. 많은 “이민자에게 ‘요즘 어떠세요?’ 물으면, ‘그냥 겨우 살아요!’ 답할 때가” 많습니다. 그 표정에서 “삶의 고됨과 아픔, 눈물 어린 호소가 가득함을 보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그 아픔을 알지만, 실제적 도움을 주지 못하기에! 더 힘들고” 아픕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리 가까운 혈연관계라도! 내가 당하는 아픔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나의 쉽지 않은 삶을 온전히 해결하실 유일한 분”입니다. 다행히! “주님은 우리 쉽지 않은 인생을 해결할 능력이 있으시고! 실제로 해결해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고, 지금도 내 버거운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만 “내 경제적 문제, 신분 문제, 자녀 문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실 유일한 분임을” 잊지 마세요! 그러므로 “쉽지 않은 이민 생활이지만, 포기하지 말고 항상 도우시는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뉴저지로 “오기 전! 아내와 함께 교회 오빠! 이관희 집사님의 이야기를 영화를” 보았습니다. 아내가 “출산 후! 산후조리원을 나오는 데! 남편 이관희 집사가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어서 “이관희 집사 어머니가 버거운 삶을 못 이기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게다가 “남편이 항암 치료를 마칠 때! 아내가 혈액암 4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당시 “이관희 집사님이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기도한 내용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하나님! 저희 가정 이러다 다 죽게 생겼습니다. 주님 살려주세요!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저희 가정에 긍휼을 베풀어 주세요!” 엄청난 “고난이 밀려왔지만, 쉽지 않았지만, 주님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현실에서 “이 정도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 신앙을 버린들 누가 뭐라” 하겠어요? 이관희 집사의 “고백 중 이런 내용도” 있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법이 있는데! 저만의 손익계산서를 씁니다. 여태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누렸던 은혜와 내가 지금 느끼는 절망을 (+) (-) 해보면, 항상 (+)예요! 우리가 힘들어하고 원망하는 이유는 지금 내가 당한 이 고통의 현실에만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삶 전체에서 받은 은혜를 계산해 보면, 감히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다는 것이 제 결론입니다.” 안타깝게도 “이관희 집사님은 지난 2018-09-16, 새벽에 사망”했습니다.
어쩌면 “질병에 패한 것 같지만! 이관희 집사님이 고백한 하나님의 지키심을 통해! 수많은 영혼이 지금도 살아나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겪는 쉽지 않은 고난은 주님께서 나를 넘어뜨리려는 계획이” 아닙니다. 어렵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 방법대로 나를 지켜주심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 고난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부족하고 연약한 나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방법, 시간, 사람을 통해서, 지금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쉽지 않은 “이민자의 삶을 통해서, 세상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나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더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끝내지 말고, 나와 주변을 살리는 은혜를 붙잡아야!” 합니다. 이민자로 “쉽지 않지만!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 붙들고 날마다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