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이 곡이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 처음부터 너무 진한 잉크로 사랑을 쓴다면 지우기가 너무너무 어렵잖아요!” 사람이 “이 땅을 살면서 실수하고 실패할 수 있지만, 다시 회복할 기회가 분명히” 있습니다. 문제는 “이 땅의 삶을 다하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입니다. 인간은 “누구도 예외 없이 모두 다, 하나님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불행히도!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럽다고, 누구도 과거에 살아온 인생을 지우개로 지울 수 없고, 되돌릴 수도 없고, 한 번 더 살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후회하고 한탄해도!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우면, 그것이 끝일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이 “활동하던 1세기 말은 영지주의와 많은 이단이 초대교회를 미혹하고 공격했지만, 그래도 희망의 요소가 적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는 “본문 24~25절에 의하면, 처음부터 사도에게 들은 복음의 능력이 있었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생의 능력도 여전히 유효”했습니다. 또한 “본문 27절에서, 아무도 가르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성령의 기름 부음도 여전히”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런 특권이 많았지만, 이단의 미혹에 넘어졌기에! 본문 28절 말씀처럼 부끄럽게 되고” 말았습니다. 부끄럽다! “원어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감정을” 뜻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간절함으로! 초대교회가 이미 받아서 소유한 풍성한 은혜로 굳게 서서!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부끄럽지 않기를” 소원했습니다. 어떤 “영국인이 마하트마 간디에게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지금 인도의 가장 시급한 문제가 무엇인가?” 이에 “간디는 인도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경제와 사회복지가 아니라 인격 건설이다.” 답했습니다. 당시 “인도에서 인격 건설이 시대적 사명이었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긴급한 시대적 사명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인격 건설보다 신앙건설, 신앙을 바르게 건설해 나가야!” 합니다. 더는 “세속적이지 않고, 성경을 토대로 한 복음적 신앙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신앙이 “무너지면 내 인격과 인생도 무너지고, 가정과 교회도 무너지고, 마침내 영생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신앙을 바르게 건설해야, 훗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두렵지만! “성경은 천국도 있고 지옥도 분명히 있다고” 말씀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지옥이 아닌 천국! 영생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다행히! “아직 안 늦었기에,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남은 삶에서, 나부터 내 신앙을 다시 재건설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살펴봅시다.

1.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으려면,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27절은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말씀합니다. 요한은 “성령님께서 우리 삶에 기름 부음의 은혜를 주신다!” 말합니다. 실례로 “성령님은 우리를 거짓 없이 참되게 가르치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요 14:26절도 “보혜사 성령님께서 주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가르쳐 준다!” 말씀합니다.

문제는 “초대교회가 이처럼 존귀한 성령님의 기름 부음을 외면하고 거짓과 이단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초대교회는 하나님께 받은 많은 은혜를 상실했고, 영적 곁길로 빠져서, 마침내 부끄럽게 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첨단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기독교인도 성령님에 관해 다양한 오해를 하며” 살아갑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과거와 달리 약해졌다고! 성령님의 기름 부음을 미신이라고! 신화라고! 비과학적이라고” 치부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기름 부음은 지금도 살아있고, 그 능력이 지금도 여전히 강력”합니다. 아니! “세상이 악할수록! 성령님의 기름 부음이 더 풍성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성령님의 역사를 외면해서, 그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세상과 내 자아의 소리, 전통과 상식의 소리에 더 집착하며” 살아갑니다. 특히 “죄인인 인간은 본능에 따라, 먹지 말라 하면 더 먹으려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식탐이 있어서, 좋아하는 음식을 한 번 더 먹으려 하면, 아내의 눈빛이” 달라집니다. 그래도 “고집부려서 하나 더 먹으면, 집에 가면 후회할 때가 더” 많습니다. 문제는 “저만 이런 모습이고, 여러분은 혹시” 다르신지요? 이처럼 “죄인인 인간은 아닌 줄 알면서 변명과 핑계로, 성령의 역사를 외면하고” 살아갑니다.

분명히 “내 고집대로 하면 후회하고 한탄할 것을 너무도 잘” 압니다. 그런데도 “지금은 안 하겠다고! 나중에 하겠다고 미루고 연기하는 어리석음이 너무도” 많습니다. 구체적으로 “연약한 우리가 성령님의 음성! 기름 부으시는 은혜에 귀 기울여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성령님만이 “죄인인 나를 영원하신 생명, 영생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25절은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말씀합니다.

물론 “세상의 음성, 세상이 주는 편안함이 나름대로 기쁨과 즐거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것이 아무리 달콤해도! 그것이 나에게 영생을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의 기름 부음만이 죄인인 인간을 영생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을 피었다 지는 꽃,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로” 말씀합니다. 문제는 “우리 삶이 이처럼 짧고 덧없기에! 더욱 세상과 자아가 아닌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가야!” 합니다.

부족해도 “내가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면, 성령님께서 앞서가셔서 길을 열어” 주십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면, 악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온전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이 아닌 당당함으로 서도록 나를 지켜” 줍니다. 언더우드는 “원래 한국이 아닌 인도 선교사로 헌신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언더우드는 우연히 한국 선교의 문이 열린 것을 보고, 누가 적임자인지! 찾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왜 네가 가지 않느냐? 강권”하셨습니다. 언더우드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서, 선교부에 한국에 갈 선교 지원을 부탁했지만, 물질의 후원이 전무” 했습니다. 게다가 “뉴욕의 모 교회에서 언더우드를 담임목사로 청하자, 언더우드는 한국으로 가는 길이 막혔다고 확신하고, 뉴욕에 있던 교회에 부임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다시 언더우드에게 한국은 어떻게 하려고! 말씀하셔서, 한 번 더 선교부를” 찾았습니다.

놀랍게도, “불과 며칠 만에 익명의 독지가가 한국 선교를 위해 거금을 헌금했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마침내 “언더우드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서 한국에 왔고,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성령님의 “음성은 언제나, 한결같이 옳고” 온전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반드시 성령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이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승리가 있기” 원합니다.

2.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으려면, 믿음의 길에서 이탈하지 말아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처음 받은 복음, 사도들이 전한 복음에서 영적 곁길로 이탈하는 현상이 점점 심각해져” 갔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본문 27~28절에서, 주 안에 거하라! 그의 안에 거하라!” 강권했습니다. 이처럼 “주 안에! 그 안에! 이를 강조함은 초대교회가 주님을 벗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는 영지주의에 미혹되어 영적 이탈이” 잦았습니다. 마침내 “주님이 그리스도임을 부인하고,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훼손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요한은 초대교회를 그대로 방관하면, 교회와 대다수 기독교인조차 하나님 앞에 부끄럽게 설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이 점점 강해졌던 것”입니다. 특히 “본문 26절은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말씀합니다. 미혹하다. “원어 프라노스는 길을 잃게 하다. 탈선시키다. 유혹하다! 다양한 뜻이”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처럼 주 안에! 그 안에서 바른길을 벗어나서, 부끄러운 지경까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남성의 인생이 편하려면, 세 여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답니다. 세 여자는 “어머니, 아내, 그리고 내비게이션에서 길을 안내하는 여성”입니다. 특히 “운전할 때! 곁길로 빠지지 않으려면, 세 번째 여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문제는 “때로, 세 번째 여인은 틀린 길을 말할 때도 있기에, 꼭 그렇게 잘 들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를 가장 바른 길, 영생까지 이끌기에, 성령님의 음성은 반드시 듣고 살아가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를 알지만, 고집과 자기 의로움으로 인해, 영적 곁길로 빠져” 들어갑니다. 물론 “사람이 살면서, 곁길로 갈 수 있고, 잘못된 길에서 헤맬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곁길로 빠진 초기는, 다시 바른길로 돌아오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곁길로 빠짐이 길어지고 계속되면, 바른길로 돌아오기가 그만큼” 어려워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의 바른길을 가려면,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집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요한과 넘어진 초대교회 성도의 차이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지! 여부에” 있었습니다. 요한은 “핍박과 박해 중에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집중하며 영적 정도를 지키며” 살았습니다. 반면에 “많은 영혼이 하나님보다 이단에 미혹되어, 영적 곁길로” 빠졌습니다. 우리가 “훗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으려면,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세상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집중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마가는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바울의 1차 선교 사역에 뽑힐 정도로 인정받았지만, 밤빌리아 버가에서 무단이탈을 하고” 맙니다.

이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는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당시 “청년 마가에게, 두 사도의 다툼과 중도 포기는 참으로 큰 상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믿음을 저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집중하며 다시 일어났고, 다시 주 안에서 신실한 사역자로 성장해” 갔습니다. 그래서 “마가 요한은 다시 재기할 수 있었고, 영적 이탈로 인한 부끄러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일어난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엄청난 재난”이었습니다. 일본의 “많은 건물이 내진설계를 했지만, 속수무책으로” 넘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여러분에게 2001년 9.11 테러!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중에도 “가족의 생사를 알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며 애태운 가정도 적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 사건으로 110층 WTC 건물이 무너졌고, 무려 2996명이” 사망했습니다. 문제는 “이처럼 대형 사고를 막기 위해, 인간은 다양한 노력을” 다합니다. 그러나 “세상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이 땅과 내세의 안전을, 절대로 보장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아무리 위험을 대비한다 할지라도 이 땅에서 완전한 피난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나를 영생으로 이끌 유일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집중하고 주 안에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집중하는 믿음이 이 땅과 내세를 보장해주기 때문”입니다. 남은 “삶이 하나님께 집중하여 바른길을 걸어서 부끄럽지 않은 삶이 되기” 원합니다.