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8년, 유엔은 세계 156개국에 관한 행복지표를 발표”했습니다. 행복도가 “가장 높은 국가는 핀란드였고, 한국은 57위였는데,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다음과” 같았습니다. “지나친 물질주의와 이기주의, 빈부격차로 인한 양극화, 무한경쟁과 욕망을 부추기는 사회 구조” 당시 “한국교회가 국민이 느끼는 불행에 대해 바른 답을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불행히도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하고, 교회로서 제구실하지 못함이 주원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다 어려워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일부 교회는 바로 서서 부흥하고” 있습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섬기는 교회가 바로 서서 부흥하고 성장하기” 원합니다. 문제는 “교회가 바로 서려면, 하나님 은혜가 필요하고, 성도 각자가 믿음 위에 바로 서야!” 합니다. 문제는 “악한 세상에서 현대 교회가 충분히 성장하고 부흥할 수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엡 1:23절은 “교회는 그의 몸이니, 교회를 주님의 몸으로 정의”합니다.
또한 “본문 18절은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그 몸, 교회에 두셨다.” 말씀합니다. 주께서 “몸의 지체를 주님 뜻대로 두시듯, 우리도 주님께서 이 자리에 두셨기에, 이렇게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0절은 주의 몸을 구성하는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이다!” 말씀합니다. 이처럼 “주의 몸 된 교회는 하나님께서 두신 지체들이 합력하여 신령하게 세워져 가야 했지만, 불행히도 고린도 교회는 사분오열로 나뉘어 다투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이를 듣고 모든 지체가 서로 다르지만, 모두가 함께 동역해서 교회를 바로 세워가야 함을” 도전했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각자는 자라온 배경, 믿음의 그릇, 삶의 정황이 많이” 다릅니다. 심지어 “부부도 다른데, 어떤 부부는 닮았다고 하면 서로 기분 나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 있는 우리가 다 달라도, 유사한 점, 함께 할 수 있는 공통점도 적지!” 않습니다. “한국적 뿌리, 미국 뉴저지, 티넥의 한소망교회, 한 하나님! 함께 예배드림!” 하나님께서 “이처럼 다르고 다양한 우리를 한소망교회, 이처럼 한 자리에 두신 이유가” 있습니다.
합력해서 “주의 몸인 교회를 바로 세워서, 교회가 악한 세상에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고 세우는 구원의 방주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2020년 사역박람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로 함께 교회를 세워가기” 원합니다. 한소망교회는 “총 18개의 사역부서가 있고, 부장과 함께 동역할 헌신자를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재능과 능력을 주심은, 그 재능과 능력으로 교회를 함께 세워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내가 타인보다 잘 하는 것, 좋아하는 것, 교회와 성도에게 유익이 되는 것,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면,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한소망교회가 바로 서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살펴봅시다.
1. 교회가 바로 서려면 각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21절은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눈과 손, 발이 나오지만, 우리 몸에는 이보다 더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또한 “지체마다 그 중요성과 요긴함, 아름다운 정도가 다” 다릅니다. 그래도 “각 지체가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몸이 제구실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눈이 아프고, 손과 발이 제구실하지 못한다면, 우리 건강이” 어떨까요?
몸을 “구성하는 각 지체가 각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몸이 건강을 잃고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교회를 구성하는 지체가 최선을 다하지 않는데, 교회가 어떻게 굳건하게” 서겠어요? 교회는 “한 명의 천재가 아니라 다양한 지체의 합력으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부족해도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합력할 때, 하나님 교회가 교회 될 수” 있습니다. 특히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주님께서, 지금 내가 봉사해야 할 곳에 나를” 세우셨습니다.
부족해도! “아직 내가 교회와 주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필요하기에, 내가 해야 할 일을 주신 것”입니다. 특히 “많은 사람 중! 나를 세우셔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주심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사역을 찾고, 그 자리에서 다른 지체와 함께 동역해야!” 합니다. 물론 “교회는 어떤 강제성을 가진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두신 그 자리가 내 자리임을 믿는다면, 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역에 최선을 다할 때! 나와 가정, 자녀와 교회, 미래가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최선을 다하려면, 내게 주신 사역에 한 번 더 수고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이 정도면 되었다! 생각하기보다, 한 번 더 수고하는 헌신이” 필요합니다. 주님 일에 “한 번 더 수고함으로 나와 주변 모두가 살고, 하나님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한 번 더 수고하는 열정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심중에, 저 사람은 안 하는 데 왜 나만 이렇게! 굳이 이렇게까지 열심히 해야 해? 이 정도면 충분해! 나는 최선을 다했어!”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이 한 번 더 수고하는 것을 보고, 나도 저렇게 한 번 더 수고해야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타인의 부정적 모습만 보고, 나도 같이 안 해도 된다고 자위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살리신 이유는, 내가 해야 할 사역이 있고, 나를 쓰시기 위함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변과 비교하기보다, 변명과 핑계보다, 하나님 주신 일에 한 번 더 헌신해야!” 합니다. 주님 “말씀처럼, 오리를 가자면 십 리를 가주고, 속옷을 원하면 겉옷을 벗어주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오리는 고사하고 작은 옷조차 나누려 하지!” 않습니다. 눅 10장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에게 맞아 거반 죽게 되었는데, 레위인과 제사장은 이를 외면하고” 맙니다. 반면에 “무시 받던 사마리아인은 환자를 자기 나귀에 태워서, 치료받게” 했습니다. 심지어 “돈이 더 들면 더 감당하겠다! 말하며 한 번 더 사랑을” 베풉니다. 이에 “주님은 누가 참 이웃인지, 누가 사람을 세웠는지!” 물으셨습니다. 문제는 “직분이 무엇인지! 얼마나 오래 믿었는지! 이것보다 한 번 더 수고하는가? 이 태도가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오늘 “2020년을 위한 사역박람회가 있는데, 내가 함께할 사역을 정하고, 그 사역에 동참하기” 원합니다. 문제는 “이름만 올리거나 자리만 차지하지 말고, 한 번 더 수고하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주신 재능이 더 나아지고, 교회가 더 든든히 세워져 갈 것”입니다. 심중에 “누군가 하겠지! 나는 연로해! 아직은 아니야!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한 번 더 수고함이 쉽지 않고, 시간과 희생이 더 많이 요구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바쁜 이민자의 삶에 주님의 사역에 동참함이 큰 부담과 버거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찾아보면, 내가 감당할 사역이 분명히” 있습니다. 문제는 “감당할 사역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역을 찾으려 하지 않는 소극적 태도, 감당하려는 열정이 없음에” 있습니다. 연로해도 “예배 자리를 지키는 것도 참으로 소중한 헌신”입니다. 우리가 “올해도 주님 주신 재능으로 주님의 일에 한 번 더 수고해서 교회를 함께 세워가기” 원합니다.
2. 교회가 바로 서려면, 서로를 존중하며 합력하여야 한다.
바울은 “본문 22~23절에서, 주님의 교회에서 소외될 수 있는 세 유형의 지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더 약한 지체, 덜 귀히 여기는 지체, 아름답지 못한 지체” 문제는 “더 약하고, 덜 귀하고 아름답지 못하지만, 쓸데없고 불필요한 지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몸이 강건하고 제구실하려면, 이처럼 소외된 지체를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랑과 배려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 “모든 지체가 요긴하고, 귀하게 되고, 아름답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본문 23절은, 각 지체를 더욱 귀한 것으로 입혀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다!”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연약한 지체를 강하고 요긴하게 하시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십니다.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나처럼 부족하고 소외된 영혼을 사랑하고 배려해서 세우셨기에! 나도 주변을 배려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배려와 존중을 잃어서, 분열하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고전 13:5절에서, 사랑은 무례하게 행하지 않는다!”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넘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서로 존중하고 배려함, 서로 사랑함이 사라져가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고, 물질로 인한 차별도” 있습니다. 주님은 “공감적 이해자로 모든 인간을 품으셨지만, 교회는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다시 서려면! 먼저 우리 각자가 서로를 진심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사역 중, “나이와 직분으로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명령하기보다, 설득과 부탁하는 태도가 더” 필요합니다.
주님 일에 “동역하려면, 더 겸손하게 낮아지고, 배려와 존중이 있어야!” 합니다. 혹자는 “내가 뭐가 아쉬워서 낮아져! 무슨 배려를 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해서, 누군가가 주의 일에 동참하고, 그래서 교회가 설 수 있다면, 백번이라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어떤 “아내가 남편을 보며, 당신은 내 인생에 로또에요!” 말했습니다. 남편이 “내가 당신에게 그렇게 소중하고 행운이야! 정말이야?”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그럼요! 그래서 그런지! 하나도 안 맞아요!” 답했대요. 실제로 “사람은 다 달라서 안 맞고 다를 수 있지만, 그래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특히 “멀리 있고 모르는 사람보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도의 관계는 물론 섬기는 교회가 더 든든하게 세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 9:20절은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말씀합니다. 바울은 “누군가를 세우려고 희생하는 존중과 배려가” 컸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먼저 존중과 배려로 다가갔을 때!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 바울도 더 크게 쓰임” 받았습니다. 유고의 “작은 성당에서, 미사 중, 옆에서 시중들던 소년이 성찬용 포도주잔을” 엎질렀습니다.
이에 “신부는 미사 중이었지만 아이의 뺨을 때리며” 소리쳤습니다. “여기서 나가! 다시는 이 제단에 얼씬도 하지 마!” 얼마 후 “똑같은 상황이 주변 성당에서 일어났는데, 신부의 반응이” 정반대였습니다. 신부는 “책망과 핀잔보다, 괜찮다! 나도 어렸을 때 그런 실수가 잦았단다!” 격려했습니다. 훗날 “이 두 소년의 운명이 갈렸고, 역사에 미치는 영향도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모욕당한 “아이는 유고의 독재자 조셉 티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격려받았던 소년은 풀턴 쉰 대주교가 되어, 주님 나라를 위해 크게” 헌신했습니다. 교회는 “다른 무엇보다, 존중과 배려, 설득과 이해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기독교 황금률 “마 7:12절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말씀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 배려와 존중을 원하고, 설득해주고 이해해주길 바라지만, 나는 그렇게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특히 “교회는 믿음이 연약한 분, 교회 미래를 짊어지고 가야 할 자녀와 젊은 영혼을 더 배려하고 존중하며, 설득하고 이해해야 더 굳건하게 설 수” 있습니다. 2020년 “사역박람회를 통해, 주님 주신 사역 현장에서 사랑과 배려로 함께 동역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올해 우리 교회가 더 굳건히 세워지고, 부흥과 성장이 있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