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09-02! “평양에서, 불과 27세의 청년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가 순교”했습니다. 당시 “토마스 선교사는 박춘권의 칼에 맞아 순교하면서, 성경 몇 권을 조선 땅에” 남겼습니다. 특히 “박춘권이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하며 준 성경을 읽고 변화되어, 훗날 안주 교회 영수가” 되었습니다. 또한 “박영식도 성경 한 권을 받아, 방의 벽지로 붙였는데, 조카인 이영태가 벽지로 쓰인 성경을 보고 주님을 영접했고, 훗날 성서 번역 위원으로” 헌신했습니다.

또한 “성경이 벽지로 쓰였던 박영식의 집은, 훗날 평양 최초의 교회, 널다리 골 교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보면, 역사와 세상, 내 삶의 곳곳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참으로” 많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잘 모르기에, 나중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닫기에, 소망보다 절망에 빠져 살아갈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눈을 뜨면, 언제나 나를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넉넉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릿 시냇가에 있던 엘리야에게, 사르밧 과부를 찾아가라!”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과부는 가장 큰 긍휼의 대상이었는데, 사르밧 과부는 기근이 극심한 중, 곡식 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이 전부일 정도로” 궁핍했습니다. 심지어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는 데, 엘리야가 그 떡을 내게 먼저 가져오라!” 명령했습니다. 참으로 “잔인하고 비참한 명령이었지만, 그래도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말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선민과 엘리야, 사르밧 과부를 위하여 일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현대 “기독교인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 5:17절은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말씀합니다. 일한다 “엘가조마이는 현재형 동사로,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심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코로나-19의 창궐,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체험하기보다, 위축되고 아파함이 더” 큽니다. 어쩌면 “어려운 지금이 더 하나님의 일하심을 깊게 체험할 수 있는데, 현실은 정반대의 모습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어두움과 아픔, 고난과 눈물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체험하면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 회복되었는데, 우리도 그 비결을 배우며 도전받기” 원합니다.

1. 하나님의 일하심을 체험하며 살려면, 하나님 최우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물을 달라, 떡 한 조각을 가져오라!” 청합니다. 그러나 “당시 사르밧 과부는 가루 한 움큼과 소량의 기름밖에 없었고, 게다가 이것으로 마지막 식사를 한 후에 죽으려 했기에, 엘리야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그래도 “엘리야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먼저 떡을 가지고 오라! 다시 요청하며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네가 나를 먼저 대접하면, 기근이 끝나기까지 곡식 가루와 기름이 안 떨어질 것이다!”

당시 “엄청난 기근 중, 삶의 희망은 고사하고 죽음에 직면한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의 주장이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그러나 “사르밧 과부는 결단하고, 먼저 주의 종에게, 아니! 하나님께 마지막 남은 것을” 드렸습니다. 정말 “쉽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과부의 하나님 최우선 신앙을 보고 힘있게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항상 나를 최우선으로 여기고, 나를 위해 일해 주기 원하면서, 정작 나는 하나님보다 내가 최우선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최고를 드리지 못하고, 때로 차선으로, 때로 쓰다 남은 것을 드리기도” 합니다. 말은 “하나님 최우선이라 하지만, 실제 삶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안타깝게도, “내가 하나님 최우선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최우선으로 여기고 일하셔도, 이 은혜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마침내 “하나님 최우선 신앙이 느슨해지면서, 하나님의 일하심과도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 최우선으로 살았던 시간/선택/경험이 얼마나” 되세요? 만일 “이 물음에 주저한다면, 나는 하나님 최우선의 삶을 살지 못한 것”입니다. 실제로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 최우선으로 산들, 하나님께 무슨 득이” 되겠어요? 하나님은 “내가 뭔가를 드림보다, 오히려 진심으로 하나님 최우선으로 살아감을 더” 기뻐하십니다.

나부터 “하나님 최우선으로 살면, 나를 위해 힘있게 일하는 하나님 은혜를 넉넉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볼 때마다, 정말 그 많은 사람이 가진 음식이 오병이어뿐이었을까? 의심이” 듭니다. 5000명 “남성 중, 분명히 누군가는 오병이어보다 나은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한 아이가 하나님 최우선으로 드린 오병이어를 통해, 주님께서 놀랍게” 일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내 삶이 하나님 최우선인가? 깊이 자문해 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죄인인 내가 하나님 최우선으로 살려면, 예배 회복이 먼저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최근 “온라인 예배라도 있음이 다행이지만, 코로나-19가 길어지면서, 온라인 예배가 형식화되어서, 점점 간절함은 물론 예배의 소중함마저 잃어가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온라인 예배는 차선이지 절대로 최선의 예배 방법이” 아닙니다. 물론 “건강 때문에, 면역력과 기저질환 때문에, 일터에서 코로나-19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면, 온라인 예배를 드려야!” 마땅합니다. 문제는 “주중에 내가 할 일은 다 하고, 주일예배는 뒷전이 되는 경우”입니다.

교회가 “최선을 다해 안전수칙을 지키기에, 할 수 있는 대로 예배를 사모하고, 예배드릴 수 있는 영혼들의 합력을 통해서, 현장 예배를 다시 세워가야!” 합니다. 힘들어도 “최선을 다해 예배 자리를 지킬 때,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지금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 열 가지를 택하라면 무엇을” 택하시겠어요? 만일 “소중한 10가지 중! 하나씩 덜 소중한 것을 뺀다면 무엇이 가장 먼저이고, 과연 하나님은 몇 번째”일까요?

물론 “지금 이 땅에서 누리는 물질과 명예, 자존심과 건강이 소중하지만, 훗날 하나님 앞에 설 때, 이것들은 흔적도 없이 다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한결같이 나를 가장 소중히 여기고, 끝까지 나와 함께하실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물질과 명예, 자존심과 자녀의 성공, 건강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것들이 이 땅에서는 필요하지만, 최우선은 분명히” 아닙니다. 우리가 “이 척박한 시대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이제부터라도 하나님 최우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훗날! “후회하지 않도록, 이제라도 하나님 최우선, 예배 최우선, 말씀 최우선으로 살아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확인하며 날마다 승리하기” 원합니다.

2. 하나님의 일하심을 체험하며 살려면, 계산하고 말고 먼저 순종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마지막 남은 것을 먹고 죽겠다는 사르밧 과부에게, 나를 먼저 챙겨라!” 강권합니다. 물론 “떡을 먼저 대접하면 받을 복을 말했지만, 불쌍한 과부에게, 그것도 마지막 식량을 가져오라 함은 너무도 과한 요구”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르밧 과부가 초면인 엘리야의 명령에 순종함은, 생각할수록 대단한 결단”이었습니다. 당시 “사르밧 과부는 기근이 얼마나 길어질지! 몇 년 동안 가루와 기름이 유지될지! 손익계산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계산하기보다 받은 말씀 그대로 순종했기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기근으로 고생할 때, 하나님의 일하심이 오랫동안 과부의 가정에 곡식과 기름을 풍성하게 채우셨던 것”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순종은 참으로 소중하지만, 실제로 순종하며 살아감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특히 “순종하되, 전혀 계산하지 않고, 온전히 믿고 순종함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매사에 순종해야 할지, 무슨 복을 받을지, 손익을 따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계산 없는 순종만이 진짜 믿음”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서 계산하며 순종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복잡해지고, 혼동이 오고, 고민과 갈등이” 깊어집니다. 게다가 “죄인인 인간의 계산은 멀리 보지 못하고, 항상 눈앞만 보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잘 계산한 것 같지만, 나중에 보면, 그 계산이 내 발등을 찍을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산하지 않고 순종하는 영혼을 위해 일하시고, 책임져 주시고, 길을 열어주시고, 승리하게 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드온이 “300명 군사로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은 미디안을 이긴 이유는 계산하지 않은 온전한 순종 때문”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어떻게 300명 군사로, 게다가 무기도 아닌 나팔과 횃불, 항아리를 들고 출정해서 승리할 수” 있었겠어요? 이스라엘이 “말씀대로 여리고를 돌았는데, 이 또한 계산하지 않은 순종”이었습니다. 만일 “열심히 돌았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면, 그 상실감이 얼마나 크고, 여리고가 이스라엘을 얼마나 조롱”했을까요?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일함을 체험하기 원한다면, 계산 없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 음성이란 확신이 들면, 하나님 기뻐하는 일이라면, 더욱 계산하지 말고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산 없는 순종에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생명을 살리고 세우는 결과로 힘있게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1938년 “영국인 니콜라스 윈턴이 체코를 방문하여, 유대인 난민을 위한 자원봉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윈턴은 “난민 수용소에서 나치의 잔혹성을 보며, 전쟁이 임박했음을” 직감합니다. 특히 “윈턴은 난민 아이들이 걱정되어서,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윈턴은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영국 정부에 끊임없이 도움을 청했고, 몇 차례 아이들을 데리고 국경을 통과하며, 사비로 뇌물까지 건네며 아이들을” 살렸습니다. 그렇게 “윈턴은 총 669명의 생명을 구했지만, 무려 50년 동안 자신이 행했던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당시 히틀러가 폴란드를 공격하며, 마지막으로 구하려 했던 250명을 태운 기차가 실종되어, 아이들의 생사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윈턴은 “그 아이들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평생을 아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50년 후! 윈턴의 아내가 다락방을 청소하면서, 윈턴이 구한 아이들의 사진과 이름이 적힌 책을 발견하고, 이를 방송국에 알리며 윈턴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당시 “방송국이 윈턴을 초청해서, 50년 전 일을 언급하며, 방청객을 향해” 말합니다. “혹시 방청객 중에 윈턴에게 생명을 빚진 분이 있다면 일어나 주세요!”

놀랍게도 “방송국 스튜디오를 가득 채운 모든 방청객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윈턴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수많은 사람이 자신을 살려준 은혜를 기억하고, 방송국을 찾았던 것”입니다. 당시 “윈톤을 통해 살아난 669명이 성장해서, 가정을 이루어 그 수가 5,700명에” 달했습니다. 이처럼 “윈톤의 계산하지 않은 순종과 헌신이 수많은 생명을 살렸고, 하나님께 영광 돌렸고, 오늘 우리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맞지도 않는 계산, 눈앞만 보는 계산, 자기 위주의 계산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체험하지 못하고,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자리걸음만 반복”합니다. 코로나-19로 “힘든 오늘! 어렵지만, 하나님 명령이라면 계산하지 말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어려운 시기, 하나님께서 나와 우리 교회를 위해 일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계산 없는 순종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덧입어 한주도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