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년 “아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영원할 것으로 여겨졌던 로마를” 공격했습니다. 당시 “어떤 철학자는 로마의 위기를 인류의 위기로 말할 정도로, 이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처럼 세상의 급변에 대한 신학적 답변으로, 기독교인에게 두 도성, 이 땅의 도성과 하나님 도성이 있다. 신의 도성을” 썼습니다. 또한 “어거스틴은 기독교인은 이 땅과 하늘의 시민권, 양국 시민권이 있으며, 특히 기독교인의 삶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기독교인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일꾼으로, 이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아,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이를 보면 “기독교인은 악한 세상을 살아가지만,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과거는 물론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매사에 하늘이 아닌 이 땅의 시민으로 살아갈 때가 더 많고, 진리를 소유했으면서도 거짓에 속아 넘어지고, 이미 온전히 승리했지만 패배한 것처럼” 살아갑니다.
요한은 “본문 13절에서,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선언합니다. 이유는 “초대교회 성도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면서, 이단과 영지주의 미혹에 넘어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영생이 있을 것이다. 영생이 있었다. 과거와 미래가 아니라, 오히려 바로 지금 너희 안에 이미 영생이 있음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초대교회 성도는 자기 안에 영생이 있음을 잊었기에, 기도의 능력을 잃었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며, 점점 영생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오늘 “우리도 영생을 사모한다면서, 하나님 뜻대로 살기 원한다면서, 악한 세상과 거짓에 속고, 나도 모르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망에 이르는 죄를 저지르며” 삽니다.
영생이 “없다는 말에 속고, 내 죄 때문에 이미 얻은 영생을 부인하고, 내 노력으로 구원받겠다며 인본주의를” 좇아갑니다. 요 17:3절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안에 영생이 있는지, 나는 영생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고 있는지! 자문해” 봅시다.
코로나-19가 “여전히 미국에서 계속 증가 추세이고, 언제 끝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 삶이 불안정하고, 염려와 두려움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힘들수록, 우리는 더더욱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내 신앙과 삶을 점검해야!” 합니다. 악한 “세상에서 내 안에 영생이 있음을 자주 점검할수록, 영적으로 더 굳건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영생이 있기에, 우리가 한주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살펴봅시다.
1. 내 안에 영생이 있기에 우리의 기도가 점점 더 깊어져야 합니다.
본문 14절은 “우리가 그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심이라!” 말씀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는 기도했지만, 자기 뜻대로 기도하였기에, 그 기도가 깊지!” 않았습니다. 이에 “요한은 하나님 뜻대로 기도해야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고, 본문 15절은 그 결과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아느니라!”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의 기도에는 담대함이 없었고, 응답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그 깊이가 점점 얕아져 갔던 것”입니다.
두렵게도 “얕은 기도가 반복되면서, 점점 기도의 능력을 잃어갔고, 마침내 기도와 점점” 멀어졌습니다. 이처럼 “초대교회 성도의 기도가 깊지 않았기에, 그 신앙도 깊어질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초대교회 성도는 이미 받은 영생을 까맣게 잊었기에 세상과 이단의 미혹에 속았고, 그 결과 복음의 능력마저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현재 “코로나-19가 더 극심해져 가는데, 지금 내 기도는 더 깊어지는가? 아니면 더 얕아지고 있는가? 자문해” 보세요!
오늘 “우리 기도가 깊지 못함은 영적 주파수가 틀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장로님 차가 제 차와 기종과 색까지” 똑같습니다. 한 번은 “리모컨으로 차 문을 열려고 하는데, 몇 번을 눌러도 열리지 않아서, 안을 자세히 보니, 제 차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해도, 영적 주파수가 틀려서, 하나님 뜻보다 내 뜻과 경험만 고집한다면, 어떻게 기도의 응답을 체험할 수” 있겠어요? 이처럼 “주파수가 틀린 기도는, 절대로 깊어질 수” 없습니다.
요나가 “작정하고 자기 뜻대로 하겠다 고집부렸을 때, 자신과 주변 사람 모두가 폭풍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물고기 뱃속에서 다시 하나님 뜻을 깨닫고, 영적인 주파수가 바로 설정되면서 기도의 깊이가” 달라졌습니다. 그렇게 “깊어진 기도로, 요나는 잃어버린 영생을 다시 찾았고, 죽어가는 수많은 니느웨 백성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내 기도가 “깊어지고, 매번 응답받으려면, 나부터 하나님 뜻을 바르게 깨닫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해도, 하나님 뜻을 놓치면, 주파수가 틀리면, 내 인생과 신앙까지 다 꼬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은 항상 말씀하고 가르쳐주는 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뜻대로 기도함은 내 이익과 편의보다 하나님 영광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를 “나타내기보다 하나님 영광, 하나님 기뻐하는 것을 먼저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매사에 하나님 최우선이면, 우리 기도는 깊어지고, 영생 얻은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데이비드 프랫이 “아프리카 수단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는데, 많은 경비가” 필요했습니다. 그때, “교회 중직자 한 분이, 수단에 직접 가지 말고 여행 경비를 보내는 것이 더 낫겠다!” 주장했습니다. 프랫 목사는 “안 가면 자신은 편하고 시간도 남겠지만, 하나님 뜻은 직접 수단에 가서 그곳 기독교인을 위로하고, 그들과 함께함에 있다!”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거금을 들여 수단에 갔는데, 수단의 기독교인 청년이 프랫 목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수단이 어려울 때, 많은 분이 도왔는데, 우리가 누구를 진정한 형제로 생각하는지 아는가?” 프랫이 “누가 진정한 형제인가? 묻자 청년이 굵은 눈물을 떨구며” 답했습니다. “가장 어렵고 힘들 때, 당신처럼 우리와 함께 있어 준 사람들이다. 여기까지 와 주어서 정말 고맙다!” 청년의 “진심과 간절함을 보고, 프랫 목사는 하나님 뜻을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영생을 얻은 자의 삶은 힘들고 어려워도 항상 내 뜻보다 하나님 뜻이” 먼저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오래 믿고 직분도 있지만, 하나님 뜻보다 내가 먼저이기에, 내 신앙과 기도가 깊어지지 않고, 매번 영적 제자리걸음만 반복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예배드림이 얼마나 큰 감사이고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너무 감사하고 기쁘지만, 교회가 교회답게 회복되려면,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코로나-19를 이기려면, 우리 자녀들이 영적으로 다시 서고 회복되려면, 무너진 삶이 다시 일어나려면, 그 무엇보다 내 기도와 신앙이 더 깊어져야!” 합니다. 이에 “어려울수록, 우리가 더더욱 내 뜻과 고집보다, 하나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주도 내 기도와 믿음이 더 깊어져서, 이미 받은 영생이 더 굳건해지기” 원합니다.
2. 내 안에 영생이 있기에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은 “인간이 저지르는 죄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다!” 말씀합니다. 죄인인 “인간은 누구나 범죄 하며 살지만, 문제는 죄의 성격”입니다. 본문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 원어는 방향을 뜻하는 전치사 프로스를” 씁니다. 이는 “어쩔 수 없음이 아니라 고의로, 그 삶의 방향이 죄를 향하는 것을” 뜻합니다. 민 15:30~31절은 “고의로 여호와를 비방하고 훼방하는 죄인은 용서받지 못하고 끊어진다!” 말씀합니다.
마 12:31 절은 “성령 훼방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말씀합니다. 당시 “요한은 초대교회에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는 영혼이 많았기에,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죄를 이겨야 함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도 초대교회 성도처럼 분별력을 잃어서,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고, 사망과 생명조차 혼동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분별력을 상실하는 이유 중 하나는 어떤 일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 자신이 잘하는 일로 인한 자만과 교만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어떤 일에 관해 잘 모르면 조심하고 주의하기에, 오히려 쉽게 죄짓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잘 하는 것, 타인보다 나은 강점, 자만심 때문에 분별력을 상실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삼손이 “블레셋을 심판할 때! 매번 군사도 없이 혼자 모든 일을 힘으로” 처리했습니다.
들릴라의 “미혹임을 알면서도 속았던 이유는 자신의 힘에 대한 과신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힘이 있으니 아무래도 괜찮아!” 그래서 “피해야 할 때와 남아있어야 할 때, 잠자야 할 때와 깨어 있어야 할 때를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삼손은 자신의 힘, 가장 자신 있는 것 때문에 분별력을 잃고,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바른 분별력을 가지려면, 항상 하나님 반대편에 서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우리는 괜찮아! 나름대로 잘 하고 있어!’ 생각하는 자만심 때문에 분별력을 잃었고,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반대편에 서고” 말았습니다. 상식적으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도 일부러 하나님 반대편에 서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무지함과 자기 의로움, 교만과 자만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반대편에” 섭니다. 그러나 “우리가 약해도, 잘 몰라도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간다면, 이미 받은 영생을 충분히 지킬 수” 있습니다.
링컨은 “남북 전쟁으로 수많은 군인이 죽어갈 때, 진심으로 아파하며 기도했던 신실한 대통령”이었습니다. 전쟁 중! “북군은 남군의 로버트 리 장군 때문에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습니다. 어느 날, “북군 지도자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중, 한 정치인이 링컨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북군 편에 서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자 “링컨은, 그렇게 기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답변했습니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반대편에 서면서, 하나님에게 이번만 내 편에 서 달라고!” 고집부립니다. 심지어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도 모른 채, 막무가내로 하나님께 떼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미 영생을 얻은 영혼은 어렵고 힘들수록, 더더욱 하나님 편에” 섭니다.
지금 “코로나-19의 어려움과 두려움, 깊은 영적 갈급함은 내가 하나님 편에 서야 해결될 수” 있습니다. 방학한 “자녀들이 여러모로 걱정되지만, 자녀 문제도 하나님 편에 서야 길이” 열립니다. 오늘 “우리의 영적 탈선과 변덕도 하나님 편에 서야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 “연약한 우리 인생을 가장 안전하게 인도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 41: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은 “연약한 내가 두려워하고, 자주 놀라고, 나약함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내 편에 서서, 두려워 말아! 놀라지 마라! 내가 너를 붙들어 줄게!” 말씀합니다. 한주도 “우리가 이미 영생을 얻은 사람답게 하나님 편에 서서, 바른 분별력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