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를 보면 “요셉의 삶이 형통했다는 말이 여러 차례 반복되어” 나옵니다. “요셉 때문에 보디발 가정이 형통했다. 요셉 때문에 감옥 제반 업무가 형통했다!” 그러나 “요셉의 삶을 보면, 17세에 친형에게 팔려서 노예가 되었고, 보디발 아내 때문에 억울하게 투옥되었고, 술 맡은 관원이 요셉을 잊어서 감옥 생활이 더” 길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이 요셉의 삶을 형통하게 본 이유는, 환난 중에도 요셉의 삶이 점점 더 나아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최근 “우리는 코로나-19로 엄청난 고난을 겪고 있지만, 누구나 더 나아지는 형통함을” 소원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소망하는 형통함의 성격에” 있습니다. 세속적 형통함은 “시간과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제한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 주시는 형통함은 어려움과 환난을 이기게 하고, 점점 더 나아지게 하고, 항상 한결같은 은혜로” 채워집니다. 본문은 “시편의 시작으로, 의인과 악인의 삶이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를” 말씀합니다.

특히 “본문 3절은, 복 있는 사람이 받을 궁극적인 복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형통하다. “칠레아흐는 거칠 것이 없이 앞으로 돌진하는 모습을” 뜻합니다. 특히 “미완료형 동사를 써서, 복 있는 사람의 형통함이 계속 이어질 것을” 강조합니다. 특히 “칠레아흐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에게 주시는 하늘의 복과 은혜를” 뜻합니다. 하나님만이 “형통함의 근원이고 참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는 “우리 일상생활을 많이 바꾸었는데, 문제는 코로나-19가 끝난 후”입니다. 모두가 “코로나-19가 끝나도, 이전과 같은 삶은 어려울 것이다!” 말합니다. 실제로 “코로나-19 이전에, 우리는 넉넉한 물질, 자녀가 잘 되는 것, 생활의 안락함이 형통함이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칠레아흐와 무관한 형통함을 찾아서, 너무도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왔습니다. 세상적 “형통함을 얻으려고, 나의 모든 에너지와 시간까지 투자하며” 살아왔습니다.

심지어 “나 편한 대로 신앙생활을 해도 전혀 가책도 없고, 큰 거리낌조차” 없었습니다. 심중에 “그래도 나는 괜찮아! 이 정도면 되었다. 그릇된 자기 의로움에 빠져”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코로나-19로, 인간이 추구한 형통함이 틀렸다!” 말씀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코로나-19를 통해 우리가 정말 찾아야 할 형통함은 이 땅이 주는 세속적 형통함, 내가 만든 형통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형통함이어야 한다!” 도전합니다.

성경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형통함이 먼저이고, 그 후에 인간적 형통함을 찾으며 살아가야 한다!” 말씀합니다. 지혜로운 영혼은 “어렵고 힘들수록! 세상과 이 땅의 형통함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형통함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본문을 통해 “환난 중 형통하려면, 과연 무엇이 필요할지, 무엇을 기억할지!” 살펴봅시다.

1. 환난 중에도 형통하려면, 항상 믿음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본문 1절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말씀합니다. 자리에 앉다! “야솨브는 한 장소에 오랫동안 거주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에 대한 유혹이 참으로” 많습니다. 문제는 “이 유혹에 이기는가? 패하는가? 이로 인해 우리 삶이 바람에 나는 겨가 되거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사람이 믿음의 자리를 지켜서, 하나님 주시는 형통함으로 살아가야 한다!” 도전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은 이득과 유익이 있으면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함의 자리를 상관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나부터 나와 자녀의 성공을 위해, 아닌 줄 알면서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를 얻기 위해 지금까지 숨 가쁘게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삶이 코로나-19로 인해 지금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코로나-19를 통해, 하나님과 무관하고, 하나님을 배척하며 세워진 모든 것이 얼마나 헛된지, 그 헛됨을 속히 내려놓아라!” 경고합니다. 지금까지 “추구해 온 세상적 형통함이 틀렸기에, 이제라도 하나님 주시는 형통함을 추구하라!” 강권합니다. 지금까지 “인간이 이룬 모든 것은 너무도 가변적이기에, 진정한 형통함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믿음의 자리를 지킬 때, 참 형통함을 누릴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믿음의 자리를 지키며 참 형통함을 추구하려면, 말씀 묵상의 즐거움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2절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 말씀합니다. 즐거워하다. “헤페츠는 말씀이 삶의 즐거움이자 소원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죄인인 “인간이 말씀 묵상을 즐거워하면, 믿음의 자리에 서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형통할 수” 있습니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성경이 가장 많이 팔리고” 있습니다.

말씀만이 “환난 중 참 위로와 격려, 어려움을 이길 힘을 준다는 간접적 고백”입니다. 문제는 “성경을 소유하는 것과 성경을 묵상하여 마음과 삶에 새기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한소망 교회 “많은 가정을 보면, 천생연분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부부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너무 보기 좋다고 말하면, 대부분이 겉은 모른다고! 살아봐야 안다고!” 답합니다. 이처럼 “말씀 묵상도 제대로 직접 체험해야, 그 능력으로 형통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성경을 읽고 듣지만, 내 삶에 새기는 묵상이 너무도” 부족합니다. 성경을 보면 “놀라운 이적과 능력을 체험한 후, 오히려 그 믿음이 약해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실례로, “출애굽 1세대와 주님의 공생애 당시 사람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체험 후, 믿음의 자리를 벗어나서, 가나안을 잃었고, 주님을 십자가로” 몰아갔습니다. 반면에 “소수의 성도가 계속 말씀을 마음과 삶에 새기고 묵상하며,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성경은 “이처럼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한 사람들이 남긴 영적 유산”입니다. 오늘 “우리는 기억력도 나쁘면서 말씀을 잘 듣지 않고, 단지 예배 참석에만 의미를” 둡니다. 말씀을 듣고 “동의하고 인정하지만, 내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믿음의 자리를 지키지” 못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무엇인가를 듣고 하루가 지나면 5%만 기억하고, 직접 읽으면 15%, 열심히 공부하면 35%, 그러나 마음에 새기고 묵상하면 100% 기억한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 말씀도 마찬가지여서,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면 말씀은 나와 전혀 무관하게” 됩니다. 묵상은 “어렵고 힘들어도, 말씀을 내 이야기로 수용하고, 말씀을 삶에서 실천하려 노력하고, 그 실천을 통해 영적 체험이 생기는 과정이 반복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말씀 묵상은 내가 말씀을 조정하지 않고, 말씀이 내 삶을 조정하게” 됩니다. 오늘날 “세상은 너무 악해서, 이처럼 말씀 충만, 성령 충만해야, 우리가 믿음의 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삶에 하늘의 형통함을 선물로” 주십니다. 비록 “코로나-19가 극심해도, 말씀 묵상을 통해, 나의 영적 자리를 굳건히” 합시다. 믿음의 “자리가 굳건해야, 코로나-19와 그 어떤 환난에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주도 “말씀 묵상으로 내 믿음의 자리를 지켜서, 하늘의 형통함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

2. 환난 중에도 형통하려면 선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3절은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말씀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물 공급이 잘 되어서, 철을 따라 좋은 열매를 맺게 되고, 마침내 그 삶이 형통함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반면에 “본문 4절은,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말씀합니다. 상식적으로 “바람에 나는 겨는 정착할 수 없기에,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이를 통해 “시편 기자는 참된 형통함은 선하고 복된 열매를 맺는 삶임을” 강조합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여기서 “이름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열매를” 뜻합니다. 훗날 “내가 살아온 삶의 열매는 한 권의 책, 한 페이지의 문장이 아니라, 오히려 짧은 한마디 말로 남을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실했어! 게을렀어! 똑똑했는데 자기만 알았어! 가짜였어! 진짜였어!”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고난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나는 과연 선한 열매와 악한 열매 중 어떤 열매를 맺어 왔는가?” 두렵지만 “지금까지 내가 맺은 열매로 내 미래가 형통할지, 그렇지 않을지가 결정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선한 열매를 맺으며 참 형통함을 누리려면, 항상 선한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각자 “삶의 열매는 뿌린 대로, 심은 대로 거둘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가변적 “세상은 뿌린 대로 거두게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뿌린 것보다 항상 더 좋은 것으로” 채우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항상 더 좋은 것으로 채우는 하나님이 아니라, 쓸데없는 곳에 씨를 뿌리며” 살아갑니다. 고전 15:6절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다!” 말씀합니다. 당시 “주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500명은 모두 다 복음의 증인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믿음의 자리를 떠난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삶의 씨앗을 하나님이 아닌 세상에 뿌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박해와 환난 중에도, 삶의 씨앗을 하나님께 뿌린 영혼이 남긴 열매는” 달랐습니다. 당시 “그들은 엄청난 고난을 겪었지만, 그 심령은 항상 하늘의 형통함을” 누렸습니다. 그렇게 “환난 중에도 선한 씨앗을 뿌린 삶이 사도들 본인과 당시 사람들, 역사 속 신앙인과 오늘 우리까지, 모두를 하늘의 형통함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씨를 뿌려야 열매가 풍성하고, 세상에 뿌린 씨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폴란드 “비아워비에자는 유럽의 아마존으로 불리는 울창한 삼림 지역”입니다. 특이하게도! “그곳의 엄청난 크기의 거목들이 작은 풍랑과 바람에도 쉽게 넘어질 때가 많다고” 합니다. 이유는 “비아워비에자 지역 토양이 너무 비옥해서, 나무가 뿌리를 깊이 내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엄청난 거목도 뿌리가 얕으면, 작은 비바람에도 넘어지는 것”입니다. 코로나-19는 “앞으로 우리가 어디에 뿌리를 내려야 형통할지, 묵직한 도전을” 줍니다.

아무리 “위대하고 화려해도, 세상에 뿌린 내린 삶은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불과 “두 달간 창궐한 코로나-19로 인해, 세계 전체가 휘청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연약해도, 작은 씨앗인 우리가 하나님께 삶의 뿌리를 내리면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난주까지 “우리는 사랑 나눔 물품을 통해, 전 교인이 한 가족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렵고 “힘들지만, 서로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한 가족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하나님께 삶의 뿌리를 내리고, 한 하나님 주시는 형통함을 사모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한 가족이기에 서로 사랑과 믿음, 도움과 배려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힘들수록 “한 가족이기에 같이 아파하며 눈물 흘리고, 함께 하늘의 형통함을 추구하며 살아가면! 지금의 코로나-19를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형통함은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 함께 누리고, 전해야 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한주도 “힘들고 어렵지만, 선한 씨앗을 뿌리고, 선한 열매를 맺어서 모두 함께 하늘의 형통함으로 이 환난을 이겨내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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